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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순창군 종교사 / 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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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구석 문화 · 유적 톺아보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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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7월 10일(수) 14:01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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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순창읍교회 1920년대 / 사진 제공 김은희 | ⓒ 순창신문--- | |
순창군은 전주 선교부와 멀리 떨어져 있어 가까운 광주 선교부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예수교장로회 대한로회(독로회)시절부터 전라노회, 전남노회 광주 선교부 소속이었다가 1948년 전북노회로 이관됐다.
1896년에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는 전라남도의 중심지인 나주에 선교부를 설립했으며, 이곳에 선교부를 설치한 것은 선박이 왕래하기 좋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1897년 배유지 선교사와 하위렴 선교사는 나주성 안에 임시숙소를 마련하고 성(城) 외곽에 선교지를 구입하여 전도를 시작했으나, 나주 유생들의 강한 반발로 인해 선교사들은 나주를 떠나 개항을 준비하고 있던 목포로 이동했으며, 목포 선교부를 개설했다.
그리고 남장로교 선교부는 배유지 선교사와 오 원(C.C. Owen) 의료선교사를 목포에 파송했다.
두 선교사는 전남의 내륙지방인 나주, 장성, 화순, 보성, 순천, 광양 지방을 다니며 선교활동을 했으며, 1904년에는 광주 선교부를 개설하고, 배유지, 오 원 선교사가 광주에 정착했다. 배유지 선교사는 담양과 순창을 오가며 교회를 설립했으며, 1910년에는 타마자 선교사가 광주 선교부에 배치받아 선교활동을 하다가 1912년 8월 담양에 정착하여 순창과 담양지방을 관할했다.
순창지역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교회는 1902년 반월리 교회(복흥면 소재)다. 배유지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하창수가 믿기 시작하여 열심히 전도한 결과 100여 명의 신자가 생겨나 1902년 반월리 교회가 설립하게 된 것이다. 1918년 반월리 교회에서는 선교사 도대선의 진정한 헌신으로 교회가 활성화되고, 신창윤 어린이의 신앙이 기초와 본보기가 되어 교회가 더욱 발전했다.
두 번째로 1907년 순창군 쌍계리 교회가 세워졌다.
1907년 쌍치면 쌍계리에 기독교가 들어왔으며, 미국 남장로교 배유지 裵裕祉(E. Eell, 1868~1925) 선교사가 조사 변창연, 조석일 등의 전도로 30여명의 신자에 달하자 1907년 쌍계리 교회를 세우면서 시작됐다.
1907년을 기점으로 성령 운동이 평양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쌍계리 교회는 1912년 8월부터 순창지역 선교를 담당했던 타마자 打馬子(J.V.N. Talmage, 1884~1964) 선교사가 신자들과 함께 1912년 예배당을 신축했다.
역대 교역자로는 배유지, 타마자, 우월순, 도대선 등 선교사와 김순경, 고려위, 허화준, 노병헌 조사들이 이어서 시무했다.
1940년에 타마자 선교사가 일제 경찰에 의해 미국 간첩으로 몰려 추방당하였으며, 이에 따라 쌍계리교회는 문을 닫게 됐으나, 1953년에 김판기 집사를 중심으로 교회가 재건됐다.
쌍치교회는 2017년 9월 23일 쌍계리교회 설립 110주년 창립기념식을 갖고 장로 장립 및 권사 취임식과 더불어 지나온 역사를 이어갔다.
쌍계리 교회는 1907년 배유지 선교사가 신자 30명과 함께 개척 설립해 1912년 예배당을 신축하면서 교회의 역사가 시작됐다.
이후 1940년 당시 타마자 선교사가 미국의 간첩이란 죄목으로 일제 경찰에 의해 추방되며 일경의 감시에 견디지 못해 결국 폐쇄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해방 이후에도 목회자가 없어 재건하지 못 했으나,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김판기 집사를 중심으로 재건하고 순창읍교회 당회장이었던 송상규 목사와 신삼석 목사 등에 의해 교회는 계속 안정과 발전을 이어왔다.
1967년 교회당을 신축했으며, 이후 신자를 비롯해 지역주민들과 함께해 온 교회는 1990년 현 교회 건물을 신축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순창신문 2017.9.27)
1908년 순창군 구룡리 교회가 세워졌다.
이전에는 천주교인(라마교인)인 변상순, 박성탁 등이 장로교(야소교)로 믿은 후 전도인 고인수와 협의하고 집을 사서 예배당으로 사용하며 전도하여 교회가 조금 발전하였으나, 중간에 퇴보됐다.
김여홍, 변상순이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사 도대선(Samuel K. Dodson), 조사 김순경, 고리위, 이영희, 김세열 등이 차례로 인도하여 교회가 유지됐다.
당시 팔덕면 덕천리에는 1840년경부터 천주교 신자들의 옹기마을로 1970년까지 생산하였으며, 가마가 있던 자리는 집과 밭이 됐다.
덕천리 덕천분교 옆에 있는 이 옹기공장은 길이 30cm에 900여 자리의 대포 가마가 있었으며, 20여 대의 물레로 생산하여 가구별로 차례로 돌아가며 번조했다.
점토는 순창군 유등면, 풍산면, 금과면 등지에서 사들였다고 전해진다.
1908년에는 쌍치면 금성리 교회가 세워졌다.
1908년에 조석일(趙碩逸) 전도인을 중심으로 쌍치면 금성리 교회가 세워졌다.
1908년 이전에는 배유지 선교사가 파송한 전도인 조석일의 전도로 100여 명의 신자가 1년간 기와집을 무상 임대하여 예배를 드렸다.
배유지(유진 벨 Eugene Bell) 선교사는 구한말 한국선교를 위해 1896년 목포에 도착하여 선교활동을 하다가 본격적인 선교활동에 나서기 위해 1904년 광주로 이동하여 수피아여고, 숭일학교, 광주 제중병원(광주기독병원)을 설립하는 데 이바지했을 뿐만 아니라, 순창지역을 포함한 전남노회 초기선교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1910년에는 김창식, 김우근의 처 서기화 등이 앞장서서 일반교인들과 함께 예배당을 신건했다. 김우근은 광양군수이고, 김창식은 김우근의 둘째 아들 지산(芝山) 김영무(金英武)를 양자로 삼았다.
1912년 이후에는 선교사 타마자, 조사 변창연, 하창수 등이 계속 시무했으며, 1923년에는 피노리 교회에서 순창지역 최초로 장로 1인이 장립 되기도 했다.
또, 금성리 교회는 궁벽한 산골에 제대로 학교 공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청소년들을 교육하기 위해 영흥학교를 설립하여 새로운 교육을 제공했다.
1920년에는 학교를 확장하여 기독 영흥학교라고 칭(稱)하고 박대권, 손책남, 이영휴 등의 교사가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1938년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제는 금성리 교회와 기독 영흥학교를 폐쇄해 버렸다.
1953년 칠보교회에서 수요일 밤 예배를 인도하던 이승길 전도사에게 한 여인이 찾아와 일제에 의해서 고향의 금성교회가 폐쇄되어 아직도 회복되고 있지 않으니, 교회를 재건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쌍치 지역의 치안도 점차 안정되자 이승길 전도사는 전주 선교부에 건의하여 전에 신앙생활 하던 여덟 가정을 찾아가 금성교회를 재건했다.
교인들이 점차 모여들게 되자 1954년 김원길 전도사가 부임하여 교회를 새롭게 신축하고 옛 면모를 다시금 회복시켰다.
1913년 3월 3일 순창읍 교회가 세워졌다.
이전에는 옥천동(순화리)에 이사라와 그의 아들 박삼수가 함북지경에서 전도를 듣고 믿음 생활을 하다가 남편 박성희가 독립운동을 위해 연해주로 떠나자 순창으로 돌아와 신앙생활을 한다.
백병택은 광주병원에서 배유지 선교사의 전도를 듣고 믿은 후에 이사라, 박삼수 등과 힘을 합쳐서 전도한 결과 1913년 3월 3일 순창읍교회가 성립된다. 이는 1912년 8월부터 타마자 선교사의 선교구역이 순창으로 순창읍교회 성립에 타마자 선교사의 도움이 있었다.
이후 1913년 초옥 7칸을 매수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했으며, 1918년에는 순창읍교회 당회장인 타마자 선교사 이름으로 등기했다.
1928년에는 순화리 153번지로 신축 이전하고, 타마자, 고려위, 김세열, 이영희, 이병열, 김주환, 박문익, 최영주, 한종구, 유기섭 등이 계속해서 시무를 이어갔다.
1921년 순창읍교회에서는 사회교육과 복음 전파를 위한 사역의 일환으로 신명학원을 운영했다. 이후 ‘신명여자의숙’으로 바뀌었다. 이 학원은 4년제 간이 보통학교로 생활이 어려운 청소년들이 다녔다.
순창읍교회 초대 장로였던 이해동 장로가 원장을 맡아 수고 했다.
이해동 장로는 연합의학교(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전주 예수병원에서 활동하다가 순창에 해동의원을 개설하고 진료에 임하면서 순창읍 교회에 출석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되었으며, 초대 장로가 됐다.
또, 사회적 경제적 제약과 교육 기회도 부족한 순창 여성들의 교육과 계몽을 목적으로 저녁 시간에 야학을 운영했다.
이봉순은 광주수피아여학교 출신으로 한글을 모르는 부녀자들을 모아놓고 타마자 선교사 부인과 함께 야학운동을 실시했다.
이는 남녀평등을 위한 중요한 발판을 마련한 것이며, 사회적 지위 향상과 더 나은 삶을 위한 기회를 제공하고자 했다.
1920년 1월 3일 설만옥 장로의 도움으로 내동교회가 성립된다. 설만옥 장로는 노란 서양인 두 명과 두루마기 입은 한국 남자가 모여서 나팔 같은 악기를 불고 “야소 천당 야소 천당” 하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야소님을 믿으세요” 했다고 한다. 아마 배유지, 타마자 선교사와 이영희 조사로 추정된다.
1920년, 전(前)에 금과면 내동마을에서 예배를 드리려면 순창 예배당까지 왕복 4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추운 겨울에는 짚신 신고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에 교회 가기가 너무 험준했고, 삼일 밤 기도나 새벽예배를 참여할 수 없어서 내동마을에서 예배를 보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순창예배당에서 배운 찬송가와 조사님들 기도의 말씀을 기억하며 “야소 천당!, 야소 천당! 우리도 구원해주소서...” 하면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1936년 관보에 조선아소교장로회 순창군내 포교소 현황에는 순창읍 교회(1913년), 반월리 교회(복흥면 소재 · 1902년), 금성리 교회(쌍치면 소재 · 1908년), 건곡리 교회(유등면 소재 · 년도 미상 1936년 이전설립으로 관보에서 확인 가능), 외이리 교회(유등면 소재 · 1922년) 기록이 있다가 1942년에 건곡리 교회가 폐지되고, 1942년에는 유정리 교회(풍산면 소재 · 1942년)가 설립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 관보 · 대한예수교장로회 사기 · 기독교 장로회 사진명감 · 전북지역 개신교 초기 교회에 형성과 그 전개 과정에 대한 연구(1999년 정옥균) 논문 호남기독교 백년사 · 기독교사상(교회와 목회 2015년 9월호) · 순창군 지명조사철 1959년 · 한국기독교 장로회 교회총람 · 순창군지 1968년 1982년 · 순창군세 일반1928년.
/ 정리 = 남융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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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순창주일하교 여자부 우승기 1937년 6월 16일 / 사진제공 김은희 | ⓒ 순창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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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금과 내동교회 셰례식 - 사진 제공 설동화 | ⓒ 순창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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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순창예배당 1930년대 / 사진제공 박승순 | ⓒ 순창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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