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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천년의 뿌리 육부전(六部殿)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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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9일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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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순창신문 | |
지난 8월20일 경주의 육부전(六部殿) 회중(會中)으로부터 금년도 9월18일에 거행되는 육부전 신라대제(新羅大祭)의 헌관으로 천거되었다는 통지 서한을 받았다. BC 57년 신라를 개국한 육부 촌장의 후손으로서 그 선조(先祖)들을 기리는 대제에 헌관으로 추천된 것만으로도 본인뿐만 아니라 우리 문중에 영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양산재(楊山齋)라 불렸던 육부전(六部殿)은 양산 아래 자리 잡고 있는 신라의 개국공신 육촌장(六村長)의 위패를 모시고 재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가 건국하기 전 진한(辰韓) 땅에 고조선의 유민들이 나뉘어 살면서 육촌을 이루었다. 첫째는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 둘째는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셋째는 취산 진지촌, 넷째는 무산 대수촌(茂山大樹村),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金山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이라 하였다.
2079년전 여섯 촌장이 알천 언덕에 모여 알에서 탄생한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신라의 초대임금으로 추대하니 그해가 바로 신라가 개국(開國)한 건국년(建國年)이 되었다. 그 후 신라 제3대 유리왕(儒理王)이 여섯 촌장들의 신라 건국 공로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육촌을 육부로 고치고 각기 성을 내리니 양산촌은 급량부(及梁部)이씨(李氏), 고허촌은 사량부(沙梁部)최씨(崔氏), 대수촌은 점량부(漸梁部)손씨(孫氏), 진지촌은 본피부(本彼部) 정씨(鄭氏), 가리촌은 한기부(漢祇部) 배씨(裵氏), 고야촌은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로 사성(賜姓)되었다. 그후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은 신라6부장을 왕으로 추봉(追封)하여 급량 부장은 은열왕(恩烈王), 사량부장은 문열왕( 文烈王), 점량부장은 문의왕(文義王), 본피부장은 감문왕(甘文王), 한기부장은 장열왕(壯烈王) 그리고 습비부장은 장무왕(壯武王)이 되었다.
따라서 신라대제는 우리국민이 역사의 한 뿌리를 돌이켜 볼 수 있는 귀중한 행사라 할 수 있을 것이며 특히 육부장(六部長) 후손들에게는 각자 시조(始祖)를 기리며 모시는 뜻깊은 대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후손들이 이 대제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이며 거기에 헌관의 기회까지 주어진다면 더할나위 없는 영광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후손의 수효가 수백만 명에 이를 정도로 많고 또한 초헌관(初獻官)은 도지사나 경주시장 혹은 정부 고위직에서 맡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어 후손이라 해도 헌관을 맡을 기회는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여하튼 지금까지는 우리 문중(薛門)에서는 한번도 헌관을 맡은일이 없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본인이 헌관을 맡게 된 것이다. 금년에 본인에게 기회가 온 것은 한번도 우리문중에 헌관기회가 없었다는 것이 고려가 되었을것이고 본인이 현재 성균관 원로회 고문이며 성균관에서 숭조돈목상(崇朝敦睦賞)을 수상한 바 있고 경주,순창설씨 대종회 중앙회장을 역임한 점등을 감안해서 헌관으로 선정되었으리라고 추정해 본다. 본인도 헌관 수임(受任)통보를 받고 기쁜마음도 있었으나 적지않게 설레임과 걱정이 교차 되었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문중의 시제(時祭)나 시향(時享)에서는 헌관을 맡은적이 있으나 전국적인 대제에 헌관을 맡은 것은 처음이라 행여 예법에 어긋난 언행으로 실수나 하지 않을까 다소 불안하기도 하였다. 다시 이런 기회가 쉽게 온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에 나름 대로 임무수행을 잘 해보려고 마음 다짐을 단단히 하였다.
대제의 행사가 9월18일(음 8월23일)오전 9시에 시작 되기 때문에 경주까지는 당일 아침 일찍 갈수가 없으니 전날 가서 준비상황도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하루전 17일에 우리부부는 동생과 함께 승용차편으로 출발해서 중간에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 4시경에 경주에 도착 했다. 보문단지 근처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육부전(六部殿) 행사장에 들르니 역시 행사를 준비하는 집행부서 여러분이 제사준비를 분주히 하고 있었다. 역시 양반 고장답게 도포에 한복으로 정장을 한 분들이 헌관이 왔다면서 반갑게 맞이 해주고 정식으로 예의를 갖추어 배례(拜禮)를 나누었다. 미리 와서 준비하는 분들에게 “수고 하신다.”는 인사도 드리고 얼굴을 익히는 것은 잘 했다 싶었다. 저녁에는 내일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내려온 우리집안 일가들과 같이 저녁 식사를 하면서 신라대제의 중요성과 후손들의 역할에 대해서 담소를 나누었다. 그다지 늦지 않게 숙소로 돌아와 내일의 중요한 행사를 위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18일 행사당일에는 일찍일어나 숙소 주위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였다. 9시가 되기 전에 행사장에 도착하니 벌써 부터 집행부 행사진행요원들이 준비하느라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 제례에 참여할 참배객(參拜客)들도 서서히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진행요원의 안내를 받아 헌관 대기실로 입실하니 그 곳에는 제례에 입을 헌관 제복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제례의 예복(禮服)이 머리에 쓰는 양관(梁冠)에서부터 발끝까지 만만하지가 않아서 전문가의 도움이 없이는 입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여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입는데도 20분 정도는 걸린 것 같다. 전문가의 의견도 제 각각 헷갈려서 몇 번인가를 고쳐 입었다. 그날 행사의 주역은 헌관 인데 본인은 아헌관(亞獻官)이고 초헌관은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내고 현 한국국학진흥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정종섭 원장이 맡았다. 제복을 갖추고 세명의 헌관이 헌관실에 정좌를 하니 당일 행사에 참여한 모든 참배객이 차례로 들어와 헌관들에게 정중한 예를 올리는 절차가 있었다. 제례행사는 10시에 육부장의 후손들과 전국각지에서 온 참배객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초헌례를 시작되어 초헌관이 육부왕 신위전에 각각 헌작(獻爵)을 하고 독축(讀祝)을 하고나서 4배(拜)를 올린후에 초헌례를 마쳤다. 이어서 아헌례가 진행되었는데 아헌관도 초헌관과 동일하게 육부왕 신위전에 헌작후 사배를 하여 아헌례를 마치고나니 종헌관(終獻官)차례로 종헌관도 아헌관과 동일한 순서로 종헌례를 마쳤다. 종헌례를 마치고 초헌관이 음복례(飮福禮)와 축문을 불사르는 망예레(望瘞禮)까지 하고나서 집례관(執禮官)이 예필(禮畢)을 고한후에 모든 제례를 마쳤다. 10시에 시작된 제례가 12시가 거의 다되어 막을 내렸는데 모시는 신위가 여섯분이나 되고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각각 잔을 올리고 따로 독축을 한후 사배를 드리니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은 어쩔수 없었다. 2시간 가까이 서서 행사를 진행하면서 헌관의 임무를 수행하는것도 건강하지 안하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초헌례 다음에 아헌례가 있어서 미리 눈여겨본 덕에 다소 서툴기는 했어도 크게 실수하지 않고 예를 마칠 수 있어서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제례를 마치고 나서 헌관들의 간단한 소감 발표와 참여한 참배객과 각 문중의 후손들과 함께 오찬을 들면서 담소를 하며 모든 행사를 마무리 하였다.
신라대제의 헌관의 임무를 마치고나서 신라 육부장의 후손의 한사람으로서 이번에 헌관을 맡은 데 대해서 새삼 보람과 긍지를 느꼈다. 그리고 대제를 진행하는 것을 지켜 보면서 영남지역이 과연 유학의 전통이 살아있는 양반고장 답게 대제를 진행하는 예법에 한치의 빈틈없이 일 거수 일투족에 깍듯한 예의를 갖추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옥에 티라고나 할까 단 한 가지 현시대에 맞게 개선 할 수 없을까 하고 제언하고 싶은 것은 제례에 여성은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데 조심스럽지만 점진적으로 여성들에게도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으면 하는 뜻을 건의하고 싶다. 또한 앞으로는 일반 참배객 뿐만아니라 우리 문중에서도 신라대제가 지닌 역사적인 소중한 가치를 공감하여 해가 갈수록 타문중에 뒤지지 않게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후손들의 숫자가 늘어 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간절히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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