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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신문 발행인 故 이태영 목사 추모 특집

2025년 10월 17일(금) 10:17 [순창신문]

 

↑↑ 故 이태영 목사 (前 순창신문 발행인)

ⓒ 순창신문



순창 언론의 씨앗을 뿌린 조용한 혁명가이태영 목사를 추모하며

장교철
순창문인협회장


전례 없었던 극한 더위. 생각마저 지치게 했던 찜통더위가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꼬리를 내릴 무렵, 박현숙 선생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이태영 목사님이 소천하셨답니다”

서늘한 갈바람에 정신이 들 무렵, 갑작스러운 부음에 생각이 멈춰졌습니다.

불과 3주 전,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기 전 병실 복도에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땐 목소리에 힘이 있었고 ‘순창신문’ 추억도 또렷하게 기억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빠른 부음을 들을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토록 하나님 곁으로 서둘러 가고 싶으셨던 걸까요?

3시간 남짓, 참으로 오랜만에 많은 추억을 이야기했습니다.

8~90년대, 독재정권 서슬 퍼런 시절, 나라와 지역사회 민주화를 숨죽여가며 나누던 암울한 때. 시국문제 앞에서 나는 흥분했지만, 목사님은 흔들림 없이 강직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차분한 목소리로 앞뒤를 연결하며 합리와 논리를 정연하게 펼쳐 내는 침착한 대안 실천가였습니다. 흔히 목회자에게 갖는 선입견, 즉 선언적 의미로만 일을 끝낼 것이라는 인식을 바꿔놓았던 조용한 혁명가의 모습을 이제는 더 이상 마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1991년 2월, 군청 앞 냇가 건너 패널로 지은 목사님 사택. 늦은 저녁에 만나자는 기별이 왔습니다. 촉수 낮은 전등 밑에서 가칭 ‘순창신문’ 발행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내년도 지방자치가 30년 만에 시작되는데 우리 고장 발전을 위해선 정직한 언론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며 지역신문 발행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지방자치가 바르게 정착하기 위해서는 지역 여론 활성화와 여론을 소중하게 아는 민주주의 정치를 미리 준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전북 14개 시·군에서 지역신문을 발행한 곳이 없으니. 우리가 순창에서 가장 먼저 시작합시다.”

이미 발행 중이던 ‘남해신문’, ‘홍성신문’ 등 지역신문들을 살펴봤습니다.

담 너머 이웃이 살고 있는 평범한 삶이 크고 작은 사진과 함께 재미있게 실려 있었습니다. 잘못하고 있는 군수 행정을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지역민과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중앙에서 발행한 신문에 익숙했던 터라 군 단위 지역신문은 낯설었습니다.

불편했지만 재미있었습니다. 그냥 스쳐 지나갔던 일상의 모습들이 활자로 살아난 것을 보니 심장이 뜨거워졌습니다.

조악한 홍보지 스타일의 4면이나 8면이 아닌 16면 이상의 묵직한 신문들이었습니다.

마침내 2월 12일, ‘지역민과 함께 내 고장을 위한’ ‘주간 순창신문’ 제호 아래 타블로이드판 창간 준비 1호를 발행했습니다.

1면 머리기사에는 ‘4월 중 창간 예정’을 알리고, 발행 목적과 내용, 편집 방향을 제시했으며 하단엔 창간취지문을 실었습니다.

1차 창간추진위원 28명 명단을 알리면서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창간 준비 2호에는 ‘우리 군 기초의원 총 30명 출마’ 기사와 함께 출마 후보자 프로필을 상세하게 다뤘습니다.

여건이 녹록지 않아 6호까지 준비호를 발행한 끝에, 마침내 1991년 9월 10일에 역사적인 ‘순창신문 창간호’가 탄생했습니다.

‘준비호’ 마무리 때까지 모두가 자발적었고, 무급으로 참여하여 이뤄낸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앉은뱅이책상 위에서 창간 준비 3호를 편집하고 있었던 4월의 밤. 우리 지역 문화에 조예가 깊으신 어르신 세 분이 음료수를 들고 오셨습니다.

‘우리 순창을 위해 고생을 하신 분들이 누군지 궁금해서 왔다’며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작업하는 동안 처음으로 방문했던 어르신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목사님 고향이 순창 어디시오?”

“저는 순창이 고향 아닙니다. 본향은 대전인데 서울에서 컸어요. 지금은 순창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모조지에 레이아웃 작업을 하고 있는 나를 보고는

“선생님은 읍내서 가끔 본 것 같은데 아버지 함자가 어떻게 돼요?”

“어르신들은 제 아버지 잘 모르실 겁니다. 저도 고향이 순창이 아녀요. 행가리 섬진강 건너 대강에서 왔습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어르신들은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시면서 짧게 한마디를 남기셨습니다.

“모두 타향 사람들이구먼, 객지에 와서 고생이 많아요.”

군산의료원 병실에서 나눴던 이야기는 신문으로 맺어진 인연 덕분에 묻혀 있던 ‘순창신문’ 이야기가 되살아났습니다.

신문 한 호를 발행할 때마다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창립자본금 5천만 원을 마련하기 위해 군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끌어내고자 고군분투했던 시간들, 마계쪽 광물 채굴로 훼손된 채개산과 회문산의 역사적인 가치 보존을 취재하고 기사화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회유와 협박을 감내해야 했던 순간들.

‘창간 준비호’를 내면서 약속했던 ‘책임지는 신문’,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신문’, ‘공평한 신문’을 잃지 않기 위해 살얼음 위를 걷듯 순창 사람들의 삶과 순창의 역사를 10년 동안 이어왔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습니다.
창간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분이 나타났습니다.

곱게 키운 아이 시집 보낸 맘으로 보내드리고, 우리는 다시 본업으로 돌아갔습니다.

돌이켜보니 균형 잡힌 지역 언론의 가치는 산술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위대한 자산이었습니다.

이태영 목사님이 뿌리고 가꿔온 지역 언론의 가치는 지금도 순창 곳곳에서 지역 자치와 민주주의로 꽃피고 있습니다. 그 가치가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땅속 깊이 뿌리 내리게 하는 몫은 남아 있는 우리들의 책임임을 명심합니다.

15년을 도반으로 함께 했던 시간이었지만 목사님이 화난 표정을 지으신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습니다.

어떤 불편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기다리고 귀 기울여 듣던 진지한 모습. 그리곤 맨 마지막에 차분한 화법으로 최선을 다해 이해를 구하고 설득하던 성실한 표정을 잊을 수 없습니다.

순창에 남기신 아름다운 영혼은 우리 순창 땅에 오래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한 점 부끄럼 없이’ 사셨기에 하나님께서도 목사님 믿음을 기쁘게 받으셨을 겁니다.

편히 잠드소서, 아름다운 영생을 누리소서.
목사님




목사님 정말 고마웠습니다.

박현숙
순창국악원 강사


제가 목사님을 처음 만난 건 1987년 초여름 쯤으로 기억합니다.

순창군 농민회를 결성하기 위해 몇 분이 모여 논의를 할 때 이태영 목사님께서 함께하셔서 그 때 인연이 처음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 이후 목사님께서는 항상 농민들과 함께하셨고 농민들을 위한 일이라면 언제나 앞장서서 일하셨고 농민회 집회 장소에도 언제나 빠지지 않고 앞장서곤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조용하시고 인자하신 변함없이 따뜻했던 목사님 모습만 제겐 강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농민들의 노동력을 줄여 농민들이 좀 더 편리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투묘 모내기 농사법을 순창에 보급하기 위해 직접 농가마다 찾아다니면서 시연하시고 농민들의 고민을 함께하기 위해 농민상담소를 지금의 자활센터 자리에 열어 언제든 누구라도 쉽게 고민을 나누고 해결할 수 있도록 농민상담소라는 장을 열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1991년 9월 10일 ‘순창신문’을 창간하시게 되어 저는 주부 기자로 조금이나마 목사님 하시는 일에 보탬이 되고자 함께 활동하게 되었는데, 초창기 신문사의 경제적 어려움이 많아 매회 신문을 발행할 때마다 산고를 치른다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신문 인쇄비용을 줄이기 위해 광주 무등일보사에 원고를 직접 들고 가서 초판 신문이 나오면 오타 수정을 직접 하곤 했는데 밤샘하며 면도칼로 오자를 오려내고 깨알 같은 수정할 글자를 테잎으로 붙이는 작업을 하면서도 깔깔 웃어가며 날이 새도록 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평생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시니 늘 생활비는 쪼들리기만 했기에 장날이면 상담소에 출입하는 분들 점심 식사를 위해서 오천원, 만원이 없어 내게 빌린 적 있었습니다.

사모님은 빌린 돈으로 식재료 사서 상담소에 점심시간에 오시는 분들 식사를 대접하고 남은 음식은 주위 어려운 할머니께 싸주시는 걸 보고 저는 내심 놀랐습니다.

언젠가 행사에 가셔야 하는데 마땅한 옷이 없으셔서 옷장을 뒤져 겨우 찾은 와이셔츠가 한쪽이 헐어 있었는데 그 자리에 투명 테잎으로 붙어 입으시며 목사님과 사모님이 깔깔 웃으셨다는 말씀이 목사님의 삶은 아무나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절재되고 진정으로 자신을 내려놓고 주위를 살피며 따뜻한 세상을 만드시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으신 분이셨습니다.

늘 곁에서 긍정적이고 밝은 사모님이 웃으며 함께 하셨기에 가능했겠지만, 무엇보다 목사님의 검소하고 특히 어려운 순창군민을 아끼는 마음이 가득하신 분이셨기에 가능했던 일들이라 생각합니다.

순창을 떠나셔서 전주 기독교개발원으로 옮기셔서도 고생은 연장이셨습니다. 개발원 땅에 고구마를 심으셨는데 인부를 구하기 어려워 고생하신다는 연락을 받고 우리마을 아주머님들 모시고 가서 풀메기 작업을 했던 기억도 납니다. 조금의 예산도 낭비하지 않으시려고 개발원 사택도 직접 지으시고 양계장을 운영하여 경제적 자립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으신 분이셨습니다.

순창을 떠나셨지만 늘 순창을 그리워하시는 목사님 내외분께서 순창으로 오시겠다고 조그만 땅을 구입하시겠다고 하셔서 저희 집 소유 땅을 싼값에 계약했는데 일년 쯤 뒤에 아무리 생각해도 건물을 지을 재원 마련이 어려울 것 같다고 계약 취소를 하셨고, 우린 그 땅을 계약가보다 1천 5백만원을 더 받고 팔았습니다.

목사님께서 이전 하시고 파셔도 되는데 극구 되돌려 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제가 뒤늦게 공부해서 대학원 졸업까지 하게 된 동기를 주셨고, 컴퓨터를 다룰 수 있게 해주셨고, 우리 아이들 성장기에 교통수단이 없어 가까운 여행도 어려운 시기에 좁은 차에 두 집 가족을 태우고, 무주까지 가서 눈썰매를 탈 수 있는 추억을 갖게 해주신 목사님, 정말 감사하고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늘 자신보다 어려운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대화와 타협을 말씀하셨고 순창신문의 창간호에 실린 뜻처럼 대안 없는 비판보다 숨겨진 미담을 찾아내어 알리고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고 서로를 이어주는 책임질 줄 아는 순창군민이 되도록 하여 지역 발전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는 순창신문 창간의 뜻은 목사님 생전 삶의 모습과 마음의 자세가 그대로 표현된 거라 여겨집니다.

저는 교회를 나가진 않지만, 세상에 이런 목사님만 계신다면 얼마나 좋은 세상이 될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순창에서 목회하시고자 하셨는데, 그 자리에 후배 목회자가 신청하자 미리 포기하시고 군산 수산교회에서 목회하시다 혈액암이 발병하여 결국을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시고 박사과정을 준비하시다 뜻을 다 이루시지 못하고 떠나시게 되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병환 중이셨을 때 그만 쉬시고 우리 사회가 원하는 목사님이 더 좋은 일을 하고 많은 일을 하실 수 있게 모든 일을 쉬시고 요양하실 것을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 자신의 사명이라며 논문을 쓰시고, 주일 목회를 놓으시지 못하고 이어 가시다 의사의 권유도 마다하시고 스스로 이식수술도 거절하신 후 9월 4일 군산 의료원 호스피스 병동으로 오셔서 지난 9월 21일 소천하셨습니다.

떠나시기 일주일 전쯤 마지막 인사라고 전화하셔서 사는 동안 함께 할 수 있어 감사했고, 우리를 두고 떠나려니 마음이 아프시다던 목사님 마지막 말씀이 더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더 좀 적극적으로 치료와 요양을 권유하지 못했던 것이 많이 후회도 되지만 목사님의 숭고한 뜻이 워낙 완고하셨기에 그만 놓아드릴 수 밖에 없어서 더 아쉽고 마음이 아픕니다.

요즘 의술도 좋아지고 목사님께서 다행히 보험도 넣어 놓으셔서 충분히 수술받고 건강을 되찾을 수도 있었는데 목사님은 조용히 생을 마감하실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군산 의료원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시고 첫날 뵈었을 때 순창에 계셨을 때 이야기를 밝은 미소를 띄우며 줄줄이 말씀하시고 회상하시며 행복해하셨습니다.

생의 마지막을 순창에서 함께 보내다 가셨으면 좀 더 좋았을 것을.......

마냥 아쉽습니다 목사님께서 떠나시니 세상이 반쯤 비어버린 것 같습니다.

살면서 답답하고 힘들 때마다 언제라도 찾아가 투정도 부리고 고민도 털어놓고 깔갈거리며 웃을 수 있는 분을 이제 어디서 찾나요?

목사님 그곳에서는 아프지 마시고 하시고 싶은 더 많은 일 원없이 하시고 행복한 세상에서 지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바라시던 우리 순창군이 되도록 그곳에서도 지원 아끼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목사님 뜻에 어긋나지 않게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명복을 빕니다.



옹달샘 같은 이태영 목사님!!

강성일
前 순창읍장


이젠 초가을이라 조금은 선선하다 추석도 다가오고 해서 뒤뜰 풀을 뽑고 있는데 목사님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니~~ 아직 돌아가실 나이가 아닌데~~!!단정하며 단아하신 모습이 생각났다 ~~거의 20년 이상을 못 뵈었지만, 가끔 뭉개 구름처럼 떠오르는 분이셨다.

군산에 계신다는 소식을 바람결에 듣었는데, 목회자와 선지자로써 무거운 십자가를 오롯이 혼자 지고 가시는 성품이 병이되어 돌아 가신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목사님을 처음 뵌 건 1992년 공보계장 때였다. 그때 목사님께선 ‘순창 신문’을 창간하셔 대표로 계셨는데, 운동권 강경파 목사님으로 알려졌다.

운동권은 공무원을 권력의 앞잡이로 치부하고 공무원들도 그분들과 만남을 피하던 때였다.
또 하시는 일이 순창에선 처음 겪는 농민 상담소 운영, 군정 지기단 창립 등 이었으니 군청과는 긴장 관계일수 밖에 없었다.

업무 때문에 만나 뵀는데 내 시각이 잘못됐음을 알 수 있었다.

순수하고 합리적이고 예의 바르고 상대를 존중하는 인격자에 지성인 이셨다. 그러나 군민의 삶과 약자들의 권익에 대해서는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호하셨다. 외유내강의 선비의 기개를 느낄 수 있었다. 언론과 행정은 생래적으로 거리가 있을 수 밖에 없지만, 존경받는 목회자이셨고, 시민운동의 실천가이셨다.

1991년 지방 자치가 실시되자 인구, 언론 시장 등 모든 게 열악한 고을에서 ‘순창 신문’을 창간하셨다.

지방 자치는 지역 신문이 중심이 되어 정보를 알리고 잘못된 건 지적하고 군민들이 주인이 되어 만들어 가야 된다는 신념이셨다.

목사님은 순창 사람이 아니니 연고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순창에서 오직 해야 될 일이라는 일념에서 지역 신문을 창간하셨지만, 그 애로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신문사도 기본은 경영이라 생각한다.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언론으로써 역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지역 신문의 사정은 매우 어렵다 인쇄비가 없어 신문을 발행치 못하던 때도 있었으니 오죽 했겠는가?

그래도 목사님은 한 번도 군청에 광고나 구독료 등을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아마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하셨을 거다.

그렇게 힘들게 뿌린 씨앗이 이젠 어였한 나무로 성장하여 순창을 지키고 있으니 고맙고 감사하다!!

나는 목사님과 작은 추억이 하나 있다.

어느 부서에 근무할 때 어떤 사업자가 명절 때 집에다 선물을 두고 갔다. 퇴근해서 보니 꽤 값나가는 귀중품이었다.

왠만한거면 받고 나도 적당한 선에서 답례품을 전했을 턴데, 그러기에는 너무 컸고 돌려주기도 어려웠다.

그때 ‘순창 신문’에서 결식아동 돕기 운동을 하고 있었다.

보낸 사업자를 후원자로 해서 귀중품을 ‘순창 신문’에 보냈다.

그때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게 말로만 듣던 0000군요.
하나님께서 좋아하실겁니다~~

이런저런 일을 추억하는데 풀 속에 연분홍 들꽃 하나가 다소곳이 피어 있었다 사방은 풀밭인데 등대처럼 있었다 작고 여리지만 예쁘고 기품이 있었다.

목사님이 느껴져 주변을 정리하고 마음의 인사를 했다.

목사님께서 봉직하셨던 교회에선 죽음을 소천이라 한다.
하늘이 불렀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고분군투 애쓰는 당신의 착하고 사명감 강한 목회자가 너무 고생하니 고맙고 미안해서 이젠 그만 쉬라고 부르신 것 같다.

순창은 목사님께 큰빚을 졌다. 그 분은 가셨지만, 이젠 갚아야 한다.

그건 군민들이 지역 신문과 함께 진정한 지방 자치를 이루는 것 일거다. 그러면 목사님께서도 흐뭇하게 웃으며 기뻐하실거다.

목사님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온몸을 바치셨고 맑고 정결한 정신은 우리의 마음에 남아있다.

우리 사회는 이런 분들의 눈물과 땀 희생을 자양분으로 성장한다.

목사님!
순창에 와주셔서 고맙고 감사합니다.
짧지만 큰 일을 하셨습니다.
이젠 하늘나라에서 순창을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가십시요!!

남융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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