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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으로 보는 순창의 100년 전과 현재 - 유등면 / 기획연재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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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1월 07일(목) 14:59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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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순창신문 | |
순창신문 1,000호를 맞아 100여 년 전 순창의 인구와 지명을 조사한 지지조서와 70여 년 전에 만든 순창군 지명조사철을 들여다봤다. 매주 순창읍을 시작으로 11개 읍면을 연재로 이번 주에는 유등면을 살펴본다. 1916년과 1917년 순창군 지지조서는 군산 동국사 종걸스님에게 받아온 파일로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만든 문서다.
유등면은 소재지인 외이리(外伊里)를 비롯한 창신리·건곡리 등 6개 법정리 · 14개 행정리를 관할한다. 1월 4일 현재 인구는 629세대 1,146명이 거주하고 있다. 1916년에는 6개리 12개 마을에 828세대 4,205명이 거주했다. 이후 해방이후에는 인구가 늘어 1,030가구에 5,845명이 유등면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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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순창신문 | |
백제시대에는 도실군에 속했었고,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는 각각 순화와 순창에 속했다. 유등면은 고려 때부터 방제(坊制)가 적용되어 왔다. 이곳에 있었던 창신역은 광주 경양역에 속했으며 갈담역과 함께 교통의 중심을 이루었다. 『여지도서』(순창)에“유등면(柳等面)은 관아에서 20리이다.”라고 하였으며『대동지지』에서도“옛 등소(等所)를 근거로 삼고 동쪽으로 처음이 6리이다.”라고 기록했으므로 같은 맥락이다.『 지승』에서섬진강동쪽이면서, 연탄(淵灘)과 가까이에 유등면 지명이 묘사되어 있다. 면소재지인 외이리는 대구 배씨와 평택 임씨가 정착하여 이룬 마을로, 밖에 있어‘바깥 이동’이라고 부르다가 조선 말기부터 ‘외이리’라 개칭하였다. 형국상 주형(舟形)이기 때문에 마을 안에 우물을 파서는 안 된다고 해서, 마을 주변에 공동 우물을 5곳을 파서 나무를 1주씩 심었다. 매년정월 대보름 때마다 이곳에서 5샘 5당산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유촌리 서쪽에 버들배(유촌선 나루터)가 있었고, 인계면 경계 오교리 북방계곡을 두릉정(두룡정현)이라 했다. 또 건곡리 남방에 역답이 있었다. 유등면 오교리 화산서원이 있었던 서원마을 북동쪽 가리산 정산에 삼국시대 석성인 오교리 산성이 있다. 합미성(성재 城峙)로 불렀던 이 산성은 백제 역평현의 피난성 또는 치소성으로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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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지지조서를 보면 유등면내에 창신리는 정동(샛터)과 창신(역몰)마을을 담당하고 인구는 104가구에 538명이 거주했다. 건곡리는 구건곡(건실), 신건곡, 쇠판마을을 담당하고 186가구에 932명이 거주했다. 외이리는 외이(밧이동)과 내이(안이동)마을을 담당하고 174가구에 921명이 거주했다. 오교리(오괴리)는 오교(머다리)와 서원마을을 담당하고 90가구에 440명이 거주했다. 유촌리 유촌(버들)마을은 책암(책바위)와 고반정(고방이)를 속한 마을로 160가구에 749명이 살았다. 무수리는 무수와 화탄마을로 114가구에 575명이 거주했다.
1948년 전후 창신리에는 정동과 창신마을로 123가구에 695명이 거주했다. 건곡리는 일건곡과 이건곡, 금판마을을 담당하고 250가구에 1,432명이 거주했다. 외이리는 일외이 이외이마을로 226가구에 1,266명이 거주했다. 1936년에 건립한 어초정은 외이리로 속했으며, 유등초등학교는 1950년에 재건하고 390명의 학생들이 학교에 다녔다. 오교리는 오교와 서원(서우내)마을로 109가구에 643명이 살았다. 유촌리는 유촌, 책암마을로 203가구에 1,075명이 거주했다. 1953년에 건립한 숭동(유촌)국민학교에 178명의 학생이 학교에 다녔다. 무수리는 화탄과 무수마을로 125가구에 724명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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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실 기자 “” - Copyrights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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