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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설공찬전>의 작가, 채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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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에는 [설공찬전]이 있습니다 / 기획기사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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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28일(수) 16:34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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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순창신문 | |
<설공찬전>의 작가, 채수는 누구일까? 궁금한 생각이 들어 필자는 <다시 쓰는 설공찬전>을 쓰던 도중에 채수가 <설공찬전>을 집필한 경상도 상주를 찾아나선 적이 있다. 상주의 <쾌재정>에서 채수는 62세의 나이로 <설공찬전>을 썼다. 5시간쯤 운전해서 도착한 <쾌재정> 근처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우체국이 눈에 띄어 무작정 들어갔다. 우연이라 하기에는 신기하게도 우체국장님은 채수와 <설공찬전>에 관해 자세히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채씨 일가에서 만든 <난재 채수 선생의 삶과 문학>이라는 책 한 권을 필자에게 내미는 것이었다.
책은 <난재 채수 선생 기념사업회>와 <인천 채씨 양정공종회>에서 간행한 것으로 이복규교수님을 비롯 김철수, 우인수, 박대복, 박찬선, 곽희상 등 여러 국문학자들의 연구가 실려 있었다. 한문소설 <설공찬전>과는 달리 국문번역소설의 제목은 <설공찬이>인데 <설공찬이>의 원문과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채수와 <설공찬전>에 관한 기록, <설공찬전>의 현대역본까지 실려 있는, 공을 많이 들인 책이었다. 우체국장님의 안내로 찾아간 <쾌재정>은 단정했다. 옛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사방이 시원하게 트여 있었다. 그가 살던 시대에도 이런 조망이 가능했을까.
난재 채수는 본관이 인천이다. 1449년 8월 8일 한양 명례방에서 태어났다. 상주 함창 출신의 담양부사 권이순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3남 4녀를 두었다.
큰딸은 김감에게 시집을 갔는데 김감은 후에 장인인 채수가 중종반정에 참여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운 처지에 처했을 때 채수에게 술을 마셔 취하게 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게 한 사람이기도 하다.
채수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문장 실력을 보였고 11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학문에 임하였다. 김종직은 "장차 문명을 크게 세상에 날릴 것"이라며 채수를 보고 탄복하였다고 한다. 글 읽기를 좋아해 책을 통째로 외워버리기도 하고 아파서 끙끙 앓을 때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스무 살이 되던 예종 1년(1469년)에 초시, 복시, 전시라는 세 개의 문과시험에 동시에 장원을 한 탁월한 인재였다. 이후 40여 년에 걸쳐 사헌부, 예문관, 홍문관, 이조정랑, 호조참판, 이조참판, 대사헌 등의 다양한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런 그가 말년인 62세, 중종 6년에 중종반정을 빚댄 <설공찬전>을 지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을 할 줄 알았던 강직한 성격을 지녔던 듯하다. 저서로는 <난재집> <촌중비어> <설공찬전> 등이 있다.
예종을 거쳐 성종을 모시게 된 채수, 스물한 살의 어린 나이였다. 성종은 젊고 유능한 문신들을 모아 학문에 집중하도록 배려하였고 하루 3번씩 경연을 통해 꼬박꼬박 경서를 강의하고 신하들과 정사를 논했는데 채수 또한 성종을 오랜 시간 가까이 모시면서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성종 6년(1475년)에는 일본국 통신사로 낙점되기도 하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장악원의 관리까지 겸했다.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종사관으로도 활약했다. 명나라의 사신을 응대할 문신은 당대 최고의 문사였어야 했는데 채수는 바로 그 종사관으로 임명되어 접대의 책임을 감당하기도 했다.
성종은 명석하고 정직한 채수를 총애하여 손수 금대를 허리에 채워줄 정도였다고 한다. 성종은 채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경은 일찍이 승지가 되어서 오래 전부터 나의 뜻을 잘 알 것이다. 무릇 사람은 너무 무거워도 너무 가벼워도 옳지 않다. 강과 유를 겸해 갖춰 중용을 얻어야 한다. 또 대사헌 직위에는 마땅히 강개한 자를 취해야 한다. 그래서 경을 임명한 것이다. 사헌부의 수장은 모름지기 강개한 사람을 등용해야 하므로 특별히 경에게 명하노라. 너무 강하게도 너무 유하게도 하지 말고 중심을 잡도록 하라."
채수를 총애하던 성종을 지나 연산군 때에 이르러 채수는 유배 생활을 하기도 한다. 연산군의 폭정으로 1506년(57세), 중종이 반정을 통해 왕이 되었을 때 채수는 반정을 공개적으로 비난할 수 없었다. 반정의 주도 인물들은 채수가 반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했으나 채수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채수의 목숨은 일촉즉발의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사위 김감에 의하여 위기를 모면하고 인천군으로 봉해지기까지 한다. 채수는 이를 부끄럽게 여겼고 벼슬을 버리고 상주에 도착하여 <쾌재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이곳에 은거하면서 <설공찬전>을 쓰게 된다. <설공찬전>은 한문으로 쓰여졌으나 동시에 국문으로도 번역되어 전국적으로 읽혔고 결국 조정에서 모두 모아 불태워지기에 이른다. 분서가 될 만큼 <설공찬전>은 전국을 흔들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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