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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이혜미) 출생지와 월화교(月花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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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신 / 순창군 전)군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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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01일(목) 10:52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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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순창신문 | |
주논개(朱論介, 1574년[1] 9월 3일 ~ 1593년)는 조선 선조 시대의 열녀이다. 충절을 기려 의암(義巖)이라고 한다. 그녀는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고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적성강 부근은 경치가 아름다워 예로부터 인근의 한량들이 물놀이와 뱃놀이를 즐기기 위하여 자주 모이던 장소로 이곳에는 재색을 겸비한 기생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적성삼화(赤城三花)라 불린 월화(月花), 월선(月仙), 월계(月桂)가 유명하였으며 그중에도 월화가 가장 아름다운 기생이었다. 세 사람은 한집에서 살았으며 월화와 월계은 자매이고 월선는 친척이다. 인근 한량들은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세상의 시름을 뒤로 한 채 기생들의 거문고와 장구소리를 즐겼다.
이곳은 경치가 아름다워 인근 지방 수령들이나 풍류객들이 적성강에 배를 띄워 놀다가 시흥이 나면 서로 화답하고 시를 낭송하며 풍류를 만끽했다.
이 무렵 적성현에는 미색의 관기나 그중에도 풍류객의 흥을 돋으며 가무 뿐만 아니라 시로 화답하고 교양을 갖추고 아름다움도 꽃과 같다하여 월하, 월선, 월계라 하였다. 그러니 보름달이 휘황찬란하게 밝은 밤이면 이곳 체계산 아래 적성강에 더욱이 뱃놀이에서 주홍이 나면 더욱 흥을 돋우고자 기생들의 손목을 잡고 배위에서 바위 위로 뛰어 올라 산들바람에 열두폭 치마 자락을 휘날리며 손목을 잡고 이 바위 저 바위로 뛰어 노는 풍경을 한폭의 그림 같이 아름다운 절경이라고 하였다. 그들이 강가를 건너 다니던 돌다리를 월화교라 불렸다. 월화교는 기생 월화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죽는 곳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이아니며 구조되었던 것이다. 이곳 월하교 뒤쪽 산에는 적성현이 위치하고 있어 적성현을 가려면 월하교를 통하여 가는 길목이라 주변에는 술집이 10여채 있고 경치가 아름다워 최영장군이 자주 찾았던 곳이며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세월을 낚았던 장소로 고종이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섭정정치로 실권을 장악하고 서원 철폐 등의 개혁을 추진한 인물이다. 흥선대원군은 세도가인 안동 김씨들의 감시를 피해 거지 행세를 하며 전국을 떠돌아 다였다. 흥성대원군은 순창에 오면 꼭 이곳 낚시터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정국을 구상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낚시터가 있는 서천리(庶川里)가 있고 그 밑으로 2km지점에 무수리(無愁里)라는 마을이 있는데 근심없는 마을이라는 뜻이며 지금도 전주이씨 후손들이 상당수 살고 있다. 또한, 주변에 찬하정(贊霞亭), 반선정(伴仙亭). 북루암, 집무청(集務廳), 톱바위가 있으며 초막골 용사 등 옆에 이진사가 초막을 짓고 살았던 곳도 있다.
기생 월화는 미모가 아름답고 총명하여 사내들은 월화를 보면 상사병에 걸려 월화하고 하루밤 정을 통하고자 하는 심정으로 재산을 탕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한다.
논개(이혜미)의 모친은 월화(月花)라는 기생이었다. 유등면 무수리 이진사는 딸을 낳게 되자 딸의 이름을 이혜미라 지어주었다. 이혜미는 3세때 부터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알 정도로 영특하여 어른들이 노래를 부르면 따라 부르고 집 옆 마당바위에서 글 공부 및 그림을 그린 것을 보며 혜미의 장래를 걱정 하던중 하루는 유명한 도사가 집에 찾아와 혜미의 관상 및 행동을 보더니 혜미는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사람이 될 것란 말을 하고 딸을 평양 기생학교를 보내라”고 하여 평양으로 가서 기생학교에 입학을 시키고 월화는 주변 술집에서 돈을 벌고 혜미가 기생 생활을 할 때 학교 선생님이 이혜미란 이름을 없애고 어미니 성을 따서 주논개로 이름을 개명하여 주고 평양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한 도사가 찾아와 “너는 세상에서 큰 인물이 될 팔자”니 남쪽으로 내려갈 것을 권유하자 평양에서 원님과 함께 하루밤 지내고 머리를 올려 모친과 경남 진주로 내려가 남강 주변에 술집을 차려놓고 장사를 하던중 천하 일색인 논개의 소문이 전국을 펴져 풍류객들이 모여들었다. 일본 장수들도 논개 집을 자주 찾고 서로 차지하기 위하여 남강 촉성루에서 매일 잔치를 가졌다.
논개는 남강 촉성루에서 왜장들이 연회를 벌이고 있을 때 술을 마신뒤 왜장을 죽이기 위하여 양손 8개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바위에서 춤을 추다가 왜장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殉節)하였다.
논개는 진주에서 기생 노릇을 하면서 말을타고 태어나서 살았던 유등면 무수리 고향을 찾아 왔으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고 논개가 죽은 후 고향 유등을 길이 빛내기 위하여 지금도 유등축제를 하고 있다.
논개가 놀았던 고인돌은 유등면 무수리 입구에서 북쪽으로 860m 지점에 체계산 아래 섬긴강변 유등면 무수리 3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규모를 살펴보면 가로 3.4m, 세로 6.0m 덮게 돌은 선형배의 모양으로 되어 있어 논개가 생가 집터에 있는 이 바위에 어릴적에 자주 뛰어 놀아던 곳이다. 그 당시는 6기가 있었으나 주민들이 장비를 이용하여 5기는 도난 당하고 현재는 1기만 있다. 지금도 이 마을에서는이 바위을 애기바위 및 기생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지금도 논개가 태어난 곳은 집터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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