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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의 기원 / 한나 아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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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바꾸는 한 권의 책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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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4월 15일(목) 11:48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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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순창신문 | |
"한 사람이 아니라 복수의 사람들이 지구에 거주한다." 당연하지만 당연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하는 문장이다. <전체주의의 기원>은 한나 아렌트의 1951년 저작이다. 아렌트는 현실과 화해하려면 현실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의 각축장이었던 20세기라는 격렬한 시대를 관통한 한나 아렌트에게 현실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공간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에 맞서 끊임없이 그 본질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1906년,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유대인이었으므로 순수한 혈통의 독일인으로서 인정받지 못했던 아렌트는 시온주의자들을 위해 활동하다 1933년 프랑스로 망명했고 이어 미국 뉴욕에 정착하기에 이른다. 독일 시민권이 박탈된 1937년부터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1951년까지 그녀는 '무국적자'로 살았다. 생존과 더불어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했을 것이다. 그녀가 정치철학으로 관심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녀의 삶 자체가 이렇듯 떠돌면서 생존해야만 했던 격동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한다. "자유는 인간이 새로 태어나고 태어난 인간 각자가 모두 새로운 시작이며 그러므로 세상이 새롭게 시작한다는 사실과 같은 의미이다. 그러나 전체주의는 인간의 능력 속에 존재하는 자유의 근원을 제거한다."
한나 아렌트는 평생 전체주의라는 문제를 화두로 삼았다.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을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 자체를 말살하고자 했던 전체주의는 한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체주의에 대한 의문은 '정치'와 '자유'를 결합시켜 그녀에게 정치적 자유에 대한 물음으로 확대된다. 그녀는 전체주의가 하나의 기이한 정치적 현상이라고 보았다. 전체주의는 정치적 자유의 근본적인 부정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그녀가 우리에게 질문한다. 그녀가 보았을 때 전체주의는 가장 극단적 형태의 정치 부정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시대도 종식되었지만 전체주의적 요소는 여전히 붕괴되지 않고 우리가 사는 21세기에도 남아 있다.
아렌트의 정치사상은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다. 그런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 만연된 21세기를 사는 지금, 우리가 바로 20세기의 전체주의를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진행되었다. 여당의 실정을 심판하기 위해 차안도 아니고 차차안도 아니지만 반대당인 야당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뉴스는 정보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미묘하게 정보를 조작함으로써 그 정보는 사실로 인식되고 뉴스를 보는 대중들은 그것을 기준으로 작금의 정치적 상황을 가늠한다.
몇 달 전 필자는 한 정당의 여성포럼에서 강연을 진행한 적이 있다. <21세기 현대 여성의 정치 참여>라는 화두로 진행된 강의였다.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는 인문학도인 필자가 비로소 정치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 좋은 계기였다. 우리는 관계를 형성하고 거대한 사회를 형성하며 살아간다. 나 자신 혹은 내 편, 혹은 우리 편의 이익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것이 정치일까. 아렌트는 우리가 정치의 목적과 의미를 차분히 성찰하기를 권유한다. 아니 강조한다. 이 사회 속에서 정치와 자유의 문제는 첨예하게 얽혀 있다. 자유를 구하기 위해서는 정치를, 정치적인 것을 복원하고 성찰해야 한다는 아렌트의 근본 정치사상을 공부해야 한다.
아렌트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하는 '가장 기초적인 반작용으로 축소된 인간 표본'을 제시한다. 그들은 '행위'하는 대신 '반응'할 뿐이다. 서울 시장으로 당선되자 한 방송에서는 새 시장에 대한 13일 간의 기록을 편집하여 방송에 내보냈다. 시장의 아내가 말했다. "그는 정치에 적합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너무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정치를 하겠다고 이전투구의 전장의 선봉에 섰던 사람이 '너무 깨끗하기 때문에 정치에 적합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은밀한 이유는 무엇일까.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에서 저자는 현대의 정치는 '쇼와 스펙터클 보여주기'라고 일갈한다. 이해득실만 따지고, 이익 투쟁의 정글이며, 소통할 동기나 의욕이 사라져버린 시대가 지금, 여기라고 지적한다. 보통 사람들은 차라리 눈 감고 귀를 닫고 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는 정보조작과 통제의 사회. 정치는 공공성을 담보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토론가들이나 언론에서 대중의 마음을 미리 예단하고 그것을 세뇌시키기 위해 독자나 청중들을 '대신'해 생각해주고 결정을 내려주고 그것들을 '증명'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것을 일방적으로 반대하거나 수용한다. 이 '알기 쉬움'에 대한 지향. '자기편'을 결집하여 승리를 쟁취하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는 정치인과 정당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회적, 경제적인 격차를 가능한 한 줄이기 위해 애쓰고 각 개인들의 사회적 생존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공정한 사회시스템을 구축하고 서로의 이익과 손해에도 눈을 돌릴' 수 있는 그런 슬로건들은 바로 폐기되어 버리는 정치판. 좌익인지 우익인지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분법의 횡행.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나 아렌트는 정치를 파괴하는 전체주의적 요소들을 간과하지 말라고, 깨어 있으라고, 정치에 무관심하게 되면 각 개인의 자유 역시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조작되고 통제되는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들여다보고, 그저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행위'하는 사람이 되기를 우리에게 바란다. 현실은 결코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되며 부단히 이해되어야 할 대상이다.
20세기에 한나 아렌트가 겪었던 반유대주의와 제국주의, 전체주의라는 정치적 현상을 통해 인간은 자유를 구속당하고 잉여인간, 즉 개인은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당하였으며 심지어 무용지물로 격하되는 경험까지 겪었다. 개인의 인격과 개성이 희생되고 무한히 많고 다양한 개인들을 마치 하나의 개인인 것처럼 조직하고 조작하는 사회. 모든 개인들의 집단인 사회가 아니라 다원성은 사라지고 단수의 획일성만이 존재하는 사회. 똑같은 의견을 똑같은 목소리와 똑같은 표정으로 말하고 똑같이 행동하는 사회. 그런 사회가 바로 전체주의적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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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영 편집위원 기자 “” - Copyrights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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