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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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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을 깨우는 한권의 책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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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7월 29일(목) 10:21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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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순창신문 | |
'책은 도끼다'라는 표현을 우리는 안다. 이 표현은 프란츠 카프카가 남긴 말이다. 그에게 책은 도끼였을까. 우리의 정신에게 도끼의 역할이란 무엇일까. 기존의 관습적인 생각들을 잘라내고 새로운 생각으로, 도약된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어제의 나로서 오늘을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마중물을 퍼올리는 깊은 우물 같은 존재로의 승화,가 아닐까.
미래학자인 알빈 토플러는 말한다.
"21세기의 문맹은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기를 멈춘 사람, 낡은 것들을 과감히 버릴 줄 모르는 사람, 그리고 다시 배우기를 멈춘 사람을 의미한다."
프란츠 카프카는 현대문학에서 위대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문학을 사르트르는 실존주의 문학으로, 알베르 카뮈는 내면을 날카롭게 해부한 부조리문학으로 파악한다. 그의 친구이자 편집자인 막스 브로트는 '도달할 수 없는 신의 존재를 추구하는 정교한 사유의 탐색 과정'을 살았던 작가라고 평가했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카프카의 작품을 모두 찾아서 읽어보았다. 아버지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까지 찾아서 읽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뛰어난 두뇌와 문학적 재능을 지니고 있으나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경험한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키지도 못한 채 자신의 트라우마 안에서 허우적거리다 결국 삶을 포기한 사람'이라는 것. 필자는 왜 그렇게 가혹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을까.
카프카는 내면의 공포를 '스토리텔링'을 통해 우리에게 가감없이 보여준다. 이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나를 대중 앞에서 발가벗기는 작업이 바로 글쓰기라고 본다면 문학의 첫 번째 역할은 치유겠지만 두 번째 역할은 성숙 또는 도약이라고 볼 수 있다. 치유로서의 문학은 나와 나의 환경(이것은 정서적, 심리적, 물리적 환경을 모두 포함한다)을 나의 감성대로 표현해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사건들을 '나'라고 하는 한 주체가 경험하는 구체적인 상황들로 드러냄으로써 타자에게 나를 여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지금 나의 상황이 이렇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과감한 작업인 셈이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나를 드러내는 과정, 이것이 글쓰기 입문이고 상처를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나의 첫 글쓰기는 통과의례를 지나간다. 다음 과정은 심화단계다. 나의 글쓰기는 타자와 공감의 영역을 불러 일으키고 독자와의 교감을 통하여 다른 단계로 진입한다. 치유의 단계를 지나면 성장의 단계를 지나 도약의 단계로 진입해야 한다. 그리고 나면 나의 글을 이루었던 상황과 고통과 트라우마들이 객관화되면서 나는 그 고통의 공간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나와 산의 정상에서 땀을 씻으며 세상을 내려다보는 여유로운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필자의 글쓰기 과정은 그렇다.
카프카의 대부분의 책들은 출구가 없다. 문제는 있지만 문제의식은 없다. 그는 고통을 묘사하지만 고통으로부터 탈출할 방법을 모른다. 혹은 방법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어린시절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사랑이 아닌 폭력적인 그리고 절대적인 권력을 경험했다. 어린 그에게 압도적인 아버지의 권력은 그를 왜소한 존재로 남게 했다. 그는 겉으로 보아 매우 잘 생겼으며 뛰어난 두뇌를 지니고 있었고 건강 상태 또한 양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건강염려증에 시달렸다.
그의 책 <변신>은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많은 독자들에게 읽혀지는 책이다. 평범한 외판원이었던 그레고르 잠자.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커다란 <벌레>가 되어 있었다. 놀라움도 잠시, 그는 몸은 변했어도 말짱한 정신을 지니고 있으므로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한다. 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은 처음에는 그가 벌레로 변한 사실에 놀랐지만 그를 보살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경제적인 원조로부터 멀어진 가족들은 그야말로 그를 '벌레취급'하게 되고 그레고르 잠자는 가족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결심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요구되는 의무감과 단절, 철저한 고독 속에서 그는 가족으로부터 배제된 죽음을 강요당하지만 그것이 스스로의 결정이라고 착각한다.
<변신>을 문학적으로 보면 매우 기발한 발상이고 이것을 현대문명과 결부시켜 보면 '아하! 그래그래, 참으로 뛰어난 문학작품이야', 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삶과 <변신> 이외의 작품들을 모두 통합해서 바라보면 그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극복해내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칭얼칭얼 투정을 부리는데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쏟아부은 것처럼 보인다.
진정한 실존문학이라면 나 자신을 극복하는 지점까지 도달해야 한다. 카프카를 연구했던 데이비스 제인 메어로위츠는 이렇게 말한다. "카프카는 사는 동안 거의 내내 세심하게 고안해 낸 십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이 소멸당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카프카는 때로는 유쾌하게 환기되는 이런 내면의 공포를 <스토리 텔링>-갈가리 찢기고 잘린 자신을 이야기의 중심에 둔-으로 드러내 보였다. 카프카의 작품에는 독자와 공유할 뚜렷한 세계관도, 지배적인 철학도 없었다. 오로지 보통 이상으로 예민한 잠재의식에서 나오는 어지러운 이야기가 있을 뿐이었다."
문학이란 다양한 기능을 담당한다. 읽는 독자들에게도, 쓰는 작가들에게도 그렇다. 문학을 실용적으로 파악하여 읽은 뒤에 좋은 느낌만 남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문학은 독특한 한 개인의 체험이다. 이 체험을 공유하겠다고 한다면 나의 정신적 성숙과 지향direction이 중요하다. 카프카의 <소송>이나 <성>을 읽으면 접근할 수 없는 높은 권위의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넘을 수 없는 벽, 체념을 그의 작품에서 느낀다. 그의 이 정서를 우리가 교감하는 것까지는 나쁘다고 할 것이 없다. 그러나 문학은 일종의 해석이다. 문학적 정체성을 뚜렷하게 확보하지 않고서 글을 쓰게 되면 글을 읽는 독자들도 미망迷妄을 헤매게 된다. 개인적으로 카프카의 삶은 고통스러웠을 수도 있고 혼란스러웠을 수도 있다. 그것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작가가 충분히 성숙한 정신 상태에 도달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것은 필자의 문학적 취향일 수도 있다. 댄디이즘의 보들레르도 미성숙했던 존재로 그의 문학적 천재성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문학은 감각적 경험을 공유하는 독특한 공간이라고 한다면 나는 일개인을 훌쩍 넘어선다. 문학은 서로에게 곁을 두고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신비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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