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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철학이야기 /이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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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바꾸는 한 권의 책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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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3월 18일(목) 15:07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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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순창신문 | |
"세상은 고통의 연속이다. 인간은 태어나지 않았어야 했다." 이렇게 말한 철학자가 있다. 쇼펜하우어. 그래서 우리는 쇼펜하우어를 긍정이 아닌 부정의 철학자로 오인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의 정신을 깨웠던, 니체의 젊은 날을 새로운 사유의 장으로 이끌었던 쇼펜하우어. 그리하여 문헌학자인 니체를 본격적인 철학자의 길로 안내했던 쇼펜하우어. 실존實存. 삶의 주인이 나 자신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한 니체의 스승인 쇼펜하우어가 그렇다면 진정으로 부정의 철학자가 맞는 걸까.
인간은 몸을 갖고 태어나 한 생을 살아간다. 아기로 태어나 양육을 받으면서 몸이 자라는 만큼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무언가를 배우면서 어른으로 성장한다.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서 나라는 이름의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해 참으로 많은 삶의 비애를 감당해야 한다. 삶은 때로 논리적이지만 대부분 부조리하고 이해불가하다. 군집을 이뤄 살아가는 사회의 한 일원으로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많은 이야기와 투쟁들이 야기된다. 경쟁에서 승리하지 않으면 나의 자리를 마련하기 요원하다. 쇼펜하우어는 우리에게 삶이 고통스러운 이유와 그 본질이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우리는 태어나고자 선택해서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비정상적인 몸으로, 온갖 병치레를 하는 몸으로 태어나고자 결정한 적이 없다. 아니 그런 적이 있다 하더라도 기억조차 없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데 언제 죽음의 순간이 내게 닥칠지 몰라 두렵다. 삶이 있으면 어디에서든 언제든 언젠가 우리는 죽음과 마주칠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 죽음이 아니라고 말한다.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을 알지 못한다는 불안이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고 보았다. 그는 에피쿠로스의 말을 빌려온다. "삶 속에서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죽음이 내게 온다면 더이상 삶이 존재하지 않으니 나는 죽음을 느낄 수 없다. 그런데 왜 죽음에 대하여 걱정한단 말인가?"
말하자면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어야 한다. 삶이 우리를 지속적으로 고통의 상태로 이끌기 때문이다. 우리는 습관처럼 반복되는 일상을 운용한다. 따라서 삶의 본질을 통찰하기가 쉽지 않다. 쇼펜하우어는 31세에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을 썼고 이 책의 내용을 평생동안 고찰하고 확대해 나갔다. 표상이란 무엇인가. 현실로 드러난 체험을 뜻한다. 그러나 현실로 드러난 표상이 진정한 우리의 모습일까? 우리가 경험하는 이 현실들은 무언가 다른 의미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삶은 단 한 번뿐이다. 얼마나 소중한가? 단 한 번뿐인 삶을 삶답게 살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통찰해야 할까?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당대까지 철학은 이성중심주의였다. 이 시대에 쇼펜하우어는 이성을 불신하고 이성을 의심한다. 그런데 바로 이 역설이 삶을 환기시키는 대단한 질문이 된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플라톤, 칸트, 그리고 고대 인도 우파니샤드 철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현실은 가상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이데아의 세계가 진정한 세계라고 설명하는데 여기에서 현실, 즉 경험적 세계를 쇼펜하우어는 '표상'이라는 단어로 변형한다. 현상세계와 물자체의 세계를 제시하는 칸트의 철학이 쇼펜하우어에게 오면 표상세계와 의지세계의 본질을 해석하는데 사용된다. 또한 시공간의 제약으로 인한 세상이 가상적인 세계임을 알려주는 우파니샤드철학은 우리가 겪는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를 설명하고 그것을 넘어설 형이상학적 통찰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렇게 쇼펜하우어는 기존의 철학들을 통합하여 자신만의 새로운 철학세계를 완성, 우리에게 선물한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나의 주관적 관점이 파악한 세계다. 나는 나의 경험을 하고 당신은 당신의 경험을 한다. 똑같은 조건의 상황을 경험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각자의 주관적 관점이 이 세계를 다르게 경험하게 한다. 인식적 차원에서 우리는 주관적으로 세계를 해석한다. 그렇다면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쇼펜하우어는 세계는 '의지'의 드러남이라고 설명한다. 표상세계는 나의 주관적인 관점이 드러난 세계다. 말하자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앞에 놓인 세계다. 표상세계는 공간, 시간, 인과율에 사로잡혀 운용된다. 이것을 쇼펜하우어는 충분근거율이라고 부른다. 이 표상세계는 전통철학이 이성이라고 표현한 '지성'에 의해 파악된 세계다. 표상세계에 근거한 삶의 방식은 우리가 날마다 겪는 삶의 모순과 갈등의 근원을 바라볼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세상이 아닌 다른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 내게 주어진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통찰의 방식이 필요하다. 그 세계가 쇼펜하우어에게는 이념으로서의 세계인데 이 세계는 플라톤의 이데아적 세계가 아니다. 그의 이념세계는 세계를 피상적으로,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충분근거율, 즉 공간, 시간, 인과율에 의해 세계를 파악하는 태도를 '제거'하는, 이전 철학의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방식이다. 인간은 일상생활에서 일정 시간, 공간, 인과율에 얽혀 살아가므로 이러한 상황인식에 적극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삶에의 의지를 갖고 있다. 이것은 맹목적이다. 맹목적인 의지는 온통 주관적인 자신의 삶에 집중하므로 다른 어떤 존재보다 우위에 서야 한다는 투쟁정신으로 가득하다. 맹목적인 삶의 의지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면 세상은 고통과 투쟁으로 가득한 삶에 도달한다. 이런 쇼펜하우어의 세계관이 염세주의로 읽혀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귀한 것은 바로 다음 단계를 그가 호명하기 때문이다. 그는 삶을 '고통 자체'라고 보았다. 말하자면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이러한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가 고통과 투쟁을 만들어내서 서로를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고 촉구한다. 내가 고통스럽다면 타자 또한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는 이것을 '동고同苦"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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