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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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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4월 03일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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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순창신문 | |
주말이면 가끔 자전거를 탄다. 집을 나와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수유동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이 나온다. 그곳에 들러 책 몇 권을 고른다. 새 책처럼 반듯하지는 않지만, 누군가의 시간을 한 번 통과해 온 책들이다. 가격도 절반쯤이라 마음이 가볍다. 책을 배낭에 넣고 다시 자전거에 오른다. 우이천을 따라 내려가 중랑천을 지나고, 어느새 한강을 건너 여의도까지 닿는다.
강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달리고 돌아오면 몸이 적당히 피곤해진다. 그때 순대국 한 그릇에 소주 한 잔을 곁들인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나면, 낮에 산 책을 펼친다.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른 채 몇 장씩 넘기다 보면 하루가 조용히 끝난다.
가끔 생각한다. 책을 사는 방식도, 고르는 종류도, 처분하는 방법도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달라졌다는 사실을.
20대에는 지적 욕구가 지나치게 왕성했다.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이었다. 역사와 철학과 심리학 책들을 가능한 한 많이 읽고 싶었다. 당시 유행하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두꺼운 이론서들을 이해했는지 아닌지도 모른 채 끝까지 넘기는 일에 몰두했다. 당시 동아출판사에서 펴낸 한국대표소설선집 100권을 독파하고, 창작과비평사에서 창간호부터 묶어낸 통합본 30권을 미친 듯이 읽었다. 세면대야에 발을 담그고 막걸리를 마시며 <토지>와 <태백산맥>에 빠져들었다. 그 시절에는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책을 소유하는 일도 중요시했다. 서재에 책이 늘어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이사를 할 때면 철물점에서 노끈을 사와 밤늦도록 책을 묶었다. 묶어놓은 책더미를 바라보며 묘한 성취감을 느끼곤 했다.
30대가 되자 생활이 달라졌다. 직장이 생기고 결혼을 했다. 책 읽을 시간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문예지들을 사서 읽었고, 신인들의 작품을 탐독했다. 낯선 문체와 새로운 소재가 흥미로웠다. 영화 주간지를 사서 전철 안에서 읽었다. 출퇴근 시간은 그 시절 나의 작은 독서실이었다. 이때부터 책에 대한 생각도 조금 바뀌었다. 아이들이 생기고 집안이 비좁아지면서 더 이상 집에 책을 쌓아두는 일을 포기했다. 이사를 할 때면 대부분의 책을 중고서점에 넘겼다. 책이 빠져나간 자리는 곧 다른 책들이 서서히 쌓여갔다. 내 서재는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며 계속해서 물갈이되었다. 아주 최소한의 책으로만.
40~50대가 되면서 독서의 풍경과 방식도 달라졌다. 출퇴근을 자가용으로 하게 되면서 평일의 독서 시간은 더 줄었지만 대신 주말이 생겼다. 오전에는 자전거를 타거나 등산을 했다. 잠깐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그제야 책을 펼친다. 이 느린 리듬이 마음에 든다. 이제는 새로운 책보다 예전에 읽었던 책 가운데 다시 읽고 싶은 책들을 고른다. 그래서 중고서점에 자주 간다. 이미 한 번 읽었지만 다시 만나도 좋을 책들, 또는 예전에 놓쳐버린 책들을 천천히 찾아간다.
책이 어느 정도 쌓이면 다시 밖으로 내보낸다. 요즘은 당근마켓에 기부하듯 내놓는다. 그렇게 책은 또 다른 집으로 이동한다.
생각해보면 책은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시간을 잠시 통과했다가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는 것. 마치 강물처럼.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자전거를 타고 중고서점에 간다. 책을 산다는 일은 조금 이상하다. 아직 읽지 않은 문장들을 먼저 집으로 데려오는 일이다. 가방이 무거워진다. 그 무게는 종이의 무게지만, 어쩌면 아직 만나지 못한 생각들의 무게일지도 모른다. 우이천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강은 조금 넓어진다. 중랑천이다. 뛰는 사람, 걷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각자의 속도로 지나간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모르지만 같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더 내려가면 큰 강이 나온다. 한강이다. 강은 넓고 묵묵하다. 물 위로 새로운 봄의 빛이 부서진다. 숨이 조금 거칠어지지만 살아있다는 느낌은 대개 이런 순간에 온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온 강과 길이 몸 안에서 조용히 식는다.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지만, 내가 아는 길은 많지 않다. 주말의 자전거 길, 강을 따라 이어진 길, 그리고 책 속의 문장들이 이어 놓은 길. 나는 그 몇 개의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낸다. 시간은 계속 앞으로 흐른다. 강물처럼 멈추지 않는다. 나는 그 흐름 속에서 가끔 페달을 밟고, 가끔 책장을 넘긴다. 그 정도면 나에게는 충분하다. 이제야 독서에 관한 철이 든 것 같다.
이승주 / 광고대행사 미디어사업본부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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