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황야의 이리 / 헤르만 헤세
|
|
인생을 바꾸는 한 권의 책의 힘
|
|
2021년 06월 16일(수) 15:48 [순창신문] 
|
|
|
| 
| | ⓒ 순창신문 | |
"인간이란 이미 창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의 요구이며, 그 실현을 갈구하면서도 또 겁내는 하나의 먼 가능성이다."
1927년, 헤세가 50세에 썼던 <황야의 이리>가 1960년대 말, 미국 샌프란시스코 대학 서점가에서 문고판으로 출간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출간 한 달 만에 36만부가 팔리는 진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월남전이 한창이던 불안정한 한 시대, 유럽에서는 68학생운동 세대들에게, 그리고 히피들에게는 <성경>처럼 읽혔다는 황야의 이리를 읽는다. 필자가 이 책을 처음 읽었던 때는 중학교 3학년 때. 당시는 시대적, 역사적 상황 인식도 없었고 헤르만 헤세의 어린 시절의 고뇌와 절망조차 알지 못했다. 다만 책속에 들어 있는 이야기만으로 충분했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흘러 몇 년마다 책을 다시 펼칠 때마다 조금씩 다른 색깔로 느껴지는 다양한 빛깔의 울림.
문학적인 흐름에서 <황야의 이리>는 '휴머니즘적 반전 사상, 교양을 지녔다는 속물들에게 정면으로 퍼붓는 비난, 서양 문명 몰락에 대한 묵시록적인 경고, 기존의 위선적인(시민사회라는 이름의) 생활 방식에 대한 저항, 환각(당시 정치와 시대와는 무관하게 텅 빈 정신세계를 지향했던, 아니, 무관하다기보다는 고통으로부터 회피하고자 했던 히피문화)이라는 신비로운 세계의 형상화' 등으로 문명과 전쟁과 기성 질서에 대항하는 젊은 청춘의 의식의 흐름을 반영한 책이다. 헤세가 겨냥했던 문제의식을 당대 청춘들이 온전히 인식하였던가는 중요하지 않다. 또한 수십 년이 흘러 21세기 한 켠, 독서력이 부재하고, 책을 펼치지 않는 지금, 여기에서 <황야의 이리>는 당대 청년들이 피부로 느꼈던 절망에 비해 너무도 멀리 떨어진, 망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도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면서 온몸으로 삶을 앞으로 밀고 나아가야만 한다. 몸뚱이와 정신을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며 주어진 조건이라고 볼 때 <황야의 이리>를 차분히 읽고 있으면 정신세계를 향한 헤세의 치열한 도전정신이 간절하게 읽힌다. 말하자면 인간이란 아무리 큰 틀을 이야기하는 역사적 존재라 하더라도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로 회귀하게 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존재이다. 헤세는 그런 <인간>이라는 존재의 내적 공간을 집요하게 탐험했다.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인간의 신비를 들여다보았다.
헤세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며 <마의 산>으로 유명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토마스 만은 헤세를 이렇게 평가했다.
"정결, 대담, 몽환적, 이지적인 헤세의 작품은 전통, 애정, 기억, 비밀들로 가득하다. 그는 새로운 정신적인 세계를 혁명적인 단계로 고양시킨다. 정신적, 문학적 의미에서 그의 작품은 실로 참되게 미래를 내다보고 느낀다."
헤세는 제1차, 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인류의 정신세계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위기, 절망, 붕괴 등의 단어가 그들의 정신세계를 차지했다. 1900년, 프로이트가 <꿈의 정신분석>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 우리에게 선물한다. 융은 프로이트의 제자로 집단무의식을 발견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화로 신에 대한 절망과 함께 실존주의가 수면으로 떠오르고 실존주의철학자 니체의 르네상스가 도래한다. 헤세의 작품 속에는 프로이트가, 칼 구스타프 융이, 니체가 살아 숨쉬고 있다. 평론가들은 <황야의 이리>는 당대의 염세적 역사관, 비극적 인생관, 허무주의적 문명 비판, 이성보다는 직관을 우위에 두는 태도 등 당시의 정신적 경향들을 고스란히 드러낸 작품이라고 말한다.
이 책을 처음 읽으면 그의 다양한 무의식적 표현과 비현실적인 상황들이 카오스(혼돈)적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차분히 다시 읽기를 하다보면 화자인 <나>의 눈으로 바라본 <황야의 이리> 할리의 정신 세계는 또 다른 <나>다. 서머셋 모옴의 <달과 6펜스>에서 달은 화가의 이상을, 6펜스는 절망적이었던 현실을 대비시킨 비유라면 헤세의 <황야의 이리>는 시민사회에 적응하려는 <인간>과 내면의 복잡다단하면서도 부조리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자유를 구가하는 <이리>를 이분법적으로 분리시킨 비유이기도 하다.
헤세는 말한다. 이러한 단순한 이분법적인 도식은 사실은 불가능하다고. 책속에서도 <황야의 이리론>은 소박한 이원론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의 심리는 무한한 <다원적 존재>임을, <천개의 영혼>을 지니고 있음을 피력한다. '사상과 감정과 문화와 잘 길들여진 승화된 본성의 세계'와 '충동과 야성, 잔인함과 어둠, 승화되지 않는 거친 본능의 세계'가 인간의 내면에는 공존하고 있다. 또한 이 두 존재만이 아닌 수백 수천의 다양한 내면의 <나>가 존재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본능과 정신 같은 두 개의 극단 사이between에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수천의, 무수한 쌍의 극단 사이between에서 <진동>하고 있다'고 헤세는 말한다.
그래서 이러한 내면의 극단적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내면의 본원적인 다원성으로 직진해 들어가거나 아니면 유머의 세계를 배우기를 권면한다. 유머를 통해 웃음을 배워 자아의 분열을 극복하고 비로소 <인간>에 이르기.
<황야의 이리>인간인 할러가 <마술 극장>을 통해 다양한 자아의 분열을 경험하는 모습을 보면 일견 낯설기도 하지만 어쩌면 우리 안의 나,와 대면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다양한 자아의 분열은 칼 구스타프 융의 다양한 원형적 심리 형상들을 드러낸다. 그러나 바로 할러의 자아 경험 장소인 이 <마술 극장>이 바로 <유머 학교>여서 할러의 내면 연상이 고통으로 뒤틀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로운 흐름에 몸을 맡김으로써 자신과 면대면할 수 있는 장소로서 활용하게 하는 과정을 읽고 있으면 헤세의 문학적 천재성을 엿볼 수 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언젠가는 장기말 놀이를 더 잘할 수 있겠지. 언젠가는 웃음을 배우게 되겠지. 파블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차르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절망적인 시대 상황 속에 놓여진, 분리된 자아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결코 자기극복의 과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황야의 이리>를 쓴 궁극적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헤세가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던 니체는 헤세와 필자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다.”*
|
|
|
|
이서영 편집위원 기자 “” - Copyrights ⓒ순창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
|
순창신문
기사목록 | 기사제공 : 순창신문
|
|
|
|
|
|

|
|
|
|
실시간
많이본
뉴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