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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의 성황사城隍祠 · 사직단社稷壇 · 여단厲壇·충손단虫損檀이 어디에 있었을까?

순창의 성황사城隍祠 · 사직단社稷壇 · 여단厲壇 · 충손단虫損檀

2024년 10월 08일(화) 10:48 [순창신문]

 

ⓒ 순창신문---



순창군의 사직단 · 여제단 · 성황단 · 충손단이 어디쯤에 있었을까? 순창군지와 호남읍지 등 관련 기록들을 찾아보았다.

사직단 · 여제단 · 성황단은 3단의 하나로 관아에서 필수적으로 세우는 제단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국권을 상실하면서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망궐례를 중지시킨 후, 1907년 고종 때부터 점차 그 모습은 점차 사라져 갔다.

1933년 윤종림 尹宗林의조선호남지 朝鮮湖南誌에는 사직단 在郡西 廢· 여단 在郡北 廢 · 성황사 在客館西 廢로 기록되어 있다. 1932년 이전에 사직단 · 여단 · 성황사 모두 철폐撤廢 된 것으로 보인다. 1911년, 조선총독부는 사직단 제사를 폐지하라는 훈령을 내렸고, 1910~1930년대까지 각고을의 사직단 부지 및 사직단 소유의 국유림을 민간에 대대적으로 임대 또는 매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10년 10월 13일부로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 1932년 조선총독부 관유재산목록에는 성황사 부지만 확인된다.


사직단社稷壇
在玉川山 社主土稷主殼春秋分上戊日祭之

사직단은 옥천산에 있으며, 사직단의 신은 토지신과 곡식신으로 봄과 가을 무戊일에 제를 지낸다. 군의 서쪽 3리 옥천산에 있다(호남지 1935).

옥천산玉川山 은 순창여중과 도실원 뒤에 있는 산이다. 향교 뒤 오산烏山과 다른 오산鰲山이라 부른다. 오산鰲山을 옥천산玉泉山으로 기록하고 있다. 순창 사직단이 있었던 위치를 정확하게 찾을 수는 없지만 순화리 563번지 일대 네모진 토지로 추정하고 있다. 1916년 지적도를 보면 이 지역이 국유지로 되어 있는 직사각형 토지로 보인다. 경남시민문화네트’의 조현근 사무국장은 “사직단 터로 보이는 곳은 ”석축과 돌계단 흔적이 보이지만 대나무와 흙이 덮어져 있어서 육안으로 확인하기가 어렵다”라고 말하며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다시 확인해 보기를 권했다. 이곳은 순창여중에서 서북쪽으로 오산(鰲山) 9부 능선에 있다. 비변사인방안지도 호남지도 순창군 지도를 보면 사직단은 순창여중 뒷산인 오산鰲山 산 능선에 홍살문과 함께 표시되어 있다. 금산록에는 여단이 표시되어 있다.

1968년 ‘순창군지에 우리 고을에는 서편의 대실등에서 북향하여 헌납암獻納巖편으로 내려오면 중턱(현재 밭이 되어 있음) 왼편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57년 순창군지에도 사직단이 지도에 그림으로 표시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사직 제도는 옛 중국에서 가져온 것이다. 기록에는 고구려시대(392년, 고국양왕 9)에 국사(國社)를 세웠다는 기록과 신라시대(783년, 선덕왕 4)에 사직단(社稷壇)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991년(성종 10) 개경 서쪽에 처음으로 사직단을 조성하였다는 기록 등이 전한다.

순창에 사직단이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474년에 간행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의하면 “사직단은 정4각형의 평면으로서 한 변의 길이는 2장 5척, 즉 25척이고 높이는 3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없어져 현재는 유지(遺址) 표시조차 없다.


여제단厲祭壇
北5里 錦山 東麓 春秋祭之慰厲鬼

여제단은 군의 북쪽 5리 금산 동쪽 기슭에 있으며,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어 여귀厲鬼(원귀)를 위로한다(순창군읍지 1830).

순창에 역병이 돌았을 때 관 주관으로 고을의 수령들이 6방을 대동하고 여제단厲祭壇에서 제사를 지냈다. 더욱 나은 환경과 미래엔 더 좋아지기를 기대하는 군민들의 공동체 의식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1400년(정종 2) 조정에서 각 주현州縣에 지시하여 여제단을 설치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순창군에도 이때를 전후하여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순창군의 여제단은 성황단, 사직단과 함께 3단의 하나로 관아에서 필수적으로 세우는 제단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그 모습은 사라졌다. 비변사인방안지도와 호남지도 순창군 지도를 보면 금산 날망에 홍살문과 함께 표시되어 있다. 금산 아래 공동묘지 부근 3부 능선과 8부 능선 두 군데에 있는 기우제 터가 혹시 여단일 가능성도 배재할 수는 없다. 3부 능선에 있는 것이 여단이고 8부 능선에 있는 것이 우리 고장의 신우제神雨祭터가 아닌가 추정해 본다. 1968년 순창군지에는 지금 ‘금산 밑에 있는 절 있는 데서 막굴로 넘어가는 부시재 날망이를 타고 올라가면 여제등 이라고 하는 데가 있었으니 악족惡族이 유행하면 수령이 6방 관여와 군민과 함께 이곳에 와서 제를 지냈다’라고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또 ‘한발旱魃시에는 신우제神雨祭를 지내고 장마 때에는 청우제晴雨祭를 지냈다’라고 기록하였고, ‘지방 장관이 제주를 맡았으며 제물은 술 과실 떡 밥 포 등으로 올리고 때로는 무녀巫女의 가무歌舞도 있었다’라고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이곳은 현재 임시 건물이 지어져 있고 지난 2019년까지 신기가 든 마을 사람과 타지에서 온 무당이 이곳에서 공을 들였다고 한다.


충손단虫損檀
在邑後錦山南 麓而本邑爲一道之中故或道虫損之時則巡使道親行析 奈

충손단은 읍의 뒤쪽 금산 남쪽 기슭에 있으며, 본 읍은 한 도의 중심에 있어서 혹시라도 충손이 발생할 때는 순찰사가 직접 와서 조사한다(순창군읍지 1830).

민가에서는 현 충신당에 있었던 충손당에서 제를 지냈다고 한다. 긴 칼 모양으로 순창읍을 향하고 있는 환도산(현 대동산)을 바라보며 화기를 잠재우고, 벌레로 인한 전염병을 막기 위한 제사였다. 일제강점기 경천이 범람하여 수많은 이재민이 생기자 충손단이 있는 이곳 일명 충신당蟲神堂으로 이주시켜 충신리가 됐다. 1600년 경 순창향교가 이 마을 에 있었고, 향교 뒤편에 충신당蟲神堂이란 제당을 만들어 벌레를 없애달라고 신에게 제사지냈다. 충손당 근처 순화리 88번지는 순창향교 구비舊碑와 단壇과 석石이 발견되어 옛향교터는 확인되었다.

충손단虫損檀이 있어서 충신당虫損堂으로 불린다. 1958년 순창군지명조사철에는 ‘신라시대 마을 중앙에 순창 남원 담양 세군수가 합동하여 충손당을 건립하여 놓고 이 충손단에서 매년 농절기에 세군수가 합동하여 제병충해를 없애달라고 충손제를 지내였기에 충손당이 충신리로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순창향지 지명고에는 ‘벌레가 극심하여 벌레를 없애달라고 제사하였다고 전한다. 이곳으로 이주온 주민들이 벌레충 蟲자를 쓸 수있느냐는 의견에 따라 나라에 충성하고 신의에 사는 마을이 되자는 뜻에서 충신리忠信里라 정했다’고 한다.

1916년 지적도를 보면 순창군 순화리 732번지에 사社로 적혀있다. 순창군지와 호남읍지를 보면 충손단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순창읍지에 성황사는 서 1리이고, 여제단은 북 5리라고 적혀있고, 이곳은 관아에서 직선거리로 500여m에 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강천사와 연대암이 매매되고 난 후 이 일대 현재 순창 가정연합교회와 그 밑에 있는 실상암 소유 땅과 서쪽 도로부지가 강천사 포교당으로 만들려고 했던 곳이다.


성황사 城隍祠
在客館西 高麗文良公薛公儉 德業威望之以镇眼一方 神低對鸟

성황사는 객관 서편에 있다. 고려 문량공 설공검의 덕업과 위엄이 한 지역의 맥을 진압하니, 신으로 공경하고 제사를 받드니 성황의 주신이 되었고 지금까지 제사를 지낸다. (옥천군지 1760)

순창 성황사 城隍祠는 1214년(고려 고종 1)부터 순창의 성황신에게 제사 지냈던 국제 관사로 순화리 442번지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지적도를 보면 순창군 순화리 442번지에 사(社)로 적혀있다. 1991년 향토 문화연구, 민속 사료 조사 발굴, 지역 사회발전을 목표로 세운 옥천문화사회연구소에서 고문서 팀(팀장 양상화)과 민속자료발굴팀(팀장 조규동)을 운영하면서 1992년 순창성황대신사적현판을 발견하면서 성황사의 흔적을 찾았다.

당시 순창군지에 성황사 기록으로 옥천동을 수소문한 결과 옥천동에 사는 우재일 씨로부터 성황사가 1940년까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성황당이 헐리게 되자 순창설씨 후손 설태수씨가 성황당에 모셔져 있던 성황대신사적현판과 남신상을 수습해 돌아오면서 남신상은 금과면 내동리 산83번지 선산에 묻고 현판은 동전 평산제에 보관했다. 이후 고문서 팀인 노민씨에게 친구인 도실 계원이 금과 동전 평산제에 현판이 있다는 전화를 받고 노민씨와 친구가 평산제에 못으로 박혀있는 현판의 못을 빼고 승용차에 실어 사무실로 가지고 온 것이다. 승용차에서 내린 현판을 조규동 팀장이 2층 사무실로 옮겨온 것이다.

옮겨온 현판은 당시 설씨문중(종친회장 설명환)의 허락으로 순창군 소유로 이전하여 순창장류연구소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도실 계원들은 1957년 2월 7일에 15명이 보은계를 만들었다. 보은계원들은 효도문화와 향토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매년 5월 8일에 부모님을 모시고 효도 잔치를 펼쳐주었으며, 회원들은 향토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옥천 향토 문화사회연구소 순창사무소 창립 주축회원들이 이들이었고, 담양 창평 유문표묘역으로 이전해 간 간아지 정려비를 순창군청 앞으로 옮겨 오고 순창향지사에서 만든 순창향지 지명고를 만드는데 회원 대부분이 참여했다.

/ 정리 남융희 기자


출처
순창향지 지명고 1998
옥천군지 1760
순창군읍지 1830
호남읍지 1859
조선호남지 1933
호남지 1935
조선시대 객사 행례와 안성 망궐례 재현 / 조순자
조선시대 고을 사직단의 경관 구성과 복원 방안 / 전종환
조선총독부 관유재산 목록 1933년 / 일본 공문서관 아시아 역사자료센터
블로그 http://panzercho.egloos.com/11414083
인터뷰 : 박봉옥, 선재식, 조현근


↑↑ 사직단 성황사 여단 환유첩_순창 국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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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황사 - 순창읍교회 지적도 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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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순창군 관아 고증자료 1932년 소와 78년 - 조선총독부 관유재산 목록 기록물- 일본 공문서관 아시아 역사자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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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손단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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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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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우제 터 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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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재일-조규동-양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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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융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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