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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남경대학살과 한중 독립운동

광복 70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거룩한 이름 - 김일두 선생과 항일 의병·독립군의 발자취를 찾아서

2015년 11월 11일(수) 14:01 [순창신문]

 

보/도/순/서
1.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김일두
선생과 지역 구국 투사들
2. 구국 투사들의 이름이 잊혀지고 있다
3. 상해 임시정부와 항주 임시정부
4. 남경대학살과 한중 독립운동
5.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영화 ‘암살’이 우리나라 독립운동과 독립군의 삶,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위대한 이름들을 왜 기억해야 하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또 국민들의 애국심 고취를 위해서는 나라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투쟁사가 영화로 많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도 보았다. 영화 ‘암살’을 본 국민들이 상해임시정부와 항주임시정부를 찾고 있는 것을 보면서 영화의 흥행이 애국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임을 확인했다.
또 상해 임시정부의 운영이 문제점을 갖고 있는데도 ‘더 많은 국민들이 임시정부를 찾아야 하고, 외면하지 말아야 하고, 유지돼야 한다’고 말하던 유학생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역사의 현장이 남아있어야 하는 이유는 다른 게 없었다. 바로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었다.
광복 70년을 맞은 올해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교류전을 펼치고 있다. 사랑이나, 전쟁이나, 죽음에서조차 잊혀지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지 않을까? 후손된 우리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독립투사들의 그 거룩한 이름을 기억하는 것, 그것만이 구국 영웅들이 영원히 사는 길일 것이다. 독립기념관에서 만난 박민영 선임 연구원의 3년여에 걸친 면암 최익현 선생에 대한 연구는 가슴을 뜨겁게 했다. 잊지 않는다는 것은 발로 뛰는 것이었고, 발로 뛴다는 것이 바로 애국이었다.
<편집자 주>


국권을 피탈당한 우리민족은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일제에 항거했다. 많은 한국인들이 일제의 핍박과 수탈에 못 이겨 국내를 떠나 만주 등지에 정착했다. 3.1만세운동 이후 중국 상해에서는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고, 항일 운동을 하던 독립군들 중 홍범도를 주축으로 한 대한독립군 등의 투사들은 그 유명한 ‘봉오동 전투’를 통해 대승을 거뒀다.
김좌진을 위시한 청산리 대첩이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히면서 독립군과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일제의 핍박은 더욱 거세졌다. 이때가 1920년의 일이었다.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과 김좌진 장군의 서로군정서부대에 의해 타격을 입은 일제는 훈춘사건을 일으켰고, 훈춘사건은 일제가 중국 마적단을 매수해 일본 영사관에 불을 지르게 한 다음 일본 군대를 주둔시키는 빌미가 된다.
같은 해 독립군에 의해 타격을 입은 일제는 김좌진 부대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만주 지역 민간인들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 하에 만주지역에 살고 있던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하게 된다. 이것이 ‘간도 참변’이다.
1920년에 만주에서 일어난 간도 참변은 일제가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이때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민간인은 1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후 일제는 1931년 9월 18일 만주 철도 폭발 사건을 조작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만주사변으로 일제는 중국 침략을 본격화했다.
동북 3성의 하나인 라오닝성의 선양에서 일어났던 만주사변은 일제 스스로가 철도를 폭파해놓고 중국인의 소행으로 조작, 철도 보호를 구실로 만주를 침략, 대규모 부대를 주둔시키고 민간인을 대량 학살한 사건이었다.
이 만주사변에서는 중국 민간인 뿐 아니라 만주로 이주해 살고 있던 조선 민간인들이 대량학살된 사건이었다. 만주사변은 ‘만보산 사건’으로 촉발되는데, 만보산 사건은 일제의 획책에 의해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수로문제로 유혈사태를 빚게 된 사건이었다.
만보산 사건의 본질은 지금의 동북 3성인 만주에 세력을 형성한 중국인과 조선인의 민족운동 세력 즉, 반일을 기치로 내건 중국, 조선인들의 공동전선 투쟁에 대해 중국인과 조선인을 이간질해 분열시키려는 일제의 치밀한 음모로 촉발된 것이었다.
일제는 만보산사건을 계기로 만주사변과 중국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고, 대외적으로는 일제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는 술책을 부렸다. 1931년 7월 만보산사건을 획책한 일제는 9월 18일 동북 3성 안에 있던 라오닝셩 선양에서 만주사변을 일으켜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했다. 그 때의 기록은 선양의 ‘9.18 역사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 순창신문


▲1937년 12월 17일 남경을 점령한 일본군대가 남경 입성식을 하고 있다.

독립기념관과 남경 대도살 기념관의 특별 교류전 열려

지난 9월 16일부터 10월 말일 까지 천안 독립기념관은 중국 남경(난징)시에 있는 ‘침화 일군 남경 대도살 우난 동포 기념관(이하 남경 대도살 기념관)’과 함께 광복 70주년을 맞은 한, 중 교류전을 열었다.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남경 대학살에 관한 기록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 녹취록을 영상으로 재현해 내고 있었다.
올해는 우리나라의 광복 70주년인 동시에 중국 항전의 70주년이기도 했다. 독립기념관은 중국 남경시에 있는 남경 대도살 기념관과 공동으로 20세기 초 일본 제국주의가 벌인 침략전쟁 중 자행한 가장 잔혹한 역사로 알려진 중국 남경 대학살을 주제로 ‘남경의 기억, 그리고 평화’라는 특별전을 개최했다. 그러나 홍보가 부족했던 탓인지, 남경의 기록이 전시된 특별관에는 관람객이 거의 없었다.
독립기념관과 남경 대도살 기념관은 교류전을 하면서, “일본은 과거사에 대한 통절한 참회와 진심어린 사죄는 커녕,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며 부정하고 있다”며, “남경대학살의 참혹했던 역사적 진실을 바르게 기억하고 이를 토대로 한 올바른 역사인식으로 20세기의 불행했던 역사를 극복하고 21세기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협력 관계로 발전하는 자리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남경 대도살 기념관에서의 ‘한국인 항일 투쟁’의 역사에 대한 특별 전시는 10월 15일부터 12월 15일 까지 열릴 예정이다. 남경 대도살 기념관 취재 현장에는 한국 독립군의 항일 투쟁이 특별 전시된다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었다. 하루 수 만명이 찾는 남경대도살 기념관에서 일제에 맞서 싸웠던 한국인들의 투쟁담이 중국인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이번 취재에서 확인된 사실은 민족 투쟁의 역사를 기록하고 전시한 기념관 운영 시스템이 양국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중국은 민족의 역사를 기념하고 알려주고 있는 기념관에서 어떠한 형태의 돈도 받지 않았다. 모든 국민이 자유롭게 기념관을 관람하고 있는 반면 독립기념관에서는 주차비를 받고 있었다. 관람을 하려면 자가용을 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라는 취지였을 테지만, 자칫 주차료를 받는 이유로 관람객이 줄고 있다면 독립기념관의 운영 방법은 재고돼야 할 것이다.

남경 대도살의 현장을 찾아
남경시 ‘침화 일군 남경 대도살 우난 동포 기념관’

일제는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고 중국으로 눈을 돌려 대륙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고, 마침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지역을 점령, 중국 전역을 점령키 위한 침략전쟁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이후 1937년 7월 7일 북경 교외의 ‘노구교 사건’을 기화로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략한 일제는 북경과 텐진 등의 도시를 삼키고 8월 13일 상해를 통로로 12월 13일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남경을 침략했다. 노구교 사건은 일제가 노구교 부근에서 야전연습을 하면서 총성을 위장한 자작극을 벌여 중국 침략의 발판으로 삼은 사건이다.

ⓒ 순창신문



12월 초 남경을 침략한 일제는 6주 동안 남경시의 민간인 30만 명을 도륙했다. 12초당 1명을 사살한 것이다. 도시 건물의 3분의 1이 파괴되고, 2만여 건이 넘는 윤간과 강간이 자행됐다.

ⓒ 순창신문


남경대도살 기념관을 찾은 국경절에는 하루 5만 명이 넘는 관람객들이 기념관을 관람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이었다. 더욱이 중국에서는 어디를 가나 소지품 검사를 했다. 기차를 탈 때도 소지품 검사는 기본적으로 이뤄졌다.
남경대도살 기념관에서도 소지품 검사는 이뤄졌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1시간 이상을 기다려 기념관 안으로 들어갔다. 기념관 입구에는 눈물 없이는 못 볼 조각 작품들이 진열돼 있었다. 인간적인 연민의 감정 없이는 지나갈 수 없는 형상들이었다. 조각 작품 아랫부분에는 중국어와 영어로 그날의 참상이 기록돼 있었다.

ⓒ 순창신문


영어적 표현으로는 일제를 ‘악마’로 표현했으며, 통역은 중국어를 번역해 전했다. “악마들이 온다. 악마들이 오고 있다. 여기 강간당한 후 살해당한 아내의 시신을 끌고 도망치는 남편의 처절한 절규가 있다…, 폭격으로 형체도 알 수 없을 만큼 찢겨진 할머니의 시신을 엎고 도망치는 어린 손자를 보라…, 죽은 아기를 안고 절규하는 어머니를 끌고 가는 악마들이 있다. 악마를 피해 한 발이라도 더 멀리 달아나다오…!, 달아나다오!” 사람이 사람한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무런 무기를 들지 않은 어린아이, 노인들, 부녀자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소녀들은 끌고가 일본군의 위안부로 삼았다. 끌려간 소녀들은 아침에는 부상당한 일본군들을 살리는 수혈의 대상이 되고, 낮에는 일본 군인들의 빨래를 해주고, 밤에는 위안부의 역할을 강요당해야 했다. 남경을 점령한 일본군은 1938년 1월 남경에 위안소를 설치했고, 이것은 공식적인 사진 기록으로 남아있다.
1937년 12월 14일 일본에서 발행된 도쿄의 ‘니치니치신문’에는 일본 장교였던 무카이 토시아키와 노다 다케시마가 사람을 누가 더 많이 죽였는지를 시합하는 장면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 당시 보도된 신문에서는 1명이 105명을, 다른 한 명이 106명을 죽였다고 경쟁했다는 내용이다. 이 두 장교는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한 이후 남경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전후 책임을 묻는 중국내 국제군사재판에서 전쟁의 원흉인 일제를 불과 몇 명이 처형되는 수준에서 마무리해 후대에 뚜렷한 교훈을 남기지 못했다.
남경 대도살 기념관에 전시된 기록물에 의하면 일본 군인들이 민간인을 생매장 하면서 그 장면을 놀이로 즐기는 장면도 담겨있었다. 일본 장교의 만행이 보도된 ‘니치니치 신문’ 등은 일본이 비밀스럽게 갖고 있었던 ‘비밀 소장 사진집의 표지’였다.
지난 2006년 4월 3일에는 남경대학살 기념관 확장 공사차 땅을 팠는데, 땅 속에서 대규모의 유해가 발굴되기도 했다. 일제에 의한 남경 시민의 대학살은 중국의 넓은 장강에 붉은 피가 넘실댈 정도로 흘렀고, 인류 문화 역사상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만행이었다고 기록돼있다.

한·중 독립운동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커우공원 폭탄 의거 후,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피신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이에 임정 요인들은 항주로 피신했고, 김구 선생은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 총재의 밀명에 의해 중국 저장성의 가흥(자싱)으로 피신했다.
지난 9월 4일에 재개관한 상해 임시정부의 의미를 임시정부 관계자는, “일제 국권 피탈의 식민지 기간 동안의 중국에서의 항일운동은 ‘한, 중 항일 독립운동을 망라하는 것’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상해 임시정부에는 당시 중국 정부였던 국민당 정부가 임시정부를 지원한 내용이 전시돼 있다. 임시정부 전시물에는 ‘중국의 지원’이라는 코너도 있다.

ⓒ 순창신문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홍커우공원의 의거 후 김구 선생이 일제의 체포 위기에 처하자 장개석 총재가 조직부장이었던 천쿼푸에게 “김구를 보호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중국 절강성 가흥 사람이었던 저보성 지사는 김구 선생을 보호하는데 일신을 투신함은 물론 아들, 며느리 까지 동원해 김구 선생을 지키기에 헌신했다.
또 중국사회과학연구원의 역사학자인 양텐스의 말에 의하면 1933년 5월 장개석 총재와 만난 김구 선생은 100만 위엔을 요구하며, 일본과 조선, 만주 등지에서 폭동을 일으켜 일제의 대륙침략의 퇴로를 차단하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발표했다. 이에 장개석 총재는 무관들부터 훈련시키자고 제의했고, 이후 중국 허난성과 뤄양의 사관훈련학교를 기지로 한국 청년들이 군사훈련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유명한 황푸무관학교에도 한국인 청년들이 입교해 군사훈련을 받기도 했다. 특히 장개석을 총재로 한 국민당 정부는 1940년 광복군 창설 이후 ‘한국 청년 구제비’ 등의 명목으로 정기적으로 비용을 지원하기도 했다.
장개석 총재는 또 암살 영화에도 나오는 김원봉을 주축으로 한 의열단(1919년 창설)에게도 경제적인 지원을 했다. 1942년 결성된 조선의용군은 화북 조선청년 연합회를 확대, 개편해 조선의용군으로 재편, 중국과 함께 항일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상해 임시정부에는 당시의 조선의용군의 항일 투쟁에 대한 한, 중 협력 선언문이 전시돼 있다.
이같은 내용은 상해와 항주 임시정부에 전시돼있는 전시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구 선생과 장개석 총재의 만남과 회견 내용은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데 실질적으로 힘을 쓴 중국 국민당 조직부장이었던 진과부의 말을 통해서 드러난 사실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하기 전까지 중국은 3500만 명의 희생자를 냈고, 그런 희생 속에서도 일제에 굴복하지 않았다. 반면 조선은 을사5적에 의해 피 한 방울 흘려보지 않은 채 나라의 주권을 일제에 바쳤다.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하고, 우리민족의 힘으로 국권을 되찾고자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으로 우리는 주권을 회복하는 계기를 맞지만, 이승만 정권의 친일파 세력의 비호로 인해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가 청산되지 못한 채 우리는 현대를 살고 있다.

이정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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