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창의 락덕정, 김병로 선새잉 소년시절에 공부했던 곳(문화재 자료 제72호)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생가(순창군 복흥면 하리 519외 3필지) 6ㆍ25 동란으로 마을 전체가 불에 휩쓸려 전소된 후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며 당시 몸체자리에 지역주민인 조기호 씨가 생가를 복원, 거주하고 있음.
 창흥의숙(현 창평초등학교)에서 고광준, 김성수, 백관수, 송진우 등이 공부한 당시의 학교

을사조약 이후 일본군과 맞서 싸워
32세부터 ‘민족 변호사’의 길을 걷다
한 시대를 도도히 흐르는 탁류와 더불어 마주 싸우면서 끝까지 한 인간으로서의 성실성과 민족정기를 저버리지 않고, 때로는 탁류에 휩쓸리듯 하다가도 온갖 공명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탁류와 마주 싸워온 가인 김병로 선생의 발자취를 정확하게 살피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연극은 재현할 수 있어도 한 인간이 남기고 간 발자취를 그대로 묘사하기는 어렵다. 그가 선 무대가 다르고, 그 무대를 보는 관중들의 감정 또한, 그 때 그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다만 가인이 남기고 간 그 큰 발자취와 몇 마디의 말에서 그 사상과 인간성을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이 글은 김학준 교수가 쓴 가인 김병로 평전(1988년)의 인물평을 부분적으로 인용하고 있음을 미리 밝혀 둔다.
/편집자 주
일제 강점기를 거쳐 혼란한 사회ㆍ정치적 흐름 속에서도 강직, 의연, 청렴, 공정의 자세로 우리나라의 사법부의 기틀을 다진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선생.
선생은 대법원장 관사에서 조차 기름 난방시설이 있음에도 고위ㆍ하위법관들간의 공평성을 유지하기 위해 톱밥이나 연탄을 땠으며, 가족 가운데 대법원장의 승용차를 타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법관 인사에서는 대법원장과 조그마한 연고가 있는 사람은 도리어 멀리할 정도로 청렴했다.
이는 법관의 올바른 몸가짐이며 이승만 정권하의 사법부가 권위와 독립을 지켜낸 밑거름이자 원동력 이었을 것이다.
할머니가 독서당 세워
한문공부…11시에 결혼
이런 가인 김병로선생은 1888년 1월 부친 김상희와 모친 장흥 고씨 사이에서 1남 2녀중 둘째로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여섯살 되던 해 할아버지가, 이듬해는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 후 할머니가 직접 독서당을 세워 한문공부를 시켰으며, 만 11세가 되던 1899년 5살 연상인 연일 정씨와 혼인을 하였으나 이듬해 할머니마저 별세하게 되자 홀어머니를 모시고 집안의 가장노릇을 해야 했다.
선생은 독서당에서의 소학에 이어 사서를 독파했고 성리학의 최고봉인 간재 전우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으며 목포의 일신학교에서 신학문을 일제의 호남대토벌작전으로 의병활동이 어려워지자 선생은 춘강 고정주가 설립한 창흥의숙에서 수학하면서 고광준, 김성수, 백관수, 송진우 등과 교유했다. 또한 광주소재 무등산 기슭에 남아있는 상월정에서도 공부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창흥의숙은 1906년 일제침략기에 설립, 건평 180평, 6칸의 교실이 있었으나 1950년 11월 23일 공산군에 의해 소각이 됐다.
지금은 창평초등학교로 개칭, 101회째 졸업으로 총 졸업생 8,322명을 배출한 학교다.
특히 선생은 10여세때 간재 정우 문화에 들어가 성리학을 익히고 이미 70세가 넘은 면암 최익현 선생이 을사조약에 격분하여 일으킨 의병 대열에 참여, 일본군 및 관군과 대결한 전력은 앞으로 살아갈 김병로 선생의 정신이자 사상의 원천이 되었으리라
일본 유학에 돌아와 강단에 서기까지
선생은 만 22세 되던 해인 1910년 3월 창흥학교 속성과를 마치고, 일본의 도쿄로 1차 유학을 떠나 일본대학 전문부 법과 청강생으로 공부하다 한일합병소식을 듣고 잠시 귀국, 다시 2차 유학을 떠나 1912년 명치대학 법과 3학년에 편입하게 됐다. 이후 1915년 일본대학 법과 졸업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둬 일본 변호사 시험 권유를 받았으나 조선인은 응시자격이 없어 포기하게 됐다.
귀국하자마자 1915년 9월부터 경성전수학교 법학 조교수로 발령받아 학생들을 지도하였고, 조선인이 설립한 보성전문학교에도 출강했다.
당시 선생의 강의는 쉴 사이 없는 열띤 강의로, 제목만 정하면 원고 없이도 몇 시간이든 강의를 계속할 수 있는 풍부한 학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명한 학설까지 비교ㆍ비판하는 등 흥미진진했다고 한다.
그러다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전문학교 강사이던 그에게 특별임용기회가 부여되어 밀양 지방법원의 판사로 발령을 받게 됐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독립운동자를 재판하는 일이었.
판사 재직 1년도 못되어 그는 판사자리를 내던지고 독립운동자의 편에 서서 변호에 앞장서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만 32세 되던 1920년 변호사를 개업하여 이때부터 ‘민족변호사’로써 ‘사상변호사’로써 길을 가게 됐다.
/양재실 기자
<이 기획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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