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 2026-04-17 | 10:02 오전

더불어민주당 전북특별자치도당 순창군수 후보

로그인 회원가입 기자방 원격
    정치/행정 교육 문화 스포츠 환경/보건복지 농업소식 종합 인물인사 칼럼 기획 특집 토론방 보도자료 지역소식 소식정보 포토 경제

전체기사

커뮤니티

독자투고

공지사항

독자마당

자유게시판

토론방

뉴스 > 기획

+크기 | -작게 | 이메일 | 프린트

‘한국 법조계 대부’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청백사상(2)

(2)신간회 운동에 앞장
민족주의ㆍ사회주의 진영 똘똘 뭉쳐
일제와 싸우면서 ‘상해임정’ 지원

2007년 10월 23일(화) 15:56 [순창신문]

 


가인 선생의 교수시절의 경성법률전수학교(1919년)

재동경 호남 학우들(가운데 줄 오른쪽으로부터 두번째 가인 김병로)

일본대학 전문부를 거쳐 명치대학 시절에 같은 순창 출신 학우 김영무와 함께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 선생이 태어난 전북 순창과 가까운 정읍 고부군은 전봉준을 지도자로 하는 동학운동이 시작된 곳으로, 가인 선생이 만 6세가 되던 해인 1894년, 그가 살고 있는 순창까지 전봉준의 동학운동이 일고 있어 이때부터 선생에게 민족주의 정신이 불씨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으로 사료된다.




한국 독립 운동사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각각 별개의 단체로 나뉘었고 이들 단체는 서로 다른 목표와 투쟁 방식으로 대립과 충돌을 거듭하다 일제로부터의 독립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양 진영은 유일당 운동을 벌여 1927년 신간회를 창설하게 됐다.


1927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이던 허헌이 광주학생 사건으로 투옥되자 당시 회계 책임자이던 가인 선생이 중앙집행위원장을 대행하면서 사실상 신간회를 이끌어 가게 됐다.


이때부터 신간회는 중앙 활동 못지않게 전국 각지의 노동자와 농민들의 독립활동을 활성화 시켰고 해외 지부활동 또한 적극적이었다.


또한 선생은 신간회를 통해 항일 활동을 폄과 동시에 변호사로서의 항일활동도 계속해 나갔다.


1927년 6월 전조선 변호사대회가 열렸을 때 선생은 치안유지법, 신문지법, 출판법 등이 지닌 문제점들의 개정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조선일보에서 그의 활동을 크게 보도까지 했다.


선생은 고사 직전의 신간회를 회생시킬 정도로 자기 희생적이고 적극적이었으며 그 결과 138개 지회에 회원수가 10만명에 이르게 됐다.




신간회의 해체 반대론 제기




그러나 가인의 진용은 우파적 색채가 강했으며 그로 인해 자연히 좌익 세력과의 알력이 표면화 되면서 우경화 경향의 중앙에 대해 공개적인 반발이 빈번하게 됐다.


이에 일제 당국과 좌익세력은 급진전적 성향이 지나치게 강화된 신간회에 위협을 느끼게 되자 공산당에서는 신간회를 해소하라는 코민테르 지령까지 내려지게 되었고 이러한 방해공작은 신간회 조직까지 영향을 미치게 됐다.


1930년 12월 27일에 열린 신간회 평양지회의 대회에서 마침내 해체파가 승리하였고 이어 인천지회와 경성지회 등 각 지회의 해체 결의가 중앙으로 까지 밀리게 됐다.


이에 선생은 해체파가 명분으로 내세우는 비계급적 운동으로 계급적 의식을 말살하고 근본 목적을 저해한다는 것들에 반박하여 각종 언론에 해체반대론과 신간회 존치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하는 등 적극적으로 해체 반대운동에 나섰다.


그럼에도 1931년 4월 14일, 신간회 회원 100여 명이 참석한 중앙위원회는 ‘신간회 해산에 관한 총회 소집의 건’을 상정하게 되었고, 정사복 경찰이 회의장을 포위, 칼로 무장한 임석 경관이 단상을 버티고 있는 가운데 거수로써 해산총회 소집을 가결하고 말았다.




가인선생, 양주 농촌으로 은거생활




그후 1932년 이른바 만주사변을 전후하여 일본의 대륙 침략정책은 노골화되고, 한국인에 대한 탄압은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동지들은 옥고를 치르거나 변호사 자격을 박탈하는 등 사회활동을 막아버렸다.


이때부터 선생은 양주군 노해면 창동에서 은거생활을 시작하면서 양계, 양돈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됐다.


이런 생활을 통해 선생은 일본의 배급체제 속에서도 자급할 수 있었으며 1945년 해방때까지 10여 년 동안 철저한 절제 생활과 물밑에서 상해 임시정부 지원 등 독립운동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선생은 배급받아야 할 술과 담배를 끊어버렸고 태평양 전쟁 말기에 들어서는 사료 배급이 원활하지 않아 군청 직원에게 뇌물을 주어야 할 형편에 이르자 차라리 양계업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처럼 선생의 철저한 청백사상과 투철한 민족정신에 입각한 독립운동 사상은 1948년 정부 수립과 초대 대법원장에 취임하면서 우리나라 사법의 기틀을 다지는데 근본이 되었으리라  


<이 기획기사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순창신문 기자  .
“”
- Copyrights ⓒ순창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순창신문 기사목록  |  기사제공 : 순창신문

 

이전 페이지로

네티즌의견 0개가 있습니다.

 

!!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개인정보를 유출하는등 법률 및 신문사 약관에 위반되는 글을 삼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에 대한 민형사상의 법적인 책임은 게시자에게 있으며 운영자에 의해 삭제되거나 관련 법률에 따라 처벌 받을 수 있습니다.

실시간 많이본 뉴스

 

더불어민주당 전북특별자치도당

옥천5마을, 주민 화합 플리마켓

순창군 읍·면민 협의회 4월 정

최기순 순창군 장애인편의증진기술

농업기술센터, 과수 화상병 원천

“나무에 새긴 마음, 군민과 나

순창군청소년수련관, 청소년 자

너의 탄생을 축하해♥ 장은우

순창군장애인복지관, ‘2026

대한노인회 팔덕면분회, 선진지

회사소개 - 조직도 - 임직원 - 윤리강령 - 편집규약 - 광고문의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 기자회원 약관 - 구독신청

 상호: 순창신문 / 사업자등록번호: 4078107159 / 주소: 전북 순창군 순창읍 옥천로 32 / 대표이사: 오은숙
mail: scn5850@naver.com / Tel: 063-653-5850 / Fax : 063-653-5849
Copyright ⓒ 순창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을 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