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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 구미 개항에 세운 한응성의 묘비-순창의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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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곤 순창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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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23일(수) 12:21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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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응성(1557-1592)의 본관은 청주, 자는 경기, 호는 구와이다.
좌익공신 청성군 한종손의 현손이며 대호군 한축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에 스승인 조헌이 의병을 일으키자 가산을 정리하여 하인 수십명을 데리고 합세하였다.
금산 전투에서 선봉이 되어 싸우다가 칠백 의사와 함께 전사하였었다.
이때 수행하던 노복 부협은 한응성의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돌아와 장사를 치른 뒤 자신이 주인을 잘 모시지 못해 죽게 하였다며 자결하였다.
그 후 타고 갔던 말도 피로에 지쳐 죽었다고 전한다.
한응성의 묘 아래에 부협과 말의 무덤이 있고 이들의 비도 세워져 있다.
한응성은 이조참의에 증직되고 정문이 내려졌다. 한응성의 묘비는1876년(고종 13) 10월 10세손인 부호군 한성엽, 한동엽이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응성 사망 후 284년 뒤에 세운 것이다. 비문은 기정진(1798-1879)이 지었으며 두전은 이병곤이 쓰고 내용은 이두범이 썼다.
1897년 기정진의 손자 기우만이 추기하고, 추기에 11세손 한규학이 글씨를 새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순창읍에서 적성면을 지나 국도21호선 쪽 동계면 구미리 가는 길에 구암정이 있는데 구암정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산자락 아래 한응성의 묘비가 있고, 묘 앞에 한응성 묘비가 세워져 있다.
장방형의 화강암 대석위에 비신을 세우고, 역시 화강암의 옥개를 세웠다.
비신이 93cm 높이로 비록 작으며 너비 40cm, 두께 9cm이다.
비문의 내용은 기정진의 유려한 문체로 “장자에 백이와 도척은 이에 죽고 명예 죽었다는 말이 있으니” 로 시작하여 “왜적과 금산의 전투에서 한응성이 조중봉과 더불어 의로 죽었으니 같은 날 유골이 의총에 들어가는데 섞이지 못함은 다행히 충노 부협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여 노비가 시신을 수습하여 돌아온 내용을 적는다.
추기는 기우만의 글로 “우측의 명과 병서한 내용은 나의 선조가 쓰신 글로”라고 시작하여 한응성이 순의한 사실이 기록된 곳 등을 썼다.
36세의 젊은 나이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하여 장렬하게 목숨을 바친 충신의 행적을 세긴 묘비이기에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또한 자신의 목숨도 위태로운 상황에서 주인의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르고 자결한 노복의 무덤과 비가 같이 있어 더욱 많은 것을 보여주는 묘역이다.
*참고문헌 : 전부전통문화연구소,
순창문화유산탐구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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