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세치 혀로 몽고 장수를 회유
고종 18년 1231년 8월 살례탑(撒禮塔)의 몽고 대군은 평안도 철주, 평주등지를 유린한 다음 고려와 강화를 맺고 고종19년인 1232년 1월에 일단 철병하였다. 몽고병 철군 후 왕명을 받은 설신은 상장군 조숙창(趙叔昌, 묘지에는 대장군 조숙장(趙叔璋)으로 기재)과 함께 몽고에 사신으로 가서 몽고의 고려에 대한 과중한 공물과 동남동녀(童男童女)의 징구 및 공장(工匠)송출 요구에 대한 고려 측의 입장을 밝히는 표문과 함께, 당당한 언행으로서 성공적인 대 몽고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돌아왔다. 그는 곧 대부소경 어사잡단에 승진되었다.
고종 19년 1232년 12월 철군했던 몽고장수 살례탑이 재차 침입하여, 한강을 건너 처인성(處仁城, 지금의 용인)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몽고 군이 남진하는 과정에서 설신은 포로가 되어 처인성까지 끌려갔다. 적장 살례탑과는 구면이라 끌려가면서 그는 여러모로 생각했다. 맨주먹으로는 적진에서 어찌해 볼 도리가 없으나 어떻게든 남진 속도라도 늦추어 아군의 피해를 줄이고 반격의 시간을 벌자는 생각으로, 기발한 꾀를 냈다. 임진강 도강을 앞두고 설신은 살례탑에게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전래하는 말에 외국의 대관이 서울(개경) 이남의 강을 건너면 불행해진다고 했소. 장군은 부디 남쪽으로 내려가지 마시오. 적진에 붙들린 몸이지만 우국충정에서 궁여지책으로 살례탑을 상대로 벌인 일종의 심리 전술이었다. 이 말에 살례탑은 비소로 답하고 계속 남진하여 처인성의 백현원(白峴院) 암자에 이르렀을 때 주지스님 김윤후(金允後)스님이 쏜 화살에 맞고 사살되었다.
4. 학문과 문장에서 일가를 이룸
장수 살례탑을 잃은 몽고 군은 무너져, 부장 철가(副將 鐵哥)의 인솔하에 북으로 철군하는 도중 설신의 지혜에 감복하여 그를 풀어주고 당시 임시수도인 강화로 돌려보냈다. 몽고 군이 그를 죽이지 않고 방면한 것을 보면 앞서 몽고에 사신으로 갔을 때의 활동상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매우 능란한 외교적 기량을 지녔던 것이 아닌가 한다. 설신을 방면한 몽고장수 철가는 그 죄로 파직 당했다는 기록이 원사(元史)에 전한다.
설신은 고종 21년 1234년에 충주목부사가 되고 이어 호부, 예부시랑, 경상도안찰사, 상서우승, 서북면병마사, 좌간의 대부, 판예빈성사, 삼사사, 국자감대사성, 전춘관 이석, 동북면병마사, 태자좌유덕, 성서좌복야등 문무 요직을 두루 거쳐 고종 38년 1251년 추밀원부사 형부상서에 올랐다.
다른 한편 그는 학문 문장 분야에서도 일가를 이루어 지제고를 비롯하여 한림시독학사, 한림학사, 사관수찬관등 문한직을 거쳤으며 고종 29년 1242년 4월에는 동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고 홍지경(洪之慶)등 37명을 선발하기도 하였다. 고종 38년 1251년 6월 계묘(癸卯)일 대낮에 태백성이 나타나 하늘에 떠 있었는데 바로 이날 설신이 추밀원부사로 재직 중 서거하였다. 하늘도 그의 죽음을 인지한 듯하다.
<다음호에 계속>
<자료제공 순창향교 전교 강병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