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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원, 제26회 삼인문화 기념행사 성료

박상· 김정 · 류옥, 삼 선생의 충절을 새기다

2022년 08월 31일(수) 10:10 [순창신문]

 

↑↑ ▲ 삼인문화제 행사를 마치고 행사를 준비한 순창문화원 회원들과 옥천골취타대 단원들, 최영일 군수와 오은미 도의원 신정이 군의장이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 순창신문



순창문화원(원장 최길석)이 주관한 ‘제26회 삼인문화 기념행사’가 지난 24일, 삼인대 경내 일원(강천산 소재)에서 펼쳐졌다.
군(군수 최영일), 군의회(의장 신정이), 강천산삼인대 보존회(경주 김씨 · 충주 박씨 · 문화 유씨 문중),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중종왕자파 동종회, 정릉봉양회, 거창신씨 대종회가 후원한 이날 기념행사는 조선 중종 때 폐위된 단경왕후 신 씨의 복위를 위해 대의를 지키고자 했던 순창군수 김정, 담양부사 박상, 무안현감 류옥 등 삼선생의 선비정신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마련됐다.

이날 행사는 최영일 군수, 신정이 군의장, 오은미 전북도의원, 최길석 원장, 박종률 삼인대보존회장, 나종우 전북도문화원연합회장과 도내 14개 시·군 문화원장, 삼인대 관련 5개 종중 대표 등 200여 명이 함께했다.

↑↑ 최길석 문화원장

ⓒ 순창신문



최 원장은 대회사를 통해 "오늘 뜻 깊은 행사를 축하해 주시기 위해 참석하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1994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삼인문화 기념행사는 코로나19로 인해 지난 2년간 개최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있지만, 오늘 행사를 계기로 다시 마음을 다잡아 선현들의 선비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최영일 군수는 기념사에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 삼이대 3선생의 도덕적 윤리관을 순창의 유교 정신문화 표상으로 후대에 전승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계시는 관계자 여러분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며 “지금부터 507년전 순창군수 충암 김정, 담양부사 눌재 박상, 무안현감 석헌 류옥 3선생께서 억울하게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 복위상소를 올리면서 소나무에 관인을 걸고 서로의 결의를 맹세했던 이 곳 삼인대는 그분들의 죽음을 각오한 절의 정신을 대대로 전해주는 상징이 되어 왔다”고 밝혔다.

신정이 의장은 축사를 통해 “상소문에 박상 선생과 김정 선생 두 분만 들어가 있고 류옥 선생은 빠져있다. 류옥 선생은 외아들로 신상의 문제가 있을 때 노부모를 모실 사람이 없어 두 선생의 간곡한 만류로 뜻을 같이하되 류옥 선생의 이름은 상소문에서 뺐다. 이는 3선생의 충절과 효심이 가득한 대목이다” 며 “삼인대 신씨복위 상소문은 기묘사화보다 4년 앞선 사건으로 사림의 현실 참여의 단초가 되었다”고 강조했다.

박종률 삼인대보존회장은 축사에서 “정암 조광조 선생은 언로가 통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언로가 막히면 나라가 망하는 법이라 했으며 신씨 복위 문제는 훈구세력이 신진사류를 제거하는 기묘사화의 발단이 된다” 며 “삼 선생은 정의로운 정신과 신념을 갖고 행동했으며, 진정한 정의는 만고불역이라 절대로 꺽이지 않는다는 실증을 우리 후손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오늘은 사는 우리들도 선조님들의 숭고한 의리 정신을 본받아야 겠다”고 당부했다.

한편, 행사가 펼쳐진 ‘삼인대’는 김정, 박상, 류옥 삼선생이 1515년에 죽음을 각오하고 억울하게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위해 소나무에 관인을 걸고, 상소를 결의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영조 20년인 1744년 4월에 홍여통, 윤행겸, 류춘항 등 당시 순창의 선비들이 발기하여 대학자인 이재가 비문을 짓고, 민우수가 비문의 글씨를 썼으며, 유척기가 전서를 써 비석과 함께 비각을 세웠다.

↑↑ 옥천골 취타대

ⓒ 순창신문




↑↑ ▲ 눌재 박상 (자료 전남대학교 도서관)

ⓒ 순창신문



◈ 박 상 (朴祥 · 1474 ~ 1530)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 박광리(朴光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선천 군수 박소(朴蘇)이고, 아버지는 진사 박지흥(朴智興)이며, 어머니는 생원 서종하(徐宗夏)의 딸이다.

1496년(연산군 2) 진사가 되고, 1501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로 보임 받고, 박사를 역임했다.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병조 좌랑, 사간원 헌납, 담양 부사, 순천 부사, 나주 목사를 지내고, 1505년 외직으로 전라도사(全羅都事)를 지냈다. 1506년 중종 초, 사간원 헌납이 되어 종친들의 중용(重用)을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되었으나, 태학생(太學生)과 재신(宰臣)들의 상소로 풀려나왔다.

1년 동안 논쟁이 그치지 않아 전관(銓官)에게 미움을 사서 한산 군수로 좌천됐으나, 사헌부가 대간(臺諫)을 외직에 보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논핵(論劾)하여 곧 종묘서영(宗廟署令) · 소격서영(昭格署令)으로 옮겼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임피현령(臨陂縣令)으로 나아갔다.

3년 만기가 되자 사직하고 광산으로 돌아가 글을 읽으면서 스스로 즐겼다. 1511년(중종 6) 수찬 · 응교를 거쳐 담양 부사로 나아갔다.

1515년 순창군수 김정(金淨)과 함께 상소해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愼氏)의 복위를 주장했다. 또 박원종(朴元宗) 등 3훈신(勳臣)이 임금을 협박해 국모를 내쫓은 죄를 바로잡기를 청하다가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남평(南平)의 오림역(烏林驛)으로 유배됐다.

1516년 방면돼,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 · 장악첨정(掌樂僉正)을 역임, 이듬해 순천부사가 되었으나 그해 겨울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했다. 1519년 선공감정(繕工監正) 등을 지냈다. 1521년 상주와 충주의 목사를 지내고, 만기가 되자 사도시부정(司䆃寺副正)이 됐다. 1526년 문과 중시에 장원하고 이듬해 작은 죄목으로 나주 목사로 좌천되었고, 당국자의 미움을 사서 1529년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됐으며, 성현(成俔) · 신광한(申光漢)·황정욱(黃廷彧) 등과 함께 서거정(徐居正) 이후 4가(四家)로 칭송된다.

또한, 조광조(趙光祖)는 박상의 1515년 단경왕후 신씨 복위 상소가 강상(綱常)을 바로잡은 충언이었다고 극구 칭찬했다. 저서로는 『눌재집(訥齋集)』이 있다.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됐으며, 1688년(숙종 14)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출처 : 다음 지식백과사전.


◈ 김 정(金淨 ·1486 ~ 1521)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冲菴)·고봉(孤峯). 보은 출신. 김호(金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처용(金處庸)이고, 아버지는 호조정랑 김효정(金孝貞)이며, 어머니는 김해허씨(金海許氏)로 판관(判官) 허윤공(許允恭)의 딸이다.

1507년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보임되고, 수찬(修撰)·병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으로 옮겨졌다.

이어 병조정랑·부교리(副校理)·헌납(獻納)·교리·이조정랑 등을 거쳐 1514년에 순창군수가 됐다.

이때 왕의 구언(求言: 정치에 도움이 되는 말이나 글)에 응해 담양 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중종 때 억울하게 폐출된 왕후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고, 아울러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됐다.

이때 권민수(權敏手)·이행(李荇) 등은 이들을 엄중히 다스릴 것을 주장한 반면, 영의정 유순(柳洵) 등은 이에 반대했고, 조광조(趙光祖)도 치죄를 주장한 대간의 파직을 주청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대간 사이에도 대립이 생겼고, 둘 다 옳다는 설까지 제기됐다.

1516년 석방되어 박상과 함께 다시 홍문관에 들고, 권민수와 이행의 파직으로 마무리됐다. 그것은 곧 중앙 정계에서의 사림파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 뒤 응교(應敎)·전한(典翰)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사예(司藝)·부제학·동부승지·좌승지·이조참판·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됐다.

이러한 정치적 성장은 괄목할 정도였는데, 그것은 당시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 것이었다.

기묘사화 때 극형에 처해지게 됐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옹호로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그 뒤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림파의 주축인 생존자 6인과 함께 다시 중죄에 처해져 사사됐다.

1545년(인종 1) 복관 됐으며, 1646년(인조 24) 영의정에 추증됐다. 3세에 할머니 황 씨에게 수학하기 시작했고 20세 이후에는 최수성(崔壽峸)·구수복(具壽福) 등과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관료 생활을 하면서도 성리학에 대한 학문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시문에도 능했으며 새·짐승 등의 그림도 잘 그렸다.

일찍이 사림 세력을 중앙 정계에 추천했고, 조광조의 정치적 성장을 뒤에서 도왔다. 그 뒤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대표적인 존재로서, 그들의 세력 기반을 굳히기 위해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적극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개혁 정치를 폈는데, 그 일환으로 미신 타파와 향약의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僞勳削除) 등을 추진했다.
제자로는 김봉상(金鳳祥) · 김고(金顧) · 최여주(崔汝舟) 외에 조카인 김천부(金天富) · 김천우(金天宇) 등이 있다.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등에 제향됐다.
저서로는 충암집(冲菴集)이 있는데, 여기에 실린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은 기묘사화로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견문한 제주도의 풍토기이다. 시호는 처음에는 문정(文貞)이고, 나중에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

-출처 : 다음 지식백과사전.

ⓒ 순창신문



◈ 유 옥 (柳沃 · 1487 ~ 1519)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계언(啓彦), 호는 석헌(石軒). 유면(柳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인흡(柳仁洽)이다. 아버지는 순창훈도(淳昌訓導) 유문표(柳文豹)이며, 어머니는 현맹인(玄孟仁)의 딸이다.

고향은 창평이나 할아버지가 사육신의 한 사람인 유성원(柳誠源)과 6촌이었으므로, 화를 면하기 위해 호남으로 이사하였다. 1501년(연산군 7) 생원이 되고, 1507년(중종 2)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1509년 홍문관 수찬을 거쳐 이듬해 무안 현감이 됐다.
이때 담양부사 박상(朴祥), 순창군수 김정(金淨) 등과 연명으로 단경왕후(端敬王后)주 01) 신씨(愼氏)의 복위를 청하고, 아울러 신씨를 폐위시킨 훈신(勳臣)들의 죄를 규탄하는 소를 올렸다.

또, 장경왕후(章敬王后)주 02) 윤씨(尹氏)가 원자를 낳은 지 7일 만에 죽자, 소생이 있는 빈(嬪) 박씨(朴氏)가 정비(正妃)가 될 경우 원자가 위험할 것으로 판단하여, 박씨가 정비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이에 박상과 김정은 유배되었으나, 유옥은 정광필(鄭光弼)의 도움으로 화를 면했다.

1515년 사헌부장령, 1517년 함경도평사를 거쳐 이듬해 의정부사인이 되었다. 이때 경연(經筵)에서 삼대(三代)의 정전제(井田制) 대신 우리의 형세에 맞는 한전균전제(限田均田制)의 실시를 주장했다.

1518년 남곤(南袞)의 미움을 받아 종성부사로 전출됐다. 아버지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영암의 월출산(月出山)에 기도해 태어난 유옥은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신동으로 불렸다. 장성해 문무를 겸비했으나 젊은 나이로 요절해 대신들도 애석했다.

1805년(순조 5)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제향됐다. 저서로는 『석헌집』이 있다.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유옥(柳沃))]


↑↑ ▲해마다 삼인문화제를 관람하러 방문한다는 문화 유씨 후손들.

ⓒ 순창신문




순창 삼인대 (淳昌 三印臺)

순창 삼인대(淳昌 三印臺)는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에 있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비각(碑閣)이다. 1973년 6월 23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됐다.
삼인대는 조선 중종 10년(151년)에 폐비 신씨의 복원을 주창하는 순창군수 김정, 담양부사 박상, 무안현감 류옥의 행적을 기념하기 위한 비석과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작은 건물이다.
폐위된 연산군의 처남으로 중종반정 때 피살된 좌의정 신수근의 딸인 폐비 신씨는 후환을 염려한 반정공신 박원종 등에 의하여 폐출됐다.

↑↑ ▲삼 선생 직인을 소나무에 거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 순창신문



그 후 새 왕비가 된 장경왕후 윤씨가 사망하자 이 세 사람은 각자의 직인을 소나무 가지에 걸고, 관직에서 물러남은 물론 죽음을 각오하고, 신씨의 복위 상소를 올렸다. 후에 유림들은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비와 함께 비각을 세우고 삼인대라고 불렀다. 삼인(三印)이란 세 개의 인장이라는 뜻이다.

남융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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