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이세보가 찾은 순창팔경(淳昌八景)을 찾아서
|
|
2021년 04월 08일(목) 15:48 [순창신문] 
|
|
|
| 
| | ⓒ 순창신문 | |
이세보(李世輔 1832~1895)가 지은 순창팔경가는 아버지 이단화(李端和)가 1860년(철종11)년 1월부터 그해 11월까지 순창군수로 있을 때 순창지방을 유람하면서 남긴 시조 작품이다. 자연풍광이 아름답고 인심좋은 고장 순창에서의 즐거움은 한자락 싯구가 저절로 읊어질 정도다. 이에 이세보가 지은 순창팔경가에 나오는 지명과 현재위치를 강병문 향촌사학자와 함께 찾아본다. 강씨는 팔덕면에서 태어나 80평생을 순창에서 살았다. 대학교 졸업 후 순창북중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 소풍을 대부분 금산으로 올라가 순창읍의 전경을 보게 했다고 한다. 이때 금산 밑에 있는 헌납바위의 방치된 풍경을 아쉬워했다.
| 
| | ⓒ 순창신문 | |
순창팔경가는 차례로 ①금산(錦山), ②헌납(獻納)바위, ③대숲동, ④응향지(凝香池), ⑤아미산(娥眉山), ⑥귀래정(歸來亭), ⑦장대(將臺), ⑧적성강(赤城江)이 나온다.
8개의 지명은 현재남아 있기도 하지만 일부는 지명이 바뀌거나 사라져 버려 관련 고지도와 함께 옛문헌을 찾아봤다.
| 
| | ⓒ 순창신문 | |
① 검샨(錦山)은 금산으로 ‘금’을 ‘擒’ 또는 ‘禽’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추산(追山)’으로도 불린다. 지금도 금산을 오르다 보면 정상부근에 연분홍 자주색 진달래가 군락을 이루며 피고 있고, 금산제 위에는 수양버드나무가 지금도 있다.
| 
| | ⓒ 순창신문 | |
② 헌납(獻納) 바위 - 순창군수가 바위 위에서 놀고 있을 때 교지를 받았다 하여 이 바위를 헌납바위라 하였다. 금산옆 금산제방 아래에 있다. 폭포가 있었던 자리에 금산제 수로에 폭포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헌납바위는 10여명 이상 앉아서 놀 수 있는 넓은 바위가 있다. 조선 전기 단종에 대해 절의를 지킨 돈암(遯菴) 장조평(張肇平 1429 세종 11~1501 연산군 7)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키기 위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순창으로 낙향, 추산(追山)으로 은거했다. 이때 지은 시가 이 곳 헌납바위가 아닌가 싶다.
추산(追山) 아래 좋은 곳에 자리 잡고/길은 맑은 시냇물 따라 뻗어 있구나
산(山)은 높고 물이 수려(秀麗)하여/깊고 깊은 심산유곡(深山幽谷)이네
숨은 곳 이곳에는 보리가 익어 가고/속세(俗世)를 떠난 이곳은 청화(淸和)한 가을이네
卜築追山下 路緣鏡澗流 山高水又麗 除是壺中幽 隱墟麥漸熟 物外淸和秋/追山相和詩
| 
| | ⓒ 순창신문 | |
③ 대숲동(竹林村) - 대심말, 대심몰, 죽림촌으로 불리는 팔덕 청계마을을 지칭한다. 청계마을은 1897년 (고종34년)까지 팔등방의 소재지였고, 설공검(薛公儉), 설인검, 조원길(趙元吉)을 배향한 무이서원이 있었다. 강천산에는 김정, 유옥, 박상 삼선생의 삼인대가 있다. 이때의 청계마을은 현재 강천저수지와 강천산을 포함한다.
| 
| | ⓒ 순창신문 | |
④ 응향지(凝香池) - 군청 앞 옛 연지로 응향각이 있었다. 응향지에 아치형 교각이 있었고 배를띄워 놀았다고 한다.
곡운(谷耘) 권복(權馥 1769~1833)의 곡운공 기행록(谷耘公紀行錄) 남유록(南遊錄) 유상 편에 “순창 응향각은 동헌 곁에 있다. 집 아래에는 작은 호수가 있어서 연꽃이 많이 피어 있으며 호수 기슭에는 화방재(畵舫齋:누선이 정박한 모습)가 있는데, 우뚝하게 이름난 정자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세보도 순창팔경가외에 응향각에서 기녀와 악공들을 동원하여 응향각에서 한껏 흥취를 누리는 장면을 담은 시조를 지었다.
응향각(凝香閣) 놉흔 집의 니원졔자(梨院弟子) 압헤 두고
졀세가인(絶代佳人) 화답(和答)하니 경 무궁(景槪無窮) 졀승(絶勝)하 다
아마도 쳥츈행낙 (靑春行樂)은 잇뿐인가 [풍아(대)#83]
⑤ 아미산 - 원님이 살았던 원촌마을이나 대모산성에서 바라본 아미산의 풍경으로 보인다. 동락당(옛 군청)이나 응향각에서 아미산은 잘 보이지 않는다.
| 
| | ⓒ 순창신문 | |
⑥ 귀래정(歸來亭)
서거정은 귀래정기(歸來亭記)에서 '순창은 호남의 승지(勝地)'로 산수의 아름다움과 논밭의 풍요로움, 금어의 넉넉함이 있어 순창을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했다.
이세보 또한 귀래정에서 또 다른 시조 한 수를 지어 남기기도 하였다.
쵸양왕(楚襄王) 간 년후(然後)의 양대(陽臺) 쇼식 묘연(杳然)터니
귀래졍(歸來亭) 놉히 올나 바라보니 무샨(巫山)이라
지금의 오는 젹셩(笛聲) 이 아니 강션(降仙)인가 [풍아(대)#80]
아끼던 기생 강선(降仙)을 만나지 못해 시름 겨워하던 이세보는 귀래정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며 그를 떠올리는데, 때마침 들려오는 피리 소리를 강선 이 보내온 것이라 여기며 반가워하고 있다. 자신과 강선의 만남을 초 양왕(襄王)과 무산선녀(巫山仙女)의 운우지정(雲雨之情)에 빗대어 표현하면서 그장소를 귀래정으로 설정하였다.
| 
| | ⓒ 순창신문 | |
⑦ 장대(壯臺) - 장대는 장수가 병사들을 조련하고 전세를 조망하기 위해 지은 누대이다. 조선 팔도의 노래에서 순창 (淳昌)을 두고 노래한 시 중에 순창읍성으로 보고 “대모산성(大母山城) 관정루(觀政樓)와 북루(北樓)가 솟아있다.”라 하여 순창객사 뒤 북루(北樓)로 볼 수 있으나, “무변(無邊) 쵸색( 艸色) 너른 들을 보았다고 한 것을 보면, 채계산(화산, 책여산, 적성산) 정상으로 보인다.
적성산은 관아의 동쪽 20리에 있다. 다른 이름으로 ‘화산(花山)’이라고도 부르며, 적성진(赤城津) 위로 세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고 돌로 된 절벽이 천 길 높이인데, 마치 성첩(城堞)처럼 번쩍번쩍 빛난다. 큰 강이 그 아래를 비켜 흐르고 넓은 들판이 그 앞에 펼쳐져 있으니, 이곳이야말로 남도 가운데 최고의 명승지이다.
| 
| | ⓒ 순창신문 | |
⑧ 적성강(赤城江) - 채계산(화산, 책여산, 적성산) 아래 적성강과 어초정 앞 적성삼화와 대원군 이강의 낚시터 부근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집정조대'와 정자 주변의 경치를 즐기면서 적성강에 노니는 은어를 잡는다는 뜻의 낙정조기(樂亭釣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상석’에서 낚시도 즐겼다고 한다. 어초정 현판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왕(義王, 의천왕) 이강(李堈 1877~1955)공의 친필이다.
이규보(李奎報 1168 의종 22∼1241 고종 28)가 적성산(화산) 중연위에 '신선과 짝한다'는 의미의 반선정(伴仙亭)에서 읊은 시도 있다.
술 취한 늙은이 일엽 편주에 실었으니 / 석양에 돌아오는 행색 그림 속이로구나
평소에 화산(花山) 경치 좋다하기에 / 부질없이 연환(煙鬟)을 바라보며 푸른 하늘을 가리키네
一葉輕舟載醉翁 夕陽行色畫屛中 平生聞說花山好 空望煙鬟點碧空
적성강(赤城江)을 건너 화산이 가장 뛰어난 절경인데 저물게 도착하면서 감상하지 못하고 소식(蘇軾)의 능허대시(凌虛臺詩)에 “떨어지는 햇빛 푸른 벼랑을 감싸고 저녁 구름 연환에 젖어 있네.”라 했듯이 푸른 산봉우리를 연환(煙鬟)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나타내면서 읊은 시다. 반선정에는 하서 김인후 등 이곳에서 즐겼던 명사들의 시가 반선정(伴仙亭)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
|
|
|
신경호 기자 “” - Copyrights ⓒ순창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
|
순창신문
기사목록 | 기사제공 : 순창신문
|
|
|
|
|
|

|
|
|
|
실시간
많이본
뉴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