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화리 창림(昌林)마을
금산에서 내려온 지맥(地脈)이 순창고등학교를 거쳐 진수페에서부터는 조그마한 구릉을 이루면서 내려와 현 천주교 동산이 이룩되고 다시 각시수페까지 내려갔고 한 지맥은 금산에서 옥천동을 거쳐 순창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동남쪽으로 내려간 구릉(丘陵)이 시기리에 이르니 그 사이에는 저습지로 전답을 이루고 있었다.
1945년 조국광복으로 귀국동포와 인구증가로 주택단지로 조성하고자 하였으나 매입할 자금이 없었기에 순창면 재산을 처분하여 매입자금으로 쓰도록 협의되어 현 대동병원 옛날 이해동(李海東)씨가 경영하던 해동병원이었는데 이해동 씨가 떠날 때에 순창면유재산으로 인수하였던 것을 매각하여 이곳 전답을 매수키로 하였던 바 일부 몇몇 사람이 매각을 거부하자 도시계획법에 의거 토지 수용령까지 발동하여 주택단지로 조성코자 하였으나 6ㆍ25동란으로 중단되었다가 수복 후에 피난민으로 인구가 증가되어 주택단지 조성이 불가피하여 마을로 조성되었다.
따라서 마을 이름을 명명하기 위한 논란 끝에 순창이라는 창(昌)자와 주택단지 조성에 당시 국회의원 임차주(林次周) 의원의 공이 컸기에 임(林)자를 따서 창림(昌林)으로 명명하였다는 것이다.
현재는 순창읍의 중심부로 공무원, 상업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남계리 기전(基田)마을
이 마을은 조선조 말까지 순창군 좌부면 하전리였으며 텃밭이 많았고 텃밭거리도 있어 1945년 건국 후 기전(基田)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시장과 접하여 있기에 상가 지역으로 빠르게 발전하여 1991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1, 2기전으로 분리하였다. 따라서 1기전리에는 61세대 181명이 살고 있으며 일제시대에는 남선전기회사(南鮮電氣會社)와 곡물검사소(穀物檢査所) 등이 있었으며 현재 신용협동조합이 있고 옛날 은행나무가 수백년 된 것이 있었기에 지금도 은행나무 거리로 불리고 있다.
또한 옛날에 은행정이와 하전리로 갈라 줄싸움을 하던 골목으로 옛정이 서려있는 고풍스러운 마을이다.
이 마을은 1945년 이전에는 일본인들의 과수원이었으나 1945년 건국과 함께 마을이 형성되어 현재는 82가구 304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시장 입구 도로에서 순창농협까지 인접 시장 경제권 속에 있는 마을이다. 비교적 규모가 큰 각종 상점들이 형성되어 소득이 높고 다경작 농가들로 부유한 마을이다. 순창농업협동조합이 있으며, 옛날에는 옥천금융조합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순창향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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