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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읽기 / 박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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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바꾸는 한 권의 책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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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6일(목) 15:40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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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한 송이가 피었다. 가을이 다 갔는데. 이제 소설小雪이 지나 눈이 오겠는데 말이다. 우체국 화단에는 늘 장미가 피어났다. 여름에서 가을을 지나 초겨울에 이른 지금, 오랜 시간을 건너온 장미 한 송이. 장미는 지금 필자의 눈 앞에 '존재'하고 있다. 존재란 '있다'는 의미이다. 거기에 있음. 그리고 이렇게 존재하는 대상을 하이데거는 '존재자'라고 부른다. 장미도 존재자이고 인간도 존재자이다. 책상도 존재자이고 토끼도 존재자이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평생에 걸친 철학적 물음을 '존재물음'이라고 불렀다. 하이데거가 만든 새로운 언어들은 100여 가지가 넘는다.
하이데거는 물음 혹은 질문을 '경건한 사유'라고 불렀으며 자신의 형이상학은 기존의 형이상학과 구별지어 '사유'라고 불러달라고 말했다. 철학적 물음이 '존재 물음'이고 묻는다는 것이 '경건한 사유'이므로 그의 <존재물음>이란 '존재에 대한 경건한 사유'를 뜻한다. 이는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말한다. 존재는 개인도 집단도 인류도 포괄하지만 그 너머 모든 세계와 사물을 <인간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관점>에서 경험해야만 진정으로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고 할 수 있다. 하여 필자는 필자의 관점으로 보는 <장미>가 아니라 <존재>하고 '있'는 <장미> 그 자체와 눈 맞추려 한다.
필자와 장미와의 만남은 존재 대 존재,가 만나는 놀라운 경험이어야 한다. 인간의 <관점>에서 모든 존재자를 대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 이외의 모든 존재들은 인간의 목적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좁게는 한 개인의 주관적 이해관심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고 경험하고 평가하며 이 시선을 넓혀 인류 전체의 <관점>으로 확대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인간 중심의 관점으로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렇게 되면 결국 인류 이외의 존재자들을 소외시키는 셈이 된다. 따라서 존재의 관점에 서지 않고 인류의 관점에서 자연은, 즉 세계는 정복당하고 지배당하는 역사 속으로 편입된다.
하이데거는 모든 존재자의 고유한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의 존재를 마음껏 실현하도록 함으로써 최대의 포괄적인 지평으로서의 존재를 실현시키고자 했다. 인간의 관점이 아닌 존재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그는 이것을 <초월에의 관심>이라 부른다. 이를 통해 인간은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자를 소외시키고 지배하는 구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 현대는 자신이 관계하고 의존하는 존재자들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작>하고 <관리>하면서 자신의 안전과 번영을 확보하려고 하는, 지극히 인간 중심의 이기적인 사회이다. 따라서 의도적인 관심, 초월에의 관심, 사유를 회복하는 철학적인 사고로 돌아가야 한다. 하이데거가 볼 때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에, 개별자가 아니라 전체를 조망하는 철학적 사유를 통과해야만 존재 자체의 진리를 경험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자유로운 열린 터>라고 부른다. 우리가 장미를 단지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장미라는 존재, 그 자체로 경험하려면 인간이라는 자신의 좁은 지평을 벗어나 모든 존재자가 자신의 진리를 드러낸다는 '포괄적인 장場' 속으로 진입해야 한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자들을 향한 보편적인 장은 모든 개체의 고유성이 저 스스로, 있는 그대로 드러나도록 하는 장이다. 그런 장에서만 인간도 자신의 독자성과 고귀함을 경험하며 모든 존재자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게 된다.
철학이란 낯설게 생각하기를 통해 새로운 <관점>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하이데거의 언어를 빌려 <존재> <존재자> <존재물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처음에는 다소 어렵고 낯설지만 그 낯섦을 통해 늘 바라보던 세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힘>을 갖게 된다. 우리가 늘 바라보고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세계가 사실은 날마다 새롭게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기.
<하이데거 읽기>의 저자 박찬국은 우리가 자신의 주체적인 의지에 따라 사고하고 느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세상이 우리에게 가르친 대로, 말하자면 습관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삶을 살아간다고 지적한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세상이 우리에게 가르쳐 온 가치가 '나'의 고유한 <가치>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비본래적인 실존>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세상 사람>이라고 부른다. 세상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면 세상이 기존에 만들어 놓은 기준에 따라 살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늘 비교하고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느끼면서 진정한 자기를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 그러다 갑자기 우울해지고 삶이 허망하게 느껴진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기분을 <불안>이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바로 이 불안을 느낄 때가 우리가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절묘한 순간이다. 허망하고 우울해진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당연하고 친숙한 어떤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고 수수께끼 같은 것으로서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할 테니. 우리가 비로소 우리의 <존재>를 환기시키는 때. 하이데거의 사유가 독특한 것은 바로 이 <기분>을 철학적으로 해석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늘 어떤 기분 속에서 존재한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무덤덤할 때 조차도 그것은 어떤 기분의 일종이다. 하이데거는 기분이란 바로 우리 인간의 <근원적 존재 양식>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이 기분의 오르내림. 말하자면 <불안>은 <단독적인 자기>로서의 나를 환기시킨다. 그리하여 나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이 질문들을 통해 세상의 가치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세상사람>으로 살아가지 않고 본래적인 <나>를 인식할 수 있다면 <불안>이라는 기분은 기쁨을 수반하는 <경이>라는 기분으로 전환되고 이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장미 한 송이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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