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우리마을최고야 - 순창읍 백야리
|
|
순창문화원장 김 기 곤
|
|
2011년 04월 21일(목) 14:19 [순창신문] 
|
|
|
| 
| | ⓒ 순창신문 | | 백야(白也)마을은 백제(百濟) 시대부터 부족들이 전쟁을 자주했던 요세지로 이곳에서 전열을 재정비 해 가며 싸웠던 곳으로 쉬었다 다시 전쟁터로 나갔다 하여 “쉬엿재”라고 하였다 한다.
해방 후부터 백야라고 부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미산에서 기두하여 서북쪽으로 낙맥, 다시 동북쪽으로 흐르는 능선이 동쪽으로 돌아가는 모퉁이에 마을이 있으니 백야리이다.
순창 광주 간 국도변에 위치한 이 마을은 서쪽으로는 금과면, 서북쪽은 팔덕면과 접하고 있으며 ‘희여태재’라고 하는 고갯마루가 있다.
길가에 있기에 옛날에는 주막이 많았고 쉬어 가는 곳이란 말로 ‘쉬엿재’라고 하였다고 하나 ‘쉬엿재’가 아니고 ‘희여태재’가 옛 이름이기에 수레를 끌고 달리는 힘든 말이란 말로 ‘희여태’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고갯마루를 경계로 삼국시대부터 전쟁터였다는 전설과 함께 정유재란 때 의병장 조유 장군이 왜병을 이곳에서 맞아 싸웠다고 한다.
그 증거로 이곳에는 몰무덤(많은 사람을 같이 묻었음)이 있었고, 수년 전 이 몰무덤의 봉분 상층에서 장검이 나왔는데 고리만 금고리여서 남았고 칼은 부식되어 버렸다고 한다.
또한 백야리와 팔덕면 용두 사이에는 장군묘 또는 몰무덤이 여러 봉분이 있었다고 한다.
이와같은 근거는 순창의 역사 기록에 있기에 후에 적기로 한다.
백야 마을은 교통이 좋고, 마을이 산 밑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안길이 환하여 트여 있어 살기 좋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주위에는 순창고추장 민속마을이 웅장하고 고풍스럽게 자리잡고 있으며, 순창장류연구소가 세워져 밤이면 장류연구동에서 불빛이 환하게 비춰 순창의 발전을 느끼게 해 주고 있다.
백야리는 마을 호수 37호에 인구 87명으로 구성된 마을로 주민들이 한가족처럼 정답게 살아가는 마을이다.
조그마한 마을이지만 예부터 효와 의리가 있는 마을에서 헌신 봉사하고 계시는 신태섭(69)이장과 김영곤 지도자, 설양례 부녀회장이 함께 마을을 이끌어가고 있다.
신태섭 이장은 수년간 마을을 위해 봉사하고 계시며, 지도력이 풍부하여 순창군 이장 협의회 회장도 역임하였으며 백야리를 단합 잘 되는 마을로 탈바꿈 시키신 분이다.
백야리는 모든 주민이 논농사와 밭농사에서 소득원을 찾아 생활하고 계신다.
신태섭 이장께서 새로운 영농 기술을 습득하여 마을 주민에게 전수하여 다른 마을에 비해 영농 기술이 발단된 마을로 모두가 새로운 기술로 영농에 종사하며 많은 소득을 올리는 마을이다.
백야마을도 마을의 공동 쉼터인 회관과 경로당을 병행하여 운영하고 있어 회관에는 항상 주민들이 모여 대화의 광장이 되고 있어 회관과 경로당을 운영하는데도 신태섭 이장과 마을 구심체의 무한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주민의 복지와 편안함을 위해 모두가 노력하고 협조하기에 주민들의 협동심이 어느 마을보다 높은 마을이다.
백야에서 객지에 나간 출향인들도 항상 마을 사랑에 큰 관심을 갖고 고향을 돕고 있어 앞으로도 서광이 비치리라 생각된다.
이곳 백야리에 전해 내려오는 역사와 설화를 간추려 보면 1597년 선조 30년 8월 정유재란 때에 왜군을 피해 순창군수 배경남이 가족들과 금성산성으로 피신할 때 1598년 봄 순창사람들은 뜻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조유 장군과 오 장군을 선봉장으로 왜군을 맞아 팔덕 백암 벌에서 전투를 벌였고 또 백야전투에서도 큰 전투를 빌며 우리 군의 열세로 많은 희생자가 나와 백야와 팔덕 용두 사이에 이름 모른 병사들의 몰 무덤으로 남아 있고, 장군들의 무덤인 장군묘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위와 같이 왜군과의 전투가 치러진 백야 벌에는 백제시대부터 씨족간의 전투장으로도 알려진 곳이다.
백제시대에 팔덕면 덕천소유 ‘곰방죽’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옛날에 씨족 사회인 마 씨와 조 씨가 이곳 부근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조 씨와 마 씨는 항상 적대관계로 발전하여 싸움이 벌어지게 되어 마 씨 대 조 씨는 물러날 줄 모르고 목숨을 걸고 백야 벌에서 싸우다가 조 씨가 불리해지자 마 씨에게 쫓겨 줄행랑을 쳐 아미산 꼭대기에 천연동굴로 되어있는 굴속으로 피신을 하여 살게 되었다. 이 동굴은 천연동굴로 2~4m 들어가면 2층의 동굴이 있어 피난하며 살기에 아주 편리하게 만들어져 있는 동굴이었다고 한다.
동굴 문은 금과면 수양리 쪽으로 나서 백야 쪽으로 공격하면 수양리 쪽으로 내려갈 수 있고, 동굴 앞에 서서 사방을 보면 금과면, 팔덕면, 순창읍, 풍산면 일부가 내려다 보여 요새지 중의 요새지이며 아주 중요한 동굴이었다.
조 씨가 이곳에서 피신하며 살았다고 해서 현재도 ‘조가굴’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곳 주민들이 산에 오를 때 신기해서 찾아 보기도하며, 등산객들이 ‘조가굴’을 찾는 이가 많아 현재도 존재하고 있으니 긴 세월 속에 많은 역사를 간직한 ‘조가굴’을 재조명 하여 현대에 옛 설화를 찾아 체험장으로 개발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위와 같이 설화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 백야리의 발전과 주민들을 위해 헌신 노력하는 신태섭 이장의 파이팅을 외칩니다.
*참고자료 : 순창향지, 구전설화
|
|
|
|
순창신문 기자 . “” - Copyrights ⓒ순창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
|
순창신문
기사목록 | 기사제공 : 순창신문
|
|
|
|
|
|

|
|
|
|
실시간
많이본
뉴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