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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으로 보는 순창의 100년 전과 현재 - 팔덕면 / 기획연재 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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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1월 28일(목) 15:07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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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순창신문 | |
순창신문 1,000호를 맞아 100여 년 전 순창의 인구와 지명을 조사한 지지조서와 70여 년 전에 만든 순창군 지명조사철을 들여다봤다. 매주 순창읍을 시작으로 이번주에는 팔덕면을 살펴본다. 1916년과 1917년 순창군 지지조서는 군산 동국사 종걸스님에게 받아온 파일로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만든 문서다.
팔덕면은 용산리(龍山里)를 비롯한 구룡리·월곡리 등 10개 법정리 · 25 행정리를 관할한다. 1월 20일 현재 인구는 771세대 1424명이 거주하고 있다. 1916년에는 10개리 30개 마을에 905세대 4468명이 거주했다. 이후 해방이후에는 인구가 늘어 1112가구에 5940명이 금과면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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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순창신문 | |
▲ 사진설명. 비변사인 방안지도備邊司印方眼地圖 내 팔덕면
국가 군무와 국정을 총괄했던 비변사에서 1745년~1765년 사이에 군사적 필요에 의해 편찬됐다. 순창을 하나의 읍성으로 표시되어 있고 대모산성과 담양 금성산성 이 연대암과 함께 표시되어 있다. 금성산성(연대산성) 동문은 순창군 관할이었다.
팔덕면의 지명은 이곳에 있었던 팔등과 덕진의 합성 지명이다. 1332년(고려 충숙왕 원년)에 순창이란 이름이 등장할 때부터, 팔등방(八等坊)과 덕진방(德進坊) 등 방(坊)단위의 분리된 행정구역으로 편성되었다. 1897년(고종 34)에 이르러 둘을 합쳤으므로, 팔덕(八德)은 앞 글자의 하나씩을 묶어낸 합성 지명이다. 『여지도서』(순창)에“(서쪽) 덕진면은 관아에서 20리 이다. 팔등면은 관아에서 20리이다.”라고 수록되어 있다. 이후『대동지지』등의 지리지에도 덕진(德進)과 팔등(八等)이 기록되어있다.『동여도』에는 덕진(德進)이 옥출산(玉出山) 동쪽에 그려져 있고, 팔등(八等)은 우부면 남쪽의 아미산 부근에 묘사되어 있다. 덕진 마을은 덕진방의 소재지로서 효례골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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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지지조서를 보면 팔덕면내에 구룡리는 입석(선돌), 신기(서당골), 신평마을을 담당하고 인구는 110가구에 527명이 거주했다. 용산리는 궁산(활꾸지), 사정, 구항, 복정마을을 담당하고 58가구에 314명이 거주했다. 월곡리(월국리)는 월곡(달오실), 설현(설리고지)마을로 152가구에 724명이 거주했다. 광암리는 주곡(배실), 막상동, 태자(태저울)마을을 담당하고 28가구에 160명이 거주했다. 청계리는 죽림(대심말), 옥호(점말, 원통), 신남(쑥거리)마을로 123가구에 586명이 살았다. 서흥리는 백암(흰바우), 이목마을로 86가구에 391명이 거주했다. 산동리는 분통굴, 통천, 장재(장자촌), 파랑터마을로 63가구에 291명이 살았다. 장안리는 평창마을과 옥정마을로 131구에 630명이 거주했다. 창덕리는 덕진(쇠로골)마을과 평지(평진), 동고(동고지)마을로 100가구에 562명이 살았다. 덕천는 용두(용두촌), 태천(태촌), 점촌마을로 54가구에 283명이 거주했다.
1948년 전후 팔덕면 용산리에는 복정, 사정, 구항, 새터마을로 115가구에 581명이 거주했다. 서흥리는 흰바우, 이목골마을을 담당하고 95가구에 492명이 거주했다. 산동리는 장재, 분통, 파랑터, 통천마을로 112가구에 643명이 거주했다. 청계리는 대심몰, 옥호, 월성마을로 135가구에 707명이 살았다. 광암리는 태자동, 막상골, 주곡(배실)마을로 59가구에 300명이 거주했다. 월곡리는 월곡과 설현(설계)마을로 165가구에 837명이 거주했다. 이외 구룡리, 장안리, 창덕리, 덕천리 부분은 소실되어 알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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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실 기자 “” - Copyrights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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