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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개념정원 / 서영채

인생을 바꾸는 한 권의 책의 힘

2020년 12월 02일(수) 16:26 [순창신문]

 

ⓒ 순창신문



눈발이 바람을 타고 내려온다. 얼굴 위로 내려앉는다. 톡톡. 부드럽지 않고 알멩이가 굵다. 바람이 차다. 겨울은 겨울다워야지. 그래 그래.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 잠깐 고개를 들이밀고 김장 담그는 모습을 풍경 바라보듯 감상하였다. 아름다웠다. 지구별에 도착한 지 70년도 넘고 80년도 넘은 영혼들이 전사戰士처럼 김장을 담그는 모습은 감동이었다. 그들의 손끝에 묻어 있는 오랜 세월들이 순간순간 언뜻언뜻 빛을 발했다. 생물학적으로 점점 퇴행해가는 육신 속에는 그러나 차곡차곡 쌓여진 시간이라는 경험치들이 그들을 달인으로 불리게 만든다. 농사 짓는 영혼들의 몸은 따뜻하다. 늘 땅과 붙어 있으니. 땅에 붙어 앉아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열매를 거두었다. 얼굴은 햇살에 까맣게 그을리고 손가락은 두툼해지고 등은 굽고 허리는 휘고 발은 부었어도 그들이 수확한 열매들은 온갖 곳에서 삶이라는 이름으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자식들에게 따뜻한 온기가 되어 배달되었을 것이다. 도시에서 살아온 우아한 모습보다 한평생 땅을 동무 삼아 두툼해지고 옹이가 박힌 저 손이 성스럽다. 성스러운 손을 만져보다가 필자의 손을 살핀다. 필자의 손은 땅농사를 짓는 손이 아니라 글농사를 짓는 손이다.

인간의 손이 얼마나 다양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지 생각하면 눈물겹다. 밥 먹는 손, 글 쓰는 손, 노동하는 손, 붓을 잡는 손, 칼을 잡는 손, 그릇을 잡는 손, 설겆이 하는 손, 화가 나서 부르르 떠는 손, 덜컥 감동에 복받쳐 누군가의 손을 잡는 손, 뿌리치는 손, 책장을 넘기는 손, 손, 손, 손들. 손은 인간이 도구를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호모 파베르Homo Faber. 지구상의 온갖 동물 중에서도 언어를 도구 삼는 인간이란 종種은 참으로 놀랍다. 서영채의 <인문학 개념 정원>은 인간의 언어에 대한 탐구로 시작한다. 그는 언어가 우리의 삶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하여 말한다. 아니, 언어의 중요성을 넘어, 언어가 어째서 어떻게 우리에게 중요한지에 대하여 말하고 싶어 한다.

필자가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7년 전인 것 같다. 그는 혼란스럽던 20대의 끝에서 자신의 삶이 조금씩 정리되면서 점점 분명하게 다가오는, '밝게 타오르는 하얀 빛의 이미지'를 보았다. 그것은 바로 무한하고 위험하게 느껴지지만 그를 설레게 하고 두근거리게 하고 환하게 만드는 <앎의 세계>였다. 그는 지식의 세계를 탐사하면서 눈이 환해지는 순간을 맞이하곤 했고 삶의 커다란 기쁨을 느끼면서 이 기쁨이 다른 이에게도 전달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서 자신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인문을 공부하면서 많은 학자들을 만난다. 이들은 자신만의 언어와 자신만의 정의를 내세우며 우리를 안내한다. 하지만 그들을 따라가다가 자꾸 길을 잃어버리고 혼자 서 있다. 책 한 권 속에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일상의 생활과는 완연히 다른,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낯선 규칙을 자꾸만 제시하면서 따라오라 손짓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돌아보지도 않고 시야에서 사라져버린다. 서영채 또한 자주 길을 잃었다. 필자도 책속에서 늘 길을 잃는다. 그는 자신이 인문 공부를 해나가면서 벽에 부딪치곤 했던 개념들을 정리해 우리에게 친절하게 알려준다. 필자는 이 책을 곁에 두고 읽으면서 간혹 선물로 나누곤 했는데 그 중 한 영혼은 이 책을 통해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는 다리를 만났다는 소회를 전해주었다. 앎의 기쁨. 환하게 세상이 밝아지는 기쁨을 나누는 도반道伴.

소쉬르가 일반 언어학에 대한 강의를 시작한 것은 1906년. 그의 언어에 대한 탐구를 시작으로 영미권은 언어에 대한 성찰로 20세기의 거대한 지성사를 채운다. 러셀, 비트겐슈타인, 푸코, 데리다, 가다머, 하버마스, 프로이트, 라캉, 그리고 지젝 등. 20세기 중엽, 1967년 로티가 편집한 책 <언어학적 전회轉回>에서는 영미권의 철학적 관심이 언어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소쉬르의 언어에 대한 통찰을 이어받은 야콥슨은 우리가 쓰는 말은 <선택>과 <결합>이라는 두 축으로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우리 안에 저장되어 있던 어휘 사전에서 단어를 끄집어내는 <선택> 기능과 선택된 단어를 배열하는 <결합> 기능에 의하여 말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을 할 줄 안다는 뜻은 그의 의견에 따르면 머릿속에서 단어를 고르고(선택), 조리에 맞게 그 단어들을 늘어놓는(결합) 무의식적 과정인 셈이다. 이런 과정에 장애가 생기는 경우를 <실어증>이라고 하는데 이 실어증은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단어를 나열할 수는 있어도 정확한 단어를 짚어내지 못하는 경우, 다른 하나는 단어를 짚어내되 문맥과 어순에 맞게 배열하지 못하는 경우. 전자는 <선택> 기능에 이상이 있고 후자는 <결합> 기능에 이상이 있다.

야콥슨은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6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대화가 이어질 구체적인 상황, 메시지, 접촉, 그리고 서로가 동일한 언어적 코드를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 대화는 다시 6가지 기능이 있다. 표현적, 사역적, 지시적, 시적, 친교적, 메타언어적 기능. 말하자면 똑같은 말을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우리가 날마다 주고받는 언어들은 그저 이루어지는 단층적 과정이 아니라 복잡하고 중층적인 구조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단순한 의사소통의 언어에서 출발하여 심리학으로, 철학으로, 사회학으로, 정치학으로 다양하게 뿌리를 뻗어나간다. 이 언어를 통하여 우리는 관계를 형성하고 사유를 확장해 나간다. 이 책은 기표와 기의,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욕구, 요구, 욕망 등 온갖 개념이 정리된 정원이다. 그의 개념 정리는 이제 막 인문의 길을 떠나는 영혼들에게는 사막의 길 한가운데서 만나는 오아시스 같은 돌연突然한 기쁨을 준다. 공부의 재미.*

ⓒ 순창신문

이서영 편집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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