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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1. 외지인

2023년 02월 15일 [순창신문]

 

ⓒ 순창신문



제1107호부터 ‘오피니언’ 지면 ‘사노라면’ 코너를 통해 박진희 작가가 ‘짧은 소설’을 선보인다. ‘짧은 소설’은 장편(掌篇) 또는 콩트라고도 불리는 아주 짧은 형식의 소설이다. 웹을 통해 책을 읽는 문화가 널리 퍼지면서, 짧은 소설이 웹뿐만 아니라 단행본으로 발행되는가 하면 일간지(신문지면)를 통해 선보이기도 한다.

본지에서도 7주에 1회 완성된 형태의 짧은 소설을 만나볼 수 있다. - 편집자 주(註)


-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기관, 사건 등은 저자의 의도에 따라 창작된 허구임을 밝혀둡니다.

눈이 내린 도로 위로 뿌옇게 피어오른 안개 속을 비상깜빡이를 켜고 출근하면서, 수인은 문득 눈과 안개에 매몰되어 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악천후 속에서 어김없이 출근길을 재촉하는 자신이 신기한 능력이라도 생긴 것처럼 뿌듯했다. 그러다가 눈 위를 능숙하게 다닌다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뿌듯하기까지 한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고, 10년 전 대책 없이 시골로 살림을 옮겨 왔을 때의 철없음이 그녀의 마음에 여전히 잔류하고 있는 것 같아 자신을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 눈이 옹벽처럼 쌓인 주차장으로 수인의 모닝이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아직 아무도 밟지 않는 눈 위로 수인의 알래스카 부츠가 여울(여럿이 어울림의 준말)문화센터 문 앞까지 깊게 발자국을 새겼다. 주변에 있는 가게들과 공공기관들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수인은 이틀간 장맛비처럼 내린 눈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출근하는 직원들이 마을까지 올라오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주변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인적이 끊어진 지 오래된 마을처럼 적막했다.

10시가 지나자 구름 사이로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인근에 거주하고 있는 군의원이 노신사 한 분과 함께 센터를 방문했다. 다른 기관들은 모두 문이 닫혀있는데, 여울문화센터만 문을 열어 노랗게 불을 밝히고 있는 걸 보고 온 모양이었다. 그때 노인공익활동으로 일하고 있는 문 씨 할아버지가 분주히 오가며 센터 앞의 언 눈을 치우며 길을 내고 있었다. 군의원은 센터에 들어오기 전에 문 씨 할아버지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 후 안으로 들어와 동행한 어르신에게 “지금 밖에서 눈 치우고 계신 할아버지 있잖습니까. 다른 지역에서 들어온 외지인입니다요.”라고 말했다. 센터를 총괄하고 있는 수인은 의원이 잠깐 사이에 초면인 문 씨 할아버지의 신상을 파악하고 들어온 뒤 할아버지를 외지인이라고 지칭하는 게 못마땅했다. 의원과 눈이 마주치자 수인는 어색하게 웃으며 가볍게 목인사만 했다. 의원도 수인를 보면서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더니, 수인이 어느 동네 사람인지 알아보고는 다시 동행한 노신사에게 “이분도 외지 사람입니다요.”라며 방금 했던 말을 반복했다. 그 순간 억지로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맞이하던 수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저는 외지인이 아니고요, 이곳에서 산 지 10년째 되는 주민입니다.” 수인의 말투에 냉기가 흘렀다. “그리고 밖에서 청소하고 계신 어르신도 이 지역에 거주하고 계신 주민입니다. 노인 일자리 노임으로 저렇게 일해주시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정말 감사한 분이지요.” 수인은 구태여 묻지도 않은 말까지 해가며 문 씨 할아버지의 남다른 근면함을 증언해주었다. 의원은 수인의 태도에서 자신이 뭔가 결례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그다지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습관적으로 자신의 명함을 내밀며, 필요한 일이 있으면 자신을 찾으라고 했다. 그리고 바쁜 일이 있어 먼저 가봐야겠다며 슬쩍 자리를 피했다. 함께 온 노신사도 지역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었지만, 눈을 해치고 찾아온 이유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냉랭해진 분위기 때문에 본론은 꺼내 보지도 못한 채 의원의 뒤를 따라 총총히 센터 문을 밀고 나갔다. “여기까지 온 보람이 없는구먼…….”이라는 말 뒤에 뭐라고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꼬리처럼 달아났다.
수인은 마을에 집이 있고 엄연히 거주하면서 외지인이란 소릴 듣는다는 게 불쾌했다. 도시에서도 이사한 적이 몇 번 있었지만, 거주지가 바뀌어도 외지인이란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은 없었다. 외지인이란 수식어에서 촌락에만 있는 뿌리 깊은 경계 의식이 느껴졌다. 오히려 가깝게 지내는 갈재 주민들에게선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데 생각이 닿자, 의원이란 사람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의원은 몇 해 전 수인의 집으로 선거 유세를 하기 위해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의원이 되기 전이라 사람을 대할 때 조심스러운 태도가 있었는데, 의원으로 자리를 굳힌 탓인지 조심스러운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거드름을 피우는 모습이 미덥지 못했다. 수인은 의원의 이런 태도가 이곳이 고향이란 이유로 쉽게 표를 얻어 재임에 성공하면서 몸에 밴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음 지방 선거에선 표를 주지 않음으로써 주민의 권리를 행사하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센터 안팎을 오가며 청소하시던 문 씨 할아버지가 분리수거를 마치고 평소와 다름없이 커피믹스를 타고 있었다.

“어르신 날도 추운데, 고생하셨어요.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는 날엔 안 나오셔도 되세요. 괜히 나오셨다가 눈길에 사고라도 나면…….” 커피를 마시기 위해 소파에 막 앉은 문 씨 할아버지를 향해 수인이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녀요, 선상님도 요렇코롬 출근허셨는디 당연히 나와야지요. 살살 나오면 괜찮혀요.” 할아버지의 말에 겸손함과 근면함이 묻어났다. 할아버지는 커피 한 잔을 다 마시고 혼자 남게 될 수인을 걱정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말끔하게 정리된 일터가 더욱 텅 비어 보였다.
오후가 되자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함박눈이 센터 앞 운동장과 개울과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가리며 사선으로 쏟아지는 모습은 절정기를 맞은 벚꽃잎이 흩날리는 것처럼 황홀했다. 하지만 황홀한 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일대가 온통 침묵 속에 휩싸인 채 눈발은 점점 굵어지고 하늘과 땅이 모두 희뿌옇게 채워졌다. 수인은 퇴근길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한 해 정산보고서와 실적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기간이라 쉽게 문을 닫고 퇴근하기도 어려웠다. 일기 예보를 검색해 보니 눈은 며칠 더 쏟아질 모양이었다. 그러면 더더욱 하던 일을 마무리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액을 맞추고 보고서를 작성하다 보니 어느새 밖이 어둑해졌다. 더 시간을 끌었다간 정말 일터에 갇힐 것 같았다. 서둘러 문서를 저장하고 클라우드에도 문서를 저장해놓은 후 문을 나섰다. 막상 밖으로 나왔을 땐 안에서 볼 때보다 눈이 더 높이 쌓여있었다. 큰길로 들어서자 가로수가 드문드문 심어진 도로 위로 쏟아지는 함박눈 때문에 도로와 반사경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어둠 속에 눈발들이 거침없이 차창으로 달려드는 바람에 수인의 모닝이 눈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시 현상이 나타났다. 앞으로 나가고 있다는 속도감마저도 감지할 수 없게 되자 액셀러레이터를 누르는 발이 허공에 힘을 가하는 것처럼 무력했다. 어딘지도 모르는 자리에 무작정 차를 세웠다. 까마득한 무중력의 공간에 부유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갈재는 눈이 얼마나 별나게 내리는지 사람 여럿 잡아먹은 곳이여. 도로가 나기 전엔 사람들이 산길을 따라 오가고 혔는디, 인명 사고가 잦았구먼. 눈 내리는 날 고등학생 두 명이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얼어 죽은 사고가 있었지. 폭설에 길이 눈 속에 파묻혀서 산속에서 길을 잃어버렸던 거여. 다음날 사람들이 산을 뒤졌는디, 학생들을 찾았을 땐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지 뭐여…….”

수인은 일전에 마을 어른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도로가 훤하게 뚫린 지금도 폭설이 내릴 때면 속수무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눈 속에 갇혀 길 위에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수인은 무의식중에 차에 시동을 걸어 눈보라를 밀고 나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도로도 이정표도 보이지 않았지만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자신의 감각을 믿고 나가기로 했다. 이런 눈보라 속에선 누구도 와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토록 철저하게 홀로 까마득함을 밀고 나간 적이 있었나’하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짙은 연막 같은 눈발을 밀고 나가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게 달려드는 눈발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깃든 감각으로 천천히 두려움을 밀고 길을 찾아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마을 어귀가 보이기 시작했다. 수인은 그제야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를 풀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도로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은 바리캉이 한 번 지나간 것처럼 트랙터가 지나간 자리만 길이 나 있었다. 이웃인 정 씨 아저씨가 트랙터로 눈을 밀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수인의 집 마당 안까지도 차가 들어갈 수 있도록 인정스레 길을 내놓았다. 이토록 지독한 눈이 내릴 때면 이곳에 살면서 생긴 불가사의한 감각과 함께 목격되는 이웃의 배려가 수인의 마음에 차곡차곡 함박눈처럼 쌓여갔다.

박진희 / 복흥작은도서관장

순창신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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