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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품이 강직한 고려공신 설공검(薛公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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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6월 20일(수) 10:11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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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본관은 순창(淳昌)이요 호는 경재(敬齋)이다. 1224년(고려 고종 11년) 추밀원부사 신(愼)과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도덕을 숭상하며 진리를 깨닫는데 힘을 썼다.
모든 일에는 의(義)와 이(利)를 밝혀 사리에 맞도록 처리하고 효제충신이 아니면 행사지 아니하였다. 고종조에 과거에 급제하고 교동감무(喬棟監務)와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를 지냈다.
그 아우 인검(仁儉)과 같이 태학의 중수를 건의하기도 하였다.
1271년(원종 12)에 세자 심이 원나라에 인질로 갈 때 상서 송분 등과 함께 세자를 배종하였는데 이듬해 이 세자에게 일본을 징벌한다고 거짓으로 핑계대고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는데 공검은 이는 간사한 꾀인바 군자의 취할바가 아니니 정당하게 돌아가는 날을 기다리자고 하였다.
1274년(원종 15) 6월에 원종이 세상을 뜨자 세자인 심이 곧 왕위에 오르니, 공검이 우승선에 영전하고 다시 고려 충렬왕 4년에 밀직부사에 제수되었다.
이때 권문세가들이 정치를 좌우하여 국정이 어지러워 공검은 김주성과 협의 필도지라는 관청을 신설하여 중요한 정사를 척결하는 한편 어질고 정치에 재능이 있는 사람을 등용하니 정치가 바로 잡혔다.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첨의부 중찬이 되었으며 인년으로 퇴직을 원하자 의정부 찬성사에 제수되었다.
1302년(충렬왕 28) 2월에 향년 79세로 타계하였고, 시호를 문량이라 하고 충렬왕 묘정에 배향하였다.
공검은 평생을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검소하기가 평민과 다를 바 없었고, 침실에는 초석이 깔려 있을 뿐이고 침구하나 깔려있지 아니하였다하니 검소한 생활의 전모를 볼 수 있었다.
*참고문헌 : 순순창향지, 순창의 얼, 향토교본 3집-자랑스런 순창의 인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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