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성황대신 사적 현판 / 순창군 문화유산
|
|
김기곤 국사편찬사료조사위원
전) 순창문화원장
|
|
2020년 02월 05일(수) 16:02 [순창신문] 
|
|
|
| 
| | ⓒ 순창신문 | |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 2점은 소나무판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그 크기는 가로 180cm, 세로 54cm로 모두 17형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현판에 새겨진 글자는 한문과 이두로 각인되어 있으며 내용은 고려 충렬왕 때에 문신인 설공검(1224-1302)을 대왕대신을 대부인으로 그의 신상을 모시고 매년 단오날에 성대한 제사를 올린다는 내용이다.
순창의 성황당은 지금은 훼철되어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지만 전해진 이야기로는 1940년경까지는 지금의 옥천동(순화리 445)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설공검은 자를 상검이라 하고 호를 경제라 하였으며 본관은 순창(淳昌)이다. 그는 1224년(고려 고종11년)에 아버지인 추밀원 부사 신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공검, 인검, 두 아들 중 큰 아들로 태어났다. 참고로 간략한 그 가계를 살펴보면 설씨로 맨 처음 순창에 발을 들여놓고 터를 닦은 사람은 고려 제 17대 인종(1122-1146)때 예부시랑을 지낸 설자승이다.
설자승은 서울(개성)에 머물다가 1126년에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피하여 이곳 순창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다시 서울로 올라가 예부시랑을 지내고 왕으로부터 순화백에 봉작되자 본관을 순창 또는 순창의 또 다른 옛 이름인 옥천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설자승의 선대는 우리나라 성씨 중 그의 역사가 오래된 경주 설씨인 바 원효대사 설총과 같은 문중이다. 설자승은 바로 설총의 17대손이다.
그리고 설자승이 이자겸의 난을 피해 찾은 곳이 이곳 순창인 것은 그의 처가인 순창 조씨의 터전이 이곳 순창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순화백에 봉작되어 순창에 살기 시작한 설자승은 공검의 고조이며 그의 아들 즉 공검의 증조인 정숙은 사문박사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며 공검의 조부인 선필은 태자 참사였는데 그는 여덟 아들을 두었고 큰 아들인 신을 비롯한 세 아들이 대과에 급제하는 등 모두 영달하였다.
앞에 간략히 살펴보았듯이 이 고장에 입향한 설씨는 설자승 아래로 끊이지 않고 대과에 급제한 명문을 이루었다. 이러한 가계에서 태어난 공검은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강직하였으며 일찍부터 학문이 탁월하여 문과에 급제하여 고종 45년에 예부 남증이 되었다.
/ 참고: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 238호(2000.1.13.지정
|
|
|
|
순창신문 기자 . “” - Copyrights ⓒ순창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
|
순창신문
기사목록 | 기사제공 : 순창신문
|
|
|
|
|
|

|
|
|
|
실시간
많이본
뉴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