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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섭리사의 산증인 故강석구 원로목사,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순창 첫 교인에서 원로목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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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4월 30일(월) 10:53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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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군 쌍치면 쌍치교회는 지난해 9월 23일 110주년 창립기념식 및 장로, 권사 취임식을 열었다. 순창에 기독교가 전래된지 올해로 111주년이 되는 해이다. (2017년 9월 27일) 천주교는 1866(고종3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일제 탄압시 쌍치면 오룡마을로 천주교 신자들이 피난을 와서 오룡공소에서 포교하며 숨어 살았다고 한다. 순창 가정연합(통일교)의 산증인이었던 강석구 원로목사가 최근 타계했다. 이에 본보는 1960년대 초 순창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고 강석구 원로목사를 재조명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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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순창신문 | |
그동안 고 강목사에 대한 본보 기사를 검색 해보니 30여년동안 모교인 팔덕초등학교에 장학금을 전달(본보 2012년 2월 22일), 손수 재배한 쌀 어려운 이웃에 전달 (본보 2005년 01월 11일)을 비롯해 생활정치 순창 텃밭포럼을 결성(본보 2011년 01월 27일)하고, 순창군 평화대사협의회 (본보 2016년 02월 03일) 구성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고 강석구 원로목사의 자서전 ‘나의 갈 길 다가도록’(도서출판 엠-애드 2016년 5월 12,000원)에서 1962년 순창가정교회 수련회를 준비할 때 설용수씨와 함께 한 겨울에 땔나무를 해가지고 강천산 저수지 빙판 위로 리어카에 싣고 순창까지 옮겼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설용수 전 세계일보 사장은 고 강석구 원로목사에 대해 “순창 섭리사의 산증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강석구 목사를 대할 때마다 몸에 배어있는 인간미, 즉 친절함과 겸손함 그리고 상대방을 먼저 이해하는 너그러운 인품을 느낀다. 자나 깨나 뜻에 대한 간절함과 사무침으로 살면서도 늘 부족해 하고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하는 강목사님의 모습에서 참된 신앙인의 품격을 느낀다.” 고 했다.
“정도와 인내 그리고 충성”이라는 좌우명으로 한 평생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리겠다고 일편단심으로 살아온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순창교회 강석구 원로목사가 지난 4월 18일 08시35분 85세의 인생을 마감하고 성화(타계)하였다.
강목사는 순창군 팔덕면 용산리 425번지에서 1934년 10월 17일 오후 8시 30분 강성율, 유유순 가정의 1남 6녀 중 외아들로 태어나 팔덕 초등학교 15회, 순창농림고등학교 7회로 졸업하고, 광주 조선대학교를 다니다가 가정 형편상 중퇴하고 농협에 근무하다가 뜻이 있어 가정연합(통일교)에 입교하여 통일신학교 1회를 졸업하였다. 이후 선문대학교 목회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아, 75세까지 43년 4개월의 목회생활을 하였다. 그는 퇴임 후에도 세계평화천주연합(UPF) 순창군 지부장으로 취임하며, 지역사회 봉사, 북한 어린이 쌀 모우기 운동, 모교와 인재숙 장학금 전달, 이웃돕기 등등 봉사활동을 추진해 전북 경찰 청장상 등 12여개의 상을 받아 오다가 지난 4월 15일, 그 직을 이임하고 바로 3일후에 하늘나라로 떠나게 되었다.
강목사는 유년·청년 시절, 일제하에 나라 없는 민족의 비참함과 6.25의 피비린내 나는 동족간의 전쟁과 빈곤 등을 겪으면서, “고통의 날이 없는 한반도의 평화와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신문화를 지배할 종교가 아니면 안 될 것”으로 생각하던 중, 1961년 4월 12일 팔덕면 구항마을 강종남 장로의 형님 집에서 원리말씀을 듣고 “이것이야 말로 바로 우리 민족의 통일과 세계평화의 길임을 확신”하고 가정연합에 입교하였다. 이날이 바로 순창가정교회 창립한 날이 되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때가 지금이다. 그 나라와 그 의보다 자기 살기를 더 염려하면 망한다. 그 나라가 없으면 개인, 가정, 사회, 민족, 모두가 유린당한다. 나라가 없고서는 고향이 있을 수 없다”고 한 문선명목사의 말을 자서전 ‘나의 갈 길 다가도록’에서 인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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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순창신문 | |
그의 삶을 엿보이게 하는 일화가 있다. 1967년 12월 19일 처음으로 강목사는 순창 팔덕을 떠나 임실교회 교역장으로 발령을 받아 부임하였다. 그가 간 임실교회는 전 교역장이 타지에 간 후 빈자리로 오랫동안 비워둔 자리였다. 강목사는 외아들로서 부모, 아내, 아들 4명에게 “농사철이 아닌 겨울철만 임실교회에 가서 활동하고 돌아오겠다”고 말하고 몇 가지의 생활도구가 들어간 보따리를 메고 눈보라 치는 6km의 순창 터미널까지의 길을 걸어서 가고 버스로 임실로 향했다.
도착한 교회는 돈이 없어 연탄을 살 수 없는 상황이었고 냉골 방에서 새우잠을 자고 배고픔을 기도로 이겨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전세로 얻은 교회를 나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새 교회를 전세로 얻기 위해서는 기존 20가마에 30가마를 더한 50가마가 필요했다. 그는 할 수 없이 고향 순창 집에 가서 가족들에게 말하지 않는 채 나락 장수를 만나 나락을 넘겨주는 약속을 하고 그 돈으로 새로운 곳으로 교회를 옮겼다. 그 후 가족들에게 말할 틈도 없이 나락 장수가 고향집을 들이닥쳐 뒤주에 담아둔 나락을 퍼가겠다고 하여 큰 소동이 벌어졌다. “가족들이 얼마나 원망하였을까...” 그의 비장한 결단은 가족을 놀라게 하였고 그는 생애를 통해 부모에게 옷 한 벌 사드리지 못한 불효를 생각하며 가슴이 아파해야 했다.
그러다 그의 혼신적인 노력으로 임실교회는 신도가 늘어났고 1971년에는 축복 2세 막내아들을 얻었고 3년 반만에 순창교역장으로 발령을 받아 고향에서 다시 목회를 하였다.
그가 돌아가신 날까지 살던 집은 강목사가 공직을 은퇴한 후 초가집을 개축하여 직접 지은 집이다.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 청교도들이 대륙을 개척하며 제일 먼저 교회를 짓고 학교를 짓고 나중에 자신들의 집을 짓듯이 먼저 3개 교회, 임실교회와 순창교회, 그리고 팔덕교회를 지어 헌당한 다음에야 자신의 집을 지었다.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실천한 것이다.
어려운 살림 속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5자녀를 훌륭히 길러낸 아내 임래순 사모는 강목사에 대해 “한번도 아프다는 말도 없이 ‘나같이 행복한 사람이 있나? 밥 해놓았지 빨래는 다 되어 있지, 집에서 기다려주고 있지 나는 복 많은 사람이다’고 늘 하셨어요”라며 평소 강목사의 삶과 마음가짐을 엿보이게 한다.
지난 4월초 눈이 온 추운 날에 강목사가 부모 묘에 혼자 가서 ‘옷 한 벌 사드리지 못하고 보내드린 불효’에 대해 용서를 고했는데 계절에 맞지 않은 호랑나비가 한 마리 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강목사가 ‘추운데 왜 나왔어? 아직 나올 때가 아니잖아’ 라고 호랑나비에게 말을 걸었다고 한다. 그러다 며칠 뒤에 아내에게 그간 모아둔 통장을 주면서 “나를 따라 고생 많았다. 이것으로 일하지 말고 편히 쉬어. 내가 미리 가서 있을게 한 5년 살다가 마중 나올게. 날 걱정하지 말라. 나는 하나님 만세 참부모님 만세를 부르며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내 임내순씨는 “어떻게 사람이 죽을 때 그럴 수 있갔니?“라고 답하고 말았다.
강목사는 임종하기 3주전 팔덕 구항마을 모정에 당산나무가 없다고 느티나무 두 그루 사서 심었다고 한다. 그가 사랑하는 팔덕 구항마을에 마지막까지 선물을 주고 갔다. 마을 사람들의 휴식처에 오래도록 그는 수호신으로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 강목사는 생전에 태극기 달기 운동을 펼쳤고, 매년 추석에는 태극기를 들고 강천산 팔각정에 올라 나라와 고향 순창을 위해 기도하며 나라사랑을 실천해왔다.
그는 “그 나라와 그 의보다 자기 살기를 더 염려하면 망한다. 그 나라가 없으면 개인, 가정, 사회, 민족, 모두가 유린당한다.” 며 “나라가 없고서는 고향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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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실 기자 “” - Copyrights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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