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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최고야 - 팔덕면 청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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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문화원장 김 기 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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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6월 23일(목) 10:57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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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순창신문 | | 팔덕 청계 마을 북쪽은 무이산(武夷山)이 있고 서쪽으로는 강천산, 광덕산, 동쪽으로는 멀리 원통산, 남쪽으로는 용심산이 위치한 마을이다.
지금부터 1400(正宗) 2년경에 “현통물”이라는 마을이 위치하여 마씨·서씨·탁씨가 주성으로 8동자를 낳아서 중국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는 전설로 팔등(八等)이라 했고 당시 대부호가 있어 노적에서 상서로운 백로가 3배씩 새끼를 낳았다는 전설도 있다.
현 마을 청계리(淸溪里)는 상죽, 하죽으로 지금부터 500여 년 전 남원 양씨가 처음 통물에서 이거 하였고 그 후 밀양 박씨, 경주 김씨가 집단 대촌을 이루었다.
이때 심은 당산나무가 마을 입구 중앙 서편에 있는데 매년 정월 5일에 당산제를 지냈었다.
마을 동편은 “선등”이라 부르며 옛날 무이산 아래 마을 동북쪽에 무이서원이 있었다고 하여 이곳을 현재 “무름”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곳은 지리적 여건이 서해안의 생필품인 소금과 해산물을 짊어지고 나르는 시대라 경상도, 남원, 구레, 곡성의 행인이 이곳에서 유숙하였다.
모두가 이곳을 통행 하였기에 더욱 번창 했고 해방 당시만 해도 유명한 지역이었다.
해방직후 호남의 난장이 서 15일 동안이나 씨름, 노름판 등 각종 놀이를 이곳에서 할 만큼 유명한 지역이었고 왜정시대까지 양조장이 있었다.
강천사 입구 쌍거리 옥호(점말)의 풍경이 아름다워 행인들이 모여들었고, 한량배, 풍류객, 돈냥께나 있는 행인들의 유숙 놀이터로 크게 번창했으며 물이 특수하여 고급 한지를 만들고 단군의 신위를 모시는 단성전이 이곳에 있었다.
위와 같이 역사가 있는 청계리를 “대사말”이라고도 하는 곳은 마을이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고 마을 중앙도로에는 맑은 물이 흘러 빨래터로도 각광을 받았지만 이젠 복개 공사로 큰 중앙 도로가 되어 버렸다.
깨끗한 마을 공기가 좋아 살기 좋은 마을, 인심도 좋아 상호 우애 있게 살아가는 마을을 위해 헌신 봉사하고 있는 조태일(53) 이장, 송길석 지도자, 김영신, 김춘화 부녀회장이 마을을 위해 모두가 한 마음으로 동심 일체가 되어 봉사하니 큰 마을에는 항상 단합이 잘 되고 살기 좋은 고장으로 탈바꿈되고 있습니다.
마을호수 80호에 주민 156명이 거주하며 살아가는 청계리는 요즘 농촌치고는 큰 마을이다.
이렇게 큰 마을을 책임지고 있는 조태일 이장의 업무가 만만치 않다.
청계마을의 농가 소득원은 논농사와 밭농사 그리고 특용작물로 복분자, 한우사육, 하우스 등 복합 영농이 소득을 올리고 있다.
청계리도 노인인구가 대다수여서 농사철이면 걱정이 앞서지만 조태일 이장과 성길석 지도자의 수고와 노력으로 모든 것이 해결이 된다.
이렇게 생산되는 농산물은 청정 지역인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아 그 가격도 월등하다.
청계리도 마을 공동체인 회관과 할아버지, 할머니 노인당으로 구분이 되어 있어 그 운영에는 조태일 이장과 부녀회장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봉사가 있어 언제나 즐겁고 화기애애하다.
청계리는 마을이 크다보니 객지에 나간 출향인 또한 그 수효가 대단하다.
많은 출향인들의 고향 사랑에는 어느 마을보다 더 월등하며 명절 때면 경로당과 회관에 많은 정을 듬뿍 쏟고 간다.
상호 협력하여 공동체를 돕고 지원하니 마을 주민들은 쉼터에 나와 편안히 쉬면서 항상 웃음꽃이 만발하다.
또 청계리에는 예부터 효의 고장으로 이름난 곳으로 주위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고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조태일 이장님! 더 좋은 일 많이 하시길 바라며 언제가 건강하길 기원하며 파이팅을 외칩니다.
설화 “수백 명 목숨을 구한 암굴을 찾아라”
팔덕면은 무이산이 있고 무이산 동쪽에는 원통산이 있다.
400여 년 전 임진왜란 무렵에 산이 울창하였다.
수 백 년 묵은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서 그야말로 송곳 세울 곳도 없이 천연의 밀림 지대를 이루니 사람들은 낮에도 꺼려하고, 갖가지 짐승들만 우글거렸다.
이야기는 정유재란의 일이다.
정유재란 서전은 남원에 일대 결전이 벌어졌는데 남원성이 전멸하고 참상을 빚고 말았다.
이 여세를 몰아 왜놈들이 우리고장을 밀어 닥치니 관민, 백성들은 어찌 할지를 모르고 서로 목숨 구하기 바빠 아비규환이었다.
난민들이 동서남북 팔방으로 피난을 가 흩어졌는데 다른 곳으로 간 사람들은 전부 몰살 하였는데 원통산으로 피난을 들어간 사람들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다. 마을 사람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피난민이 우왕좌왕 하다 밀림 속에서 굴을 구해 피난했기에 모두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이윽고 전쟁이 끝난 후 암굴 덕분에 목숨을 구했기에 원통산에 산신제를 올리러 갔는데 어찌된 일인가 암굴은 온데간데없고 찾을 길이 없었다.
거듭된 국난으로 행정 질서가 문란해져 산에 나무를 사정없이 베어 내어 화목으로 활용했기에 큰 비에도 토사가 무너져 암굴을 덮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조상들은 구해준 암굴은 원통산 땅속에 파묻혀 있을 것이니 우리 손으로 암굴을 찾아 영원히 간직하였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참고문헌 : 순창군지, 군정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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