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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계(愚溪)마을
내월초등학교 뒷산 해발 200m 고지의 산에서 동쪽으로 박환하여 뻗어오다가 동북쪽으로 역룡하여 섬진강변까지 뻗어 산진하니 우계마을의 주산이다. 그리고 지내마을 뒷산이 역시 동북쪽으로 뻗어 섬진강의 완궁하는 곳까지 이르니 우계마을의 백호등이면서 안산(案山)이다.
이 마을을 우계라고 부른 것이 어느 때부터인지 알 수 없으니 속칭 웨기라고 부른다. 그러나 원래는 월곡리(月谷里)였다. 그것은 마을 후룡의 형상이 반월(半月) 형상이어서 월곡리라 하였는데 어느 때 어느 대사인지 분명하지는 않으나 대사의 말이 월곡리라 하지 말고 웨기라 불러야 마을에 대환을 면할 수 있다고 하여 그렇게 부른 것이 한자로 표기하면서 우계(愚溪)가 되지 않았나 하고 말을 한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월곡이었기에 내적의 ‘내’자와 ‘월’자 합하여 내월리라고 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근대에까지 월곡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느 때에 웨기라 하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며, 어느 대사의 말이라면 반별로는 운진하였기에 마을형상을 와우(臥牛)로 보고 소의 터라는 말로 우기(牛基)가 웨기로 변하였지 않나 생각된다.
그것은 마을 안산에 옛날에는 좌망정(座望亭)이 있었고 그후 만초정(蔓草亭)이란 정자를 지은 것으로 미루어 와우형상이 분명하므로 우기라고 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시목(柿木)마을
내월초등학교 뒷산 해발 200m 고지에서 북쪽으로 역룡하여 뻗어가다가 끊어질 듯 결인하여 다시 솟아오르니 해발 200m의 산이 솟았으나 섬진강에 가로막혀 더 가지 못하고 다시 동남쪽으로 박환하여 머무르니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시목이라고 한다.
이곳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오랜 옛날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감나무가 많이 서있는 곳에 집을 지으면 부자가 된다고 하는 어느 풍수사의 말에 따라 집을 지어 부자가 되자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감나무골이라 불러왔다.
근대에 와서 한자표기를 하면서 감나무 ‘시’자를 써서 시목(柿木)이라고 하였다.
내적(內赤)마을
인계면 둔기마을과 경계를 하고 있는 해발 365m의 산을 쉰산이라 부른다. 두류봉에서 인계면과 계속 경계를 하고 오다가 이 산부터 적성면을 이루고 있는 성면의 주산이라고 할 수 있는 당당한 산이다.
이 산에서 동남쪽으로 대간룡으로 뻗어내리어 적성면 각 마을을 이룩하고 중간지점에서 동쪽으로 박환하여 내려와 마을이 형성되었으니 내적(內赤)마을이다.
이곳은 두료봉 아래 대각산에서 내려온 맥이 내월초등학교 뒤에서부터 마을을 감싸고 남쪽으로 산맥이 흐르니 이 마을의 청룡등이면서 안산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마을 사방이 산으로 둘러있는 아늑한 마을이다. 원래 이 마을을 안적성이라 불렀다. 안적성이란 적성의 안쪽이란 말이다.
이곳은 백제 때는 낙평현(樂坪縣)이고 고려 때는 순창군의 속현인 적성현(磧城縣)으로 이 마을이 현의 소재지로서 적성현의 안쪽이란 말이 아니라 기운찬 적성현이란 말로 안적성(岸磧城)이란 말이었을 것이다.
안(岸)은 웅걸(雄傑)이란 말로 쓰며 다른 지명에도 안(岸)이라 쓴 곳이 있다.
따라서 안적성이라고 하니 내적이라 하였으나 ‘적’자도 적(磧)이라 써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여하간 현이 있었기에 많은 유적이 있으련만 많은 세월에 흔적이 없고 1914년 일본인들의 지명 없애기에 의하여 내월리(內赤里)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농소(農所)마을
내월초등학교 뒷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리다가 동남쪽으로 돌아 앉으면서 산진수회(山盡水回)한 곳으로 임동쪽으로 내려간 대갈룡이 이곳에서 한맥이 동쪽으로 휘감아 청룡등을 이룬 곳으로 농소마을이다.
원래는 용수막으로 쌍룡등공(雙龍登空) 형상으로 용구름이 하늘로 올라가 비를 뿌리는 모양인 용수막(龍需寞)이라 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곳에 고려초에 쌍룡사(雙龍寺)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대명당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이 마을 앞쪽에 왕무덤이 있어 왕(王)의 무덤인지 왕씨의 무덤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고려 때의 왕릉(王陵)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이 묘지가 현재까지 국유지라는 것으로 미루어 왕릉이었기에 지켜져 왔지 않나 생각된다. 어쨌든 용수막이 어떻게 하여 농소마을이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왜인들이 이곳의 지맥을 차단하고자 농사하는 곳이란 뜻으로 농소(農所)라 했으리라 믿어진다.
그리하여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내월리로 병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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