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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과 고례 조선후기 문신 오희길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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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곤 순창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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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1일(수) 15:41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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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희길(1555-1624)은 24세때인 1579년 집을 고창 향교 부지로 내주고 시집간 누이가 살고 잇는 순창으로 이거하였다.
이를 칭송하는 비를 고창 유림들이 세웠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오희길은 경기전 참봉으로 태조의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을 무사히 지켰다.
이 공노로 사근도 찰방과 태인 현감에 제수되었으며, 1619년(광해군 11) 허균의 미움을 받아 거제로 귀양을 갔다가 1925년 귀양지에서 향년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선산이 있는 순창군 고례촌으로 반장하여 양지바른 언덕에 안장하였다.
1806년(순조6)에 오희길 묘비가 건립되었으며 숭록대부 홍문관 제학 조관진이 글을 짓고 임실 현감 이익회[『근역 서화징(槿域書畵徵)』에 기록된 명필]가 썼다.
순창군 금과면 고례리 산 66-6번지 북쪽 기슭에 있으며 규모는 높이 103cm, 너비42cm, 두께 14cm이다.
화강암 비신을 좌측 기단 위에 세우고 갓 석을 얹었으며 묘 앞에 상석을 놓았다.
전면에는 큰 글씨의 해서체로 ‘유명 조선국 통훈대부 행태인 현감 오공지묘’“공의 휘는 희길(希吉), 자는 길지(吉之), 호는 도암, 관향은 나주(羅州)인데 공의 부친이 고창으로 이거하였다. 부친은 오언기요, 조부(祖父)는 오원이니 서윤(庶尹)이요, 병조 참판 나성군(羅城君) 오자치(吳自治)를 조상으로 삼고 대대로 증직과 포장이 있으니 호남의 망족(望族)이다. 공은 일찍이 하서 선생을 사모하여 그 문인 기금강(奇錦江)에게서 배웠다. 고창 향교가 저습하여 가대를 구매하기로 청하니 고궁을 지으라 하고 가대를 내어 주고 누이가 시집간 순창 고례촌으로 1579년 이거하니 향유(鄕儒)들이 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정여립을 찾아가 널리 배우기를 청하였으나 율곡(栗谷)과 우계(牛溪)를 욕한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라 재빨리 편지를 써서 그가 어리석음을 열거하여 1,000여 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희길의 발자취가 문하에 끊어지겠소’ 하였다. 이렇게 끊은 지 3년 만에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터지자 공을 여립의 문도라 하여 구속하고 나라에 아뢰었는데, 이에 앞서 상께서 역적 집의 문적을 살펴보다가 공의 편지를 보고 당장 풀어 주라고 명하고 역마를 보내어 올라오게 하여 누차 치하하고 후릉(厚陵) 참봉에 제수하였으나 공은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경기전 참봉으로 재임하던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태조 어진과 왕조 실록이 위기에 처하자 내장산 용굴 안에 옮겨 무사히 지켜 내었다. 그는 그 공로로 사근도 찰방과 태인 현감을 지냈으나 허균과의 불화로 1619년 거제에 귀양을 갔다. 1625년 귀양지에서 사망하여 순창 고례촌으로 반장을 하였다. 저서로 『도동 연원록』 4권, 『명대의』 등이 있다. 비문은 홍문관 제학 조진관이 짓고, 임실 현감 이익회가 썼다.”
*참고문헌 : 『금암사지(금암암사)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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