|
|

|
|
『보보담』 (步步譚)의 느린 걸음, 이제 순창에 닿기를
|
|
2026년 05월 15일 [순창신문] 
|
|
|
| 
| | ↑↑ 설정환 / 재:설정도시연구소 대표 | ⓒ 순창신문 | |
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계간지 『보보담』 한 권을 선물 받았다. 통권 60호 봄호였다. 책장을 펼치는 순간 잠시 숨을 멈추게 됐다. 선운사의 봄빛, 미당 서정주의 젊은 날, 고창 사람들의 얼굴과 오래된 골목, 들녘과 바다의 풍경이 한 권의 책 안에 천천히 스며들어 있었다. 특히 노순택 사진작가의 사진은 풍경을 찍은 것이 아니라 시간의 결을 붙잡아 놓은 듯했다. 그 책장들을 넘기다 보니 문득 몇 해 전 기억이 떠올랐다. 필자가 고창문화도시센터장으로 법정문화도시 지정을 위해 14개 읍면을 쉼 없이 뛰어다니던 시간이었다.
그때 필자는 끊임없이 질문했다. “고창다움은 무엇인가.” 화려한 축제인가, 거대한 건축물인가, 아니면 관광객 숫자인가. 하지만 현장을 돌수록 답은 의외로 소박한 곳에 있었다. 오래된 우물 하나, 어르신의 말투 하나, 장터의 냄새와 저녁 무렵 골목에 스미는 삶의 풍경 같은 것들이었다. 결국 문화도시는 거창한 개발이 아니라 사람의 기억과 장소의 결을 어떻게 존중하고 기록하느냐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보보담』은 바로 그런 잡지였다.
LS그룹 구자열 이사회 의장이 15년째 펴내고 있는 『보보담(步步譚)』은 ‘함께 걸으며 나누는 이야기’라는 뜻을 담고 있다. 최근 중앙SUNDAY 보도에 따르면 『보보담』은 지난 15년 동안 국내외 주요 지명 270곳과 국가문화유산 125건을 다뤘다. 300여 명의 필자가 참여했고 80여 명이 인터뷰에 응했다고 밝혔다. 한량과 예기, 유배와 표류, 법고창신 같은 주제를 통해 우리 사회의 문화적 결을 기록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보담』을 단순한 기업 사외보가 아니라 “인문 지리지”라고 부른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편집주간을 직접 맡아 활동 중인 구자열 회장의 태도다. 그는 이름만 올린 발행인이 아니다. 창간호부터 직접 편집노트를 써왔고, 오랜 시간 편집회의를 주재하며 잡지의 방향을 만들어 왔다. 회사가 적자를 내던 시기에도 잡지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광고를 늘리는 대신 종이의 질과 사진의 감도를 고민하고, 전국 공공도서관과 대학도서관에 무료로 배포해 왔다. 빠른 소비와 효율만을 강조하는 시대에 이런 잡지를 15년 동안 지속해 왔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문화적 실천처럼 느껴진다.
구 회장은 인터뷰에서 “빠르게 가다가도 한번 뒤돌아봐야 하잖아요”라고 말했다. 그 말이 오래 남았다. AI 시대일수록 오히려 천천히 걷고, 사람의 삶을 오래 바라보는 일이 더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중앙SUNDAY 보도에 주목한 것은 따로 있다. 『보보담』 15년 여정을 담은 지도였다. 서울과 강화도, 군산과 부여, 전주와 고창, 안동과 경주, 부산과 제주까지 전국의 이름들이 촘촘히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그 지도 어디에도 아직 순창은 없었다.
하지만 필자는 오히려 순창이야말로 『보보담』이 걸어야 할 다음 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순창 하면 고추장과 발효를 떠올린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특별하다. 그러나 순창의 깊이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순창은 사람과 자연, 생활문화가 아주 오랜 시간 천천히 스며들며 만들어진 인문지리의 공간이다.
여암 신경준은 순창이 가진 가장 깊은 정신적 자산 가운데 하나다. 『산경표』를 통해 조선의 산줄기와 땅의 흐름을 정리했던 그는 단순한 실학자가 아니라 땅과 길을 읽어낸 인문지리학자였다. 그의 시선은 『보보담』이 지역을 바라보는 태도와도 닮아 있다.
김세종 명창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 그런 판소리와 들소리의 전통 또한 순창의 중요한 자산이다. 순창 자수와 순창 종이 역시 마찬가지다. 손끝으로 시간을 새기던 사람들의 공력은 지금 시대가 잃어버린 느림의 가치와 연결돼 있다. 강천산과 회문산, 채계산, 용궐산과 섬진강 상류의 물길은 또 어떤가.
물론 『보보담』에 실린다는 것은 단순한 홍보의 문제가 아니다. 지역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문제다. 언젠가 『보보담』이 순창을 다루게 된다면 아마도 순창 사람들의 표정과 장터의 냄새, 섬진강 물안개와 겨울 새벽의 적막, 그리고 천천히 살아온 사람들의 시간을 함께 기록하려 할 것이다.
구자열 회장은 “사람은 사람과 엉켜서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보보담』 역시 사람에 대한 기록이다. 그렇다면 순창 또한 충분히 그 기록의 한 페이지가 될 자격이 있다. 이제는 『보보담』의 느린 걸음이 순창에도 닿기를 바란다.
설정환 / 재:설정도시연구소 대표
|
|
|
|
순창신문 기자 . “” - Copyrights ⓒ순창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
|
순창신문
기사목록 | 기사제공 : 순창신문
|
|
|
|
|
|

|
|
실시간
많이본
뉴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