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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대신 사적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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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4월 14일(목) 10:55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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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성황대신 사적현판 2점은 소나무 판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그 크기는 가로 180cm, 세로 54cm로 모두 73행의 글자가 세로로 쓰여져 있으며, 내용은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인 설공검(1224~1302)을 성황대신 대부인으로 그 신상을 모시고 단오날에 성대한 제사를 올린다는 내용이다.
순창의 성황당이 지금은 훼철되어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지만 전해진 이야기로는 1940년경까
설공검은 자를 상검이라 하고 호를 경제라 하였으며 본관은 순창(淳昌)이다. 그는 1224년(고려 고종 11년)에 아버지인 추밀원 부사 신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공검, 인검 두 아들 중 큰 아들로 태어났다.
참고로 간략한 그의 가계를 살펴보면 설씨로 맨처음 순창에 발을 들여놓고 터를 닦은 사람은 고려 제17대 인종(1122~1146)때 예부시랑을 지낸 설자승이다. 설자승은 서울(개성)에 머물다가 1126년에 이자겸의 남이 일어나자 이를 피하여 이곳 순창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다시 서울로 올라가 예부시랑을 지내고 왕으로부터 순화백에 봉작되자 그때부터 본관을 순창 또는 순창의 또 다른 옛 이름인 옥천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설자승의 선대는 우리나라 성씨중 그의 역사가 오래된 경주 설씨인바 원효대사 설총과 같은 문중이다. 설자승은 바로 설총의 17세손이다.
그리고 설자승이 이자겸의 난을 피해 찾은 곳이 이곳 순창인 것은 그의 처가인 순창 조씨의 터전이 이곳 순창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순화백에 봉작되어 순창에 살기 시작한 설자승은 공검의 고조이며, 그의 아들 즉 공검의 증조인 정숙은 사문박사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며 공검의 조부인 선필은 태자 침사였는데 그는 여덟 아들을 두었고 큰 아들인 신을 비롯한 세 아들이 대과에 급제하는 등 모두 영달하였다.
앞에 간략하게 살펴보았듯이 이 고장에 입향한 설씨는 설자승 아래로 끊이지 않고 대과에 급제한 명문을 이루었다.
이러한 가계에서 태어난 공검은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은 강직하였으며 일찍부터 학문이 탁월하여 문과에 급제하여 고종 45년에 예부난중이 되었다.
*참고 :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38호(지정일:2000.1.13.)
*참고문헌 : 순창의 문화재(순창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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