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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 잔존한 들 소리(農謠)의 맥은 이어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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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 소리(農謠) 역사(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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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8월 11일(목) 11:48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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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힘에 의존하여 생산 활동이 이루어졌던 농경사회에서 민초들의 공통적인 정서를 충족시키고 모든 계층에 개방되어 민주적이고 민족적인 전통문화들이 1960년대부터 농업생산의 기계화와 과학문명(TV의 등장)의 발달 사회로 접어들면서 생활 현장에서 사라져 갔던 민요(民謠).
민요의 정확한 역사는 추정할 수 없으나, 유구한 세월동안 우리 민족 역사와 함께하며 구전민요가 우리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사라지고 있다.
이에 본보는 지역(향토 · 鄕土)의 역사와 맥락을 같이하고 민초들의 애환과 삶의 양식이 담겨 있는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인 ‘들 소리(農謠) 혹은 민요의 맥은 이어질 것인가?’ 주제로 우리나라 민요(들소리)의 유래를 살펴보고, 지역별(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전라도) 농요와 토속민요 소개와 함께, 보존 실태 등을 지면을 통해 점검해 본다.
또한, 지역별 농요와 토속 민요 소개와 함께 이를 보존하고 계승하는데 이바지 하고 있는 산증인들의 생생한 목소리도 지면을 통해 소개 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전통문화의 보전과 계승 방안 등도 모색해보자 한다. - 편집자 주(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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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순창신문 | | 농사를 지으면서 부르는 민요를 들 소리 또는 농업노동요라 한다. 이러한 들 소리 또는 농업 노동요는 물 품는 소리, 모 찔 때 부르는 노래, 모심기 노래, 논매기 노래, 보리타작 노래 등 지역적 특성과 함께 불려지는 노래 또한 다양한 모습으로 계승되고 있다.
민요는 여러 사람이 함께 부르는 노동요와 밭매기처럼 혼자서 부르는 노동요로 구별된다.
여러 사람이 함께 부르는 노동요는 교환창과 선 · 후창으로 가창(歌唱)하는데 작업에 리듬을 맞춰 여러 사람의 힘을 뭉쳐 일의 능률을 올리면서 노동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특징이 있으며, 혼자서 부르는 노동요는 음영식으로 부르는데 신세를 한탄하는 조로 읊는 것이다.
고대의 민요(民謠)
우리 민족은 단군을 국조(國祖)로 삼고 역사의 기록은 이 때를 비롯하였으나 민요는 단군이전에 존재하였을 것으로 본다.
즉, 민요는 정치도 문학도 없는 그러한 시대에도 인간의 생활과 질서와 일 상 경험하는 일을 통해 이미 노래를 부르는 것이 가능했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고문전에 의하면 우리 상대의 민족들은 노래를 즐겨했다는 기록이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를 통해 그들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으며, 이 때 불렸던 노래라는 것은 민요였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고구려의 민요(民謠)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고구려인의 생활이 가무(歌舞)를 즐겨 밤이면 남녀가 노래와 춤을 즐겼다고 한다. 현전하는 문헌을 통해 볼 때 고구려시대의 시가(詩歌)로서 가사가 전하는 것은 황조가(黃鳥歌) 뿐이다.
황조가는 유리왕 3년 동십월에 왕은 압천의 여 화희와 한인의 여 치희를 얻었다. 두 여인은 서로 사랑을 다투어 왕이 외출하여 칠일을 돌아오지 않으면 화희가 치희를 내쫓았다. 왕이 돌아와 이 말을 듣고 치희를 찾아 갔으나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실망하고 돌아오다 나무 밑에서 쉬는 황조(黃鳥)가 서로 나는 것을 보고 감탄해서 황조가를 지었다.
황조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꾀꼬리 오락가락 쌍쌍이 즐기는데 / 외로은 이내몸은 뉘와 같이 돌아가리.
시가요(始歌謠)가 집단적이며 신앙적인 형성이 대부분인데 반하여 황조가는 남녀애정을 주제로 한 서정시가이며 원앙새처럼 서로 의지해서 쌍쌍이 나는 꾀꼬리에 비해서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고 꾀꼬리의 자웅상의하는 광경을 통해서 수심진 슬픔에 남몰래 눈물 흘렸으리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일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민중들이 노래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백제의 민요(民謠)
백제의 가요로는 악학궤법의 정읍사를 비롯하여 지리산가, 무등산가, 선운산가 있으나, 가사가 전하는 것은 정읍사(井邑詞) 뿐이다. 또한 백제의 민요로서 흥미 있는 것은 완산요(完山謠)와 산유화가 있다.
완산요는 후백제의 건국자 견훤의 자 신검이 세자 금강을 살하고 전주에 도읍하여 전주의 고명(古名)이 완산이므로 골육내분의 권력 다툼과 가엾은 세자 금강의 비참한 죽음을 노래한 것이다. 그리고 현재도 부여 지방에는 세전된 백제 유가 산유화가가 있으며 이앙시(移秧時)나 수확시에는 부여 직녀(織女)들이 부른다고 하며 다음과 같은 시가가 있다. 산유화 헤- 산유화야 / 저꽃 피어 헤- 농사일 시작하야 / 저꽃 지더락- 필역하게 / 얼널널 상사뒤- 어여뒤여 상사뒤.
산유화 노래는 백제 멸망후 거의 망실되고 새로 전파된 영남 지방에는 오늘날 까지 전해진 셈이며 산유화가 영남지방에서‘미나리’로 불러지는데는 산유화(山有花)-산유화(山遊花)-뫼놀꽃-뫼노리-미나리로 그 변화과정을 생각할 수 있다.
영남 지방에 현존하는‘미나리’가 농업 경작 시 주로 불려지는 것으로서 미루어 볼 때 백제의 산유화가 농요의 일종이었음을 짐직 할 수 있다.
신라의 민요(民謠)
신라의 민요는 서동요(薯童謠)를 비롯하여 풍요, 처용가(處容歌) 등 민요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문헌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없다.
신라의 동요인 영신가(迎神歌)나 백결선생의 대악(碓樂)은 현전하는 영남지방의 민요에서도 그 공통점을 흔히 찾을 수 있다.
삼국시대 민요의 특징
고구려의 황조가는 유리왕이 애인을 잃은 슬픔에서 부른 노래요 헌화가는 노인이 절벽의 진달래 꽃을 꺽어 미인에게 바친 노래며, 처용가는 아내를 빼앗기고 남자가 부른 노래요, 정읍사, 선운산가는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노래다. 이처럼 부부나 남녀간의 애정문제가 일찍이 시가(詩歌)에 나타난 것은 그만큼 시가에 대한 문학적 영역을 발휘한 셈이며 이러한 노래가 모두 민요였다는데 의의가 있다. 이는 창작문학이 언급하지 못한 인간의 진정한 모습을 민요에 대담하고 솔직하게 표현했던 것이다.
민요가 작업과 밀접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나 삼국시대의 민요에도 이미 노동요가 있었다.
풍요(風謠)는 사찰을 세우고자 흙을 운반할 때 남녀신도들이 작업하면서 부른 노래요 백결선생이 지었다는 대악(碓樂)은 방아타령의 시초라 하나 역시 작업요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참적선조(讖的先兆)를 보인 노래로 서동요, 계림요, 완산요가 있었으니 사건 발생을 미리 예언한 셈이며 동요(董謠)를 천성으로 여기고 믿었던 고대인의 우주관에서 나온 노래니 참요(讖謠)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삼국시대의 민요는 현대민요와 달리 삼위일체성이 있었으며 주술성(呪術性)이 있는가 하면 참적성격(讖的性格)마져 구비하고 있었으니 원시민요의 특징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는데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민요(民謠)
고려의 민요가 속가(俗歌)의 이름으로 남아 있기는 하나 삼대목과 같은 민요집은 아직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게 없으며, 충렬왕 이후에는 원과의 화친으로 외환(外患)의 걱정이 없었으므로 경향의 무녀와 관비 중에서 가무가 능한 자를 궁중에 불러들여 대(隊)를 만들어 가무(歌舞)케 하였다. 충렬왕이 이와 같은 행위는 궁중 아악에서 아악을 쫓아 내고 고유의 속악(俗樂)을 마련케 하였으며 민요계를 자극케 했다. 당시에 불려졌던 삼장(三藏), 사룡(蛇龍)은 쌍화점(雙花店)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남녀상열(男女相悅)의 내용에 민요적 동기와 상(想)을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의 민요(民謠)
조선 초기의 민요는 고려시대의 연장으로 고려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특히 한글 창제는 민중문학의 진출을 용이하게 하였으며 민요의 정착도 가능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구전(口傳)에서 지나친 유동성을 방지하고 불변성을 가능케 했다.
따라서 현존하는 민요의 대부분이 조선시대부터 전해오는 것이니 그 증거로서 춘향전이나 흥부전 속에 담겨진 민요들이 현전하는 민요와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는데서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전승과정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사회제도 역시 변동이 없었음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고대 소설에서 수록된 민요가 1912년 조선총독부 조사의 문헌에 나타나 있고 또 현재도 구전되고 있다.
이는 생산 양식이나 사고방식의 불변에 기인하며 조선시대의 민요는 유교사상의 영향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조선이 척불숭유정책을 세워 유교를 보호 장려한 힘도 있었으나 유교의 교리가 일반 민중의 머리 속에 파고 들어가 삼종지법(三從之法), 칠거지법(七去之法), 삼강오륜(三綱五倫)이 강조되고 그것이 부합되는 생활태도가 요망되었으니 민요에도 그러한 영향을 주었다 할 수 있다. 농부들의 입에서 나온 노래임에도 고된 작업중에 농사지어 부모봉양을 잊지 않았으며 농부는 무슨 뜻인지도 알지도 못하면서 고대 중국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노래 불렀으니 이처럼 선량한 생각은 조선이 내세운 유교정책의 승리에서 나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민요는 크게 보면 민족의 노래요, 작게 보면 그 지역을 대표하는 향토의 노래이다. 어느 민족, 어느 국민이건 제각기 민요를 가지고 있으며 지역(향토)에 제각기 민요를 가지고 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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