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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사 근원과 향토사적 의미

2025년 09월 12일 [순창신문]

 

↑↑ 전. 풍산면장 임재호

ⓒ 순창신문



우리 군 인계면 호계마을에 있는 호계사(虎溪祠)는 여말선초 고려충신 임선미(林先味)를 모시는 사우(祠宇)이다. 이 호계사는 단순히 어느 종중 제각이 아니라 지역의 소중한 향토문화유산이란 점을 자각했으면 하는 바램에서 조선왕조실록 등 문헌에 근거하여 이 글을 쓰는 바이다.

호계사에 모셔진 인물은 충절의 대명사로 불리는 “두문동 72현((杜門洞72賢)”의 대표적 상징인 임선미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반대하며 조의생, 맹성 등 두문동 72현 혹은 72태학생으로 불리는 고려 유신들과 함께 고려 옛 수도인 송도(개성) 성문 밖 만수산에 들어가 문을 닫고 신왕조의 갖은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충절의 신념을 지키며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그 골짝에 불을 지르면 나올 것이라 하여 불을 질렀지만 끝끝내 나오지 않고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며 분사순절했다. 후세에 그들을 두문동 72현이라고 부르며 추앙했다.

그 일은 태조 4년 1394년으로 임선미의 무덤이 두문동에 있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다. 여기서 생겨난 고사성어가 곧 두문불출(杜門不出)이다. 근래에 는 유명인이 대내외 활동을 안 하거나 잠적할 때 흔히 쓰이고 있지만 본래는 그런 뜻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두문불출 두문동 이야기는 그 사건이 있고난 뒤 무려 360년이 지나서야 공론에 등장하고 기록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고려를 멸하고 개국한 조선에서 그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얼마나 엄격히 금하고 억압했는지 알 수 있다. 그 이야기 시작은 이렇다. 1740년 8월 영조가 개성을 행차하기 전에 “두문동의 옛 자취가 있다.”라는 말과 “ 두문동은 개성부 안에 있는데, 고려가 망한 뒤 사람들이 세상과 문을 닫고 살다가 죽었기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라는 말을 듣고 이후 그 곳을 행차하면서 부조현(不朝峴)에 이르러 ‘태종이 그들을 등용하려고 과거시험을 열었는데 이곳의 대족(大族) 50여 가(家)가 과거에 응하지 않고 관복을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넘어간 고개라 하여 부조현이란 이름이 생겼다는 유래를 듣고, 그들에 대한 충절을 높이 추앙하고 칭송하며. “고려의 충신들처럼 대대로 계승하도록 힘쓰라(勝國忠臣勉繼世).”고 7언시를 짓고 신하들에게도 연구를 지어 올리도록 했다. 또, 어필로 부조현 비석을 세우게 하면서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 뒤 1751년 영조 27년 두문동을 행차하면서 “고려 충신들이여 지금 어디에 있는가. 특별히 그 동리에 비를 세워 그들의 충절을 표창하노라.(勝國忠臣今焉在特竪其洞表其節)”라는 친필 비석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도록 명했다. 이어 “두문동 72인 가운데 단지 임(林), 조(曺) 두 성이 있을 뿐이라고 하니 매우 개탄스럽다. 두 성(姓) 가운데 직임을 감당할 수 있는 후손을 찾아 등용하게 하라” 했다. 그해 10월 21일 개성유수 서종급은 헌관에 정헌대부, 전사관에 통훈대부, 대축에 조산대부, 사의에 통훈대부 등이 치제에 참여했다고 보고했다.

호계사는 고사성어 두문불출(杜門不出) 두문동의 충절지사가 근원(根源)
호계사 배향 임선미는 두문동 72현의 대표적 상징 인물, 순창인(淳昌人)

영조 뒤를 이은 정조는 1783년 7월 “두문동 72인의 우뚝한 충절이 진실로 정몽주·길재의 성취에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72인 중에 성명이 전해지고 있는 사람은 조의생, 임선미와 맹씨로 성만 전해지고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들 세 사람을 개성 숭절사에 배향할 것을 개성유수 서유방이 상소하자, 정조는 허락하면서 이어 성균관 서쪽에 별도로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사액하고 치제토록 명했다. 이때가 1783년 7월 26일이다. 이렇게 시작된 임선미를 비롯한 두문동 72현에 대한 조정에서 숭모 향사는 1868년(고종 5년) 대원군 서원철폐로 표절사가 훼철되면서 중단되었다.

당시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 사람인 이우당 이경(李瓊)은 두문동에서 두문재 임선미가 불사이군 분사순절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만시(晩時)를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는데, 그 만시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또, 그들의 충절 이야기는 360여년이 지나도록 잊어지지 않고 “중경지”, “인물고”, “영남인물고”, “고려명신전”, “숭양기구전”, “승국명 류표방록” 등 인물전기와 김정호의 “여도지비”, “대동지지”, 오횡묵의 “여재촬용”등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특히, 신하가 임금을 칠 수 없다는 역성혁명의 하극상을 경계하며 의(義)를 강론한 두문재의 유문 벌걸주론(伐桀紂論)이 후세 사림의 충절사상 이론적 지표로 크게 영향을 주었기에 두문동 72현 중에서도 임선미를 대표적인 상징 인물로 제일 높이 추앙했던 것이다.

그 후 송조헌(宋祖憲)을 비롯한 영호남 유림들이 1932년 전라남도 장성군 만수산에 경현사(景賢祠)를 세우고 임선미를 비롯 두문동 72현 등을 배향 춘추로 향사했다. 그러나 일제는 지식인 유림들이 충절신 배향을 명분으로 암암리에 항일활동을 하자 1941년 경현사를 강제로 훼철했다. 이에 격분한 유림과 후손들은 그 곳에 모셔진 위패를 땅에 묻거나 이안해 갔다. 임선미의 위패도 순창향교를 비롯한 유림과 후손들이 의논한 끝에 두문동 충절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위패를 모셔오기로 하고 후손 집성촌인 인계면 호계마을로 1941년 음력 3월 17일 이안해 왔다. 이 것은 순창인들의 은연중 항일의 발로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임선미의 후손이 순창 보다는 화순에 더 많고 그 세도 크다. 그러함에도 순창으로 온 것은 임선미가 순창인이란 점에서 순창향교 유림의 적극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순창향교 유림을 비롯한 후손들이 사우 건립을 발의하고 성금을 모아 1942년 가을에 착공 1943년 봄에 본당과 내삼문을 건립 7월 15일을 창건일로 했다. 그리고 향교 유림의 논의로 지명을 딴 호계사로 명명 편액을 걸고 이듬 해 경현사에서 위패를 이안해 왔던 날을 기념하여 후손들의 집례로 위패봉안식을 올렸고, 석채춘향에는 향교 유림이 헌관과 집례를 주관하여 제향을 거행했다. 이어 1946년 이후에 강당과 외삼문 등이 준공되면서 현재의 호계사 형태를 갖추었다. 이렇게 시작한 호계사 제향의 헌관과 집례는 이후 모두 향교 유림이 주관한 가운데 매년 음력 3월 17일 향사를 거행해 왔다. 뿐만 아니라 순창향교 유림에서는 호남 각 향교에 통문을 보내어 호계사에 임선미의 배향 소식을 알렸고 이에 광주, 나주, 익산, 남원, 고산, 운봉 등 수많은 향교에서 답통이 왔다. 특히, 순창향교 유림에서는 호계사 제향을 위한 호계사유림계와 유림친목의 모현계 등을 조직 운영하였고, 후손들은 위토를 마련해 봉납하는 등 향교 유림과 후손들의 공의가 이어져 왔지만 애석하게 2000년대 중반부터 후손들만이 겨우 향사를 유지하는 실정에 있다.

이러한 호계사는 비문화재로서는 드물게 전학후묘형(前學後廟形)의 정형적인 사우 배치를 이루고 있고, 1740년부터 왕이 비석을 세우고 표절사를 세워 조정에서 향사한 사실과 그 연장선에서 향교 유림의 공의로 경현사에 이어 호계사에서 배향하고 꾸준히 추모해 왔다는 역사적 사실 또, 임선미가 순창인으로 후세 사림에 회자되면서 “충절의 고장 순창”이란 명성을 갖게 한 점, YTN방송 유튜브에서 고사성어 두문불출 근원 사우로 호계사를 조명하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하면 삼인대와 함께 호계사를 지역의 충절문화 정신유산으로 보전하고 선양할 가치가 충분하다는데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본다.

1) 임선미(1337~1394)의 본관은 순창이고 자는 양대(養大) 호는 휴암(休庵) 또는 두문재(杜門齋),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며 한림원 태학사(太學士)이다. 그의 선친은 고려 충숙왕 때 우상시, 밀직부사, 지밀직사사, 추성양절공신으로 첨의찬성사에 이어 순창군(淳昌君) 책봉 찬성사로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섭행한 임중연(林仲沇)이다. 그는 후에 순창임씨 시조가 된다. 또, 그가 전리총랑으로 있을 때 순창성황대신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의 존호를 가상하는 일에도 관여했다는 순창성황대신사적 현판에 기록되어 있고, 거기에 등장하는 임대영, 임백 등 수많은 임씨들은 모두 그의 후손들이다. 임선미는 당시 부모 100일 단상 풍습을 3년 상(喪) 예제로 정하게 하고 실천했다. 현재 임선미의 본관이 평택임씨로 된 것은 1901년 순창임씨를 평택임씨로 개칭한 이후부터 일이다.

전. 풍산면장 임재호

순창신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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