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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중종실록으로 본 간아지 정려비 간아지 비 ... 2000년 12월 13일 순창으로 찾아와

2025년 01월 15일(수) 09:54 [순창신문]

 

ⓒ 순창신문---



열녀 ‘간아지’의 비석은 순창군법원 등기소 앞에 있다. 

전면에는 "절부 고 훈도 유문표 첩 관비 간아지 지려(節婦故訓導柳文杓接官婢干阿之之閭)"라고 새겨져 있고, 작은 글씨로는 "정덕구년구월일(正德九年六月日)"이라 적혀 있다. 
정덕 9년은 1514년(중종 9년)이다.

간아지는 순창의 관비로 유문표의 첩이었으며, 그의 죽음 후에도 절개를 지키며 살았다.

정려비는 순창읍 하방정* 에 세워졌지만 경천 범람으로 간아지비가 경천으로 휩쓸려 내려간 것을 1932년 경천 제방 공사 때 찾게 되어 호계정으로 옮겨졌다. 

이후 호계정이 소실된 후, 유문표의 묘 아래로 옮겨졌고, 2000년 12월 13일 ‘순창 향지사’ 회원들이 유문표 묘 아래에 있던 것을 정성스럽게 옮겨 순창군청 앞 순창 등기소 앞에 세웠다.


◆ 순창군의 관비였던 간아지는 

유문표가 순창의 훈도로 부임했을 때, 당시 선비를 대접하는 관행이 있어 시임 관장의 배려로 유문표를 만나 첩실로 들어갔다.

유문표가 임지를 떠나게 된 후에 간아지는 어느 사대부가의 규수도 따르지 못할 정숙한 부덕을 지켰다.

유 훈도가 떠난 후에도 간아지는 일편단심으로 세월을 보냈으나, 그의 부모와 이웃 사람들은 ‘간아지’에게 개가할 것을 종용하였다.

출신 성분이 관비이다 보니 간아지는 난처하고 곤혹스러운 일들도 많았으나, 간아지는 모든 유혹을 다 물리치고 담담하게 살아갔다.

그렇게 세월이 많이 흐른 후 유 훈도가 세상을 뜨게 되자 3년 동안 얼굴을 가꾸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상복을 입었다.

그런 후에도 그 부모가 개가할 것을 거듭 강요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간아지는 손수 자기 머리를 자르고 유문표의 본가인 담양 어그실 마을로 도망가서 한평생 절개를 지키며 살았다고 한다.

1512년 중종은 전국에 있는 충신, 효자, 열녀들의 사적을 빠짐없이 조사하여 책자로 만들라는 교시를 내렸다.

그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남곤은 “고 유문표 훈도의 관첩 간아지는 훈도가 임지를 떠난 후에도 믿음을 지켰고, 또 훈도가 죽은 후에도 3년 거상을 하였으며, 부모가 개가할 것을 권하자 머리를 깎고 집으로 도망하여 절개를 온전히 지키고 평생 혼자 살았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간아지의 충정을 기리어 정려비를 내렸다.

이 정려비는 순창의 객사 앞 한다리[大橋] 가에 세워졌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하고 빗돌만이 남아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한다리 보수 공사를 하면서 그 주변을 마구 파헤치면서 빗돌은 나뒹굴었다. 그때 금과면 남계리의 ‘문화 유씨’ 문중에서 그 빗돌을 수습하여 그들이 살고있는 동네 옆에 있는 호계정 뜰앞에 옮겨 놓았다.

그런데 그해 섣달 그믐날 ‘문화 유씨’ 문중의 사람인 유동현의 꿈에 한 소복한 여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나라의 은혜를 입어 왔는데 이제 의지할 곳이 없으니 슬프도다.” 하고는 연기처럼 사라져 갔다.

잠에서 깨어나 유동현은 예사롭지 않은 꿈 때문에 시름에 잠겨 있었는데 갑자기 불빛이 방문에 환하게 비쳐 오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문을 열어 보니 바로 얼마 전에 옮겨다 놓은 간아지의 빗돌이 있는 제각에 불이 붙어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갑작스레 일어난 원인 모를 화재로 제각을 잃은 ‘문화유씨’ 문중 사람들은 회의를 열어 의논하였다.

비록 간아지가 관비 출신의 ‘관첩’이라지만 유 훈도만을 섬기며 평생을 수절하였고, 나라에서도 이미 ‘절부’로 인정하여 정려를 내린 지 오래 되었으니 간아지는 유 훈도 집안의 사람이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간아지의 빗돌을 유 훈도의 묘 아래에 세우게 되었다.

담양에 있는 유 훈도의 묘 아래에 있던 간아지의 정려비를 2000년 12월 13일 순창 군청 앞 순창군법원 · 등기소 앞으로 옮겼다.


◆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에 열녀 간아지와 유문표 기록

1517년 1월 1일 전라도 관찰사 남곤이 간아지 열녀에게 정문하기를 장계했다. (중종실록 27권, 중종(1517년) 12년)

전라도 관찰사 남곤이 장계(狀啓)하기를,

"순창(淳昌)에 사는 관비(官婢) 간아지(干阿之)는 절의(節義)가 있어 정문(旌門)* 함이 마땅하다"라며 정문을 내려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사신이 말하기를 “이 사람들이 걸어온 행적은 지금 알 수 없으나, 다만 간아지의 일은, 예전에 훈도(訓導) 유문표(柳文豹)*의 첩인데, 유문표가 죽은 뒤에 그의 아들 유옥(柳沃)*이 세상에 이름있는 사문(斯文)*으로 일찍이 그 집에 왕래하며 어머니로 불러 존대하였기 때문에 비록 감히 마음대로는 못 하였지만, 그 실상은 음행(淫行)이 많아 마을 사람에게 천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유향(留鄕)* 최연(崔演) 등은 모두 비굴한 사람들이어서 유옥에게 아첨하려고 사실을 왜곡하여 조정에 전달했고, 결국 정문을 세우게 되었으나 마을의 유식한 사람들은 그 정문을 헐어 버리고자 했습니다.”

○全羅道觀察使南袞狀啓:
淳昌居官婢干阿之等節義 竝宜旌門, 何如?
【史臣曰: "此人等所爲之跡, 今無所考。 但干阿之之事, 以前訓導柳文豹之妾, 文豹死後, 其子柳沃, 以斯文名世, 嘗往來其家, 稱母以尊之, 故雖不敢放肆, 其淫行實多, 鄕人之所賤惡者。 而其時留鄕崔演等, 率皆卑謟之人, 欲要媚於柳沃, 而誣飾其情, 以達于朝, 遂命旌閭, 鄕人之有識者, 欲仆其旌門。"】

2000년 12월 13일 순창향지사 양상화 선생은 박태호 씨와 김용석 씨와 함께 담양군 유문표 묘 앞에 있던 간아지 비를 김용석 씨 트럭에 옮겨 순창군법원·등기소 앞으로 정성스럽게 옮겼다.

중종실록 34권, 중종 13년 7월 22일에

유옥은 창평(昌平)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문표(文豹)가 나이 늙어도 자식이 없었는데 영암(靈巖) 월출산(月出山)에 기도하여 그를 낳았다. 옥은 어려서부터 범인과 달라서 신동(神童)으로 일컬어졌다. 나이 16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23세에 갑과(甲科) 1등 * 으로 합격하였다. 키가 크고 얼굴이 준수하여, 글 잘하고 활 잘 쏘니 참으로 호걸이었다. 지기(志氣)가 곧아서 그가 대중(臺中)* 에 들어가자, 사람이 모두 두려워하고 꺼렸다. 마침내 부사에 임명되자 항상 울분하여 즐거워하지 않다가 귀근(歸覲)*한 지 얼마 안 되어 죽으니, 사람들이 다 애석히 여겼다.

【史臣曰: 沃, 昌平人。 其父文豹, 年老無後, 禱于靈巖 月出山, 生沃。 沃自少異凡, 以神童稱。 年十六中司馬試, 二十三中甲科第一人。 長身秀貌, 能文能射, 眞豪傑人也。 志氣骯髒, 其入臺中, 人皆嚴憚。 竟拜府使, 常鬱鬱不樂, 歸覲未幾而卒, 人皆惜之。"】

1512년 중종실록 15권, 중종 7년 5월 9일에 기록되지 않은 충신 효자 열부의 명단을 속간하여 책을 만들게 하라고 중외에 교유하였다.

앞서, 왕이 국내외에 교시하여 말하기를 "본조(本朝) 충신·효자·열부의 사적이 미처 도사(圖寫)되지 못한 자를 빠짐없이 찾아 내어 속간(續刊)하여 책을 만들라." 하였는데, 예조가 각도에 이를 알려서 절의(節義)로 정표할 만한 사람의 성명·직함을 빠짐없이 적어 올리게 하였다. 이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남곤(南袞)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순창군(淳昌郡) 관비(官婢) 강아지(姜阿之)는 나이가 어려 시집가지 않았고, 그 때 훈도(訓導) 인 유문표(柳文豹)가 그를 첩으로 맞이하였다. 그는 유문표가 멀리 떠난 후 수절하고 있다가 유문표가 죽자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상을 치렀다.

상이 끝난 후 그의 부모가 개가시키려 하였으나 간아지는 이를 따르지 않고 유문표의 형의 집에 숨어 겨우 모면하였습니다.
그는 늘 몸치장도 하지 않고 몇 해를 살았는데, 그의 부모는 갖은 수단으로 꾀어 개가시키려 하였으나 그는 즉시 머리를 자르고 유문표의 집으로 도망쳐 가서 지금까지 절개를 지키며 홀로 지내고 있습니다.

 淳昌郡官婢姜阿之, 年少未適人, 時訓導柳文豹娶爲妾, 及文豹遞去後守信, 文豹身死, 服喪三年。 喪畢, 其父母欲改嫁, 不從, 投匿文豹兄舍得免。 居不事容飾, 不數年, 其父母多方誘之, 又欲改嫁, 卽斷髮, 逃歸于文豹之家, 至今全節寡居。

간아지(干阿之)는 순창 훈도(訓導) 유문표(柳文豹) *의 첩이었다.

유문표가 세상을 떠나자, 죽음을 슬퍼하며 3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상례 기간 중 얼굴을 다듬지 아니하고 지극정성으로 복을 입었다.

부모가 거듭 개가하라고 강요하자 손수 자기 머리카락을 자르고 담양 얼그실 유 훈도의 본가로 도망가서 한평생 절개를 지키며 살았다.

간아지에 관한 이야기는 1517년(중종 12) 당시 전라도 관찰사로 있던 남곤(南袞)[1471~1527]이 곧은 정절을 지킨 데 감동하여 순창의 열녀로 상소하여 1514년 중종으로부터 정려를 하사받아 순창읍 하방정(현 순창교옆) 제방에 비를 세웠으나 1932년 경천 제방 공사로 금과면 호계정(虎溪亭)*으로 옮겨졌다.

이후 호계정이 소실된 후, 비석은 담양군 창평면 해곡(얼그실)마을 유문표의 묘 아래에 세워지게 되었다.

위 사실을 ‘순창향지사’ 회원들이 ‘순창향지 지명고’를 만들면서 알게 되어 문화 류씨 종친회의 허락을 받아 2000년 12월 13일 순창군청 앞으로 옮겼다.

2001년 1월 3일 원불교 순창교당 교도 회장을 하였던 김을덕(강성일 前 순창읍장의 어머니)씨가 정성스럽게 제사상을 차려 ‘향지사 회원’들이 예를 올렸다.

「열녀 간아지」는 조선 시대에 가장 강조하던 유교적 덕목이었던 ‘충, 효, 열’의 열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열녀조를 중심으로 열녀의 유형을 살펴보면 수절(守節), 여묘(廬墓), 위난(危難), 봉양(奉養), 자살(自殺) 등으로 구분되는데, 「열녀 간아지」는 ‘수절’에 속하는 열녀담이다.

간아지는 관비임에도 불구하고 한번 지아비로 모신 사람을 위해 평생을 수절하였고, 그가 죽은 후에는 3년 거상도 정성스럽게 하였다.

이에 조정으로부터 정려비도 내려 받았다.

「열녀 간아지」는 조선 시대에 강조하였던 유교적 덕목은 출신 성분이 무엇이든 간에 충, 효, 열 등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이야기이다.


[참고 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sillok.history.go.kr』
『전북의 정려, 충효열비』(전라북도, 2000)
『순창의 효열부』(순창 문화원, 2009)
『순창 군지』(순창 군지 편찬 위원회, 1983)
『순창의 전설』(순창 문화원, 1998)
『순창향지 지명고』(순창ㄴ향지사, 1998)



간아지비
/ 전예라(문화관광해설사)

석양빛 안긴 저 꽃여울
초연함으로 피어난 고독의 숨결일까
긴 세월 그 곁을 지켜온 저 노송
그날의 사연 알고 있는 걸까

화방재*에 든 달빛 바라보며
속고름 여민 듯 그리움 품은 채
부칠 수 없는 고백 빼곡히 적어놓고
울컥 피어나는 꽃마음에
붓끝 휘던 심장 소리

지아비의 뒷모습
응향지 * 노니는 뱃노래에 실어두고
연잎 스민 윤슬로 먹 갈아
하얗게 부푼 멍울 쓸어내며
오롯함으로 피워낸 가슴

극과 극의 닿음처럼
휘젓고 휘저어도 닿을 수 없는 공허
먹먹한 속가슴 채우지 못한 채
정절이란 이름으로 스러져 간
그 흔적마저 바랜 빗돌 하나.


* 하방정 : 군청 앞 응향당(凝香塘) 주변에 연꽃향이 그윽한 정자로 하방정으로 보는 견해와 순창 대교(大橋) 제방 아래의 하방정(河防亭)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 정문(旌門) : 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 그의 집 앞이나 마을 앞에 세우는 문. 붉은색으로 단장하고, 그 현액(縣額)에다 충신·효자·열녀의 직함·성명 등을 새기는데,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 유문표(柳文豹) : 순창의 훈도. 석헌(石軒) 유옥(柳沃)[1487~1519]의 아버지.
* 유옥(柳沃) : 유옥은 1501년(연산 7) 생원 3등, 1507년(중종 2)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509년(중종 4) 홍문관 수찬을 거쳐 무안 현감이 되었다. 이 해에 담양 부사 박상(朴祥), 순창군수 김정(金淨) 등과 함께 단경 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805년(순조 5)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순창 화산서원(花山書院)에 제향되었다.
* 사문(斯文) : 학문하는 선비.
* 유향(留鄕) : 수령이 비었을 때 좌수(坐首)를 말한다.
* 1등 : 문과 장원.
* 대중(臺中) : 사헌부.
* 귀근(歸覲) : 객지에서 부모를 뵈려고 오는 것.
* 유문표(柳文豹) : 유문표의 아버지인 생원 유인흡은 사육신의 한 사람인 유성원의 재종형인데 단종 때 사육신의 화를 당하여 세조 2년(1456)에 호남의 순창으로 내려와 살았다. 그 때 유문표의 나이 네 살 때 였다. 그로부터 유문표는 순창에서 성장하였으며 성년이 된 뒤에 담양 성주현씨 가에 장가들어 처의 고향인 담양 창평의 얼그실로 이거하게 되었다. 석헌(石軒) 유옥(柳沃)[1487~1519]의 아버지. 유옥은 1501년(연산 7) 생원, 1507년(중종 2)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509년(중종 4) 홍문관 수찬을 거쳐 무안 현감이 되었다. 이 해에 담양 부사 박상(朴祥), 순창 군수 김정(金淨) 등과 함께 단경 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유옥의 아들 유강항(柳强項)의 딸이 송강 정철과 혼인했다. 송강 정철이 유옥의 손녀사위인 것이다.
* 호계정(虎溪亭) : 석헌(石軒) 유옥(柳沃)의 고손인 유동유(柳東游ㆍ1615~?)가 640년(인조 18) 남계리 140에 지은 누정으로 1929년 중건했다. 누정 내에는 유동유의 형제인 어목당 유동순과 남간 유동연, 순창군수를 지낸 폄재 최온의 시가 현판으로 남아 있고, 동강 류한상 회장의 주련 4개의 글이 남아 있다.
* 간아지비 : 순창군법원 등기소 앞에 있는 비석(간아지;관비로 유문표의 첩).
* 화방재 : 응향지 수변에 있던 정자.
* 응향지 : 지금의 순창군청 앞에 있던 연방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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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좌로부터 김용석-양상화-박태호
2000년 12월 13일 순창향지사 양상화 선생은 박태호 씨와 김용석 씨와 함께 담양군 유문표 묘 앞에 있던 간아지 비를 김용석 씨 트럭에 옮겨 순창군법원·등기소 앞으로 정성스럽게 옮겼다.

ⓒ 순창신문---


↑↑ ▲ 순창향지사 회원들이 간아지비 앞에서 기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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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신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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