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3년 환도직후 이 대통령과 함께
1945년 패망이 임박한 일제가 민족지도자들을 소탕에 나서자 양주로 피신했던 가인 김병로 선생은 그곳에서 8ㆍ15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이 되자 선생은 건국운동의 일선에 나섰고, 여운형이 조직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독주을 비난하고 그 대신 8월에 백관수ㆍ이병헌 등과 함께 고려민주당을 창당했다.
이를 확대해 다시 조선민족당을 창당했으며, 이어 한국민주당(한민당) 창당에 참여, 창당발기위원ㆍ임시의장ㆍ중앙감찰위원장ㆍ서울지부 집행위원장ㆍ법제조사분과위원장 등을 지냈다.
선생은 법조인이자 정치인으로서 건국운동에 투신한 것이다.
좌우합작운동 착수
선생은 여운형의 건준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건준을 방문하여 좌우합작을 제의하기도 했다. 이른바 여운형의 건준을 중심으로 한 좌익계의 독주를 견제하고 좌우의 양 거두인 여운형, 송진우 사이의 화해를 도모하려는 좌우합작운동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선공산당의 각 지방에 세워진 인민위원회 해체 반대로 협상이 결렬되고 말았다.
자유당 정부는 1959년 4월 30일 군정 법령 88호를 내세워 가장 격렬한 야당지였던 경향신문을 폐간했다.
이는 앞으로 있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언론을 봉쇄하려는 자유당의 마지막 발악이었고 이를 두고볼 수 없었던 전 대법원장인 선생은 직접 정부의 조치가 불법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7ㆍ29 총선거에 실패
1960년 3ㆍ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소리가 전국에 퍼지고 드디어 젊은 학생들이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고 나섰다.
이때 학생들의 열렬한 추대 요구, 장면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김도연 최고위원의 간청 등으로 선생은 독자적인 자유법조단을 출범하게 됐다.
그리하여 선생은 1960년 7월 29일의 5대 국회의원 선거에 고향인 전북 순창에 출마하였으나 그만 낙선하고 말았다.
비록 선생은 7ㆍ29선거에 패배하였지만, 민주당의 주도 밑에 국회가 구성되었고, 민주당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신ㆍ구파의 분쟁이 분당사태로까지 치닫자 다시 선생을 중심으로 신당 창당을 요구해 오기도 했다.
그러나 선생은 초연한 원로의 자세로 ‘현 정부가 잘하는 것은 아니나 잘하도록 밀어주는 것도 정국을 안정시키는 것에 도움이 된다’며 오히려 제2공화국 장면 총리 인준을 축하했다.
단일 야당의 집념
서슬 퍼런 군사정권의 위협 속의 1963년 정치활동 정화법에 묶여 정치활동이 금지된 시절, 김병로, 윤보선 등 구정치인 중심으로 새로운 야당 창당의 정치작업을 시작했다.
단일 야당, 단일 후보를 통한 박정희 군사정권의 종식을 공동목표로 창당작업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민정당을 비롯하여 신정당, 민주당 등 3당과 무소속 인사들은 8인 대표자회의를 통해 ‘선통합 후조정’의 원칙에 합의하게 되었고 이에 발맞춰 윤보선이 대통령 후보 사퇴를 표명하자, 각 당의 전권대표들은 드디어 새로운 국민의 당 창당에 합의를 이루었다.
그러나 막상 국민의 당 창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을 둘러싸고, 민정계와 신정계가 정면으로 세력다툼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선생은 77세의 고령과 불편한 몸을 이끌고, 최고의 영도적 위치에서 단일 야당 대통령 후보의 산파역을 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 것이다.
그가 마지막 정열을 바친 단일 야당의 꿈은 깨어지고, 민주적 시민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민간인 출신의 권력 장악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로써 가인 김병로 선생은 정계에서 조용히 물러선 것이다.
<이 기획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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