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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항주 임시정부와 상해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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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거룩한 이름 - 김일두 선생과 항일 의병·독립군의 발자취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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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04일(수) 10:50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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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순/서
1.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김일두
선생과 지역 구국 투사들
2. 구국 투사들의 이름이 잊혀지고 있다
3. 상해 임시정부와 항주 임시정부
4. 남경대학살과 한중 독립운동
5.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영화 ‘암살’이 우리나라 독립운동과 독립군의 삶,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위대한 이름들을 왜 기억해야 하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또 국민들의 애국심 고취를 위해서는 나라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투쟁사가 영화로 많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도 보았다. 영화 ‘암살’을 본 국민들이 상해임시정부와 항주임시정부를 찾고 있는 것을 보면서 영화의 흥행이 애국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임을 확인했다.
또 상해 임시정부의 운영이 문제점을 갖고 있는데도 ‘더 많은 국민들이 임시정부를 찾아야 하고, 외면하지 말아야 하고, 유지돼야 한다’고 말하던 유학생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역사의 현장이 남아있어야 하는 이유는 다른 게 없었다. 바로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었다.
광복 70년을 맞은 올해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교류전을 펼치고 있다. 사랑이나, 전쟁이나, 죽음에서조차 잊혀지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지 않을까? 후손된 우리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독립투사들의 그 거룩한 이름을 기억하는 것, 그것만이 구국 영웅들이 영원히 사는 길일 것이다. 독립기념관에서 만난 박민영 선임 연구원의 3년여에 걸친 면암 최익현 선생에 대한 연구는 가슴을 뜨겁게 했다. 잊지 않는다는 것은 발로 뛰는 것이었고, 발로 뛴다는 것이 바로 애국이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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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순창신문 | |
항주 임시정부를 가다
인천공항에서 황해를 건너 중국 항주 공항까지 1233km를 날아 도착한 항주 공항은 인천 공항의 세련된 건물 모습과는 달랐다. 항주 공항에서 공항버스를 타고 항주임시정부가 있는 서호구 까지는 1시간 30분 정도가 걸렸다. 항주 임시정부는 서호구 호변촌 23호로 불리기도 하고, 장생로 55호로 전하기도 한다.
항주 절강대에서 공부중인 서울 한국외국어대 4학년 고 모(23) 학생은, “김구 선생님은 원래 알고 있었는데, 영화 ‘암살’을 보고 김원봉이란 이름을 기억했고, 임시정부에 와서 김원봉이란 독립투사가 실존인물이란 점을 알고 영화에서보다 더 크게 감동했다”고 말했다.
또 같은 대학에 다니고 있는 서울 동덕여대 3학년 전 모(22) 학생은, “영화에서 본 김구 선생님이나 김원봉 선생님 같은 독립투사들에 관한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그래서 영화를 볼 수 없었거나 안 봤다면 독립운동의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라며, “영화를 볼 때의 감흥을 임시정부에서 다시 한 번 느꼈다”고 전했다.
항주시에 있는 임시정부는 항주시 인민정부에서 지난 2007년 3월에 ‘항주시 역사 건축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지난 2012년에는 내부수리를 마치고 재개관했다.
임시정부 건물은 20세기 1929년에 지어졌다. 이후 1930년대에는 서양의 건축가들이 중국에 들어와 연배식(아파트식)으로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임시정부 건물 또한 당시에는 매우 현대적이고 혁신적인 건축양식으로서, 여러 가구가 함께 사는 지금의 연립주택과 같은 건축 양식이다. 또 중국과 서양의 혼합 건축양식이었다. 그 때는 임시정부와 가까운 서호(차를 타고 다녀야 볼 수 있는 호수)주변에 그러한 근대적 공동주택이 처음 생긴 것이었다.
항주 임시정부는 상해에서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32년에서 1935년까지 지냈던 곳이다. 4월 29일 매헌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일제 수뇌부를 향해 던졌던 도시락 폭탄 의거가 발단이 돼 일제가 임시정부 요인 및 독립운동 단체를 더욱 핍박한 것이다.
상해를 버리고 항주에 새로 둥지를 튼 임시정부에 김구 선생은 기거하지 않았다고 한다. 항주임시정부 최란 부관장 겸 한국관광기획부장은, “상해 임시정부에는 한국인 방문객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여기는 배낭여행하는 한국 관광객 등이 많이 오는 편인데, 올 1월에서 9월 까지 18,600명으로, 중국인 방문객 3만명 보다 적다”고 밝혔다.
항주 임시정부는 항주시 인민정부의 노력으로 국가급 문화재(LSJZ3-5호)로 등록돼 철저히 관리되고 있다. 최란 부관장에게 듣는 항주시 인민정부의 노력은 가히 머리가 숙여질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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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순창신문 | |
올 8월 23일 중국 정부에서 항일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며 중국에 위치하고 있는 각 지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상으로 국가급 기념지 선정 절차를 밟았다. 그런데 관광객이 가장 많고,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상해 임시정부가 아닌, 항주 임시정부가 선정된 것이다. 현재까지 리모델링을 마친 임시정부는 상해와 항주, 중경에 위치해 있는 임시정부다.
항주 임시정부의 선정에 대해 상해나 중경 임시정부 관계자들도 ‘어떻게 항주가 됐는지 모르겠다’는 등의 놀라움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게 최 부관장의 반응이다. 그러면서 최 부관장은, “모든 기회는 준비된 자들에게 있다”며, “상해 임시정부가 피난해 항주로 왔기 때문에 항주에는 자료가 없는 편”이라며, “상해에는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데, 항주는 서호가 있는데도 한국 관광객이 많지 않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히고, “항주에서의 흔적을 찾아 사진으로 남겨 항주문화처에 계속적으로 보내는 노력을 해왔다”고 말했다.
또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 이후 항주시는 인민정부 차원의 노력을 많이 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 국민들이 항주를 많이 알아줬으면 해서 시차원의 홍보를 많이 한다”며,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절강대학에는 ‘한국연구소’가 생길 정도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고, 한국연구소 교수들의 연구로 자료가 많이 발견됐다”고 최 부관장은 전했다.
최 부관장은 항주 임시정부에 얽힌 이야기를 동화처럼 풀어냈다. 항주시 인민정부는 지난 2002년부터 2007년 까지 5년 동안 ‘거금’을 들여 정책적으로 항주임시정부 개관을 위해 노력 한 것으로 전해졌다.
항주 임시정부 건물에 살던 사람들을 아파트를 따로 지어 내보낸 것이다. 64가구를 이주시켰고, 현재 3가구만 남았다. 항주시는 이주하는 세대에 30평 정도의 집을 지어준 것. 임시정부 건물 안에 살던 사람들은 새집을 지어주니 흔쾌히 이주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오래된 목조건물이라 흰개미가 많다는 것이 살던 사람들한테는 힘든 일이었다고.
남은 3가구는 지금의 ‘위치가 좋아 그냥 살고 있다’고 한다. 상해 임시정부를 찾는 사람들은 1년에 40만명에 달한다. 한국 관광객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항주 임시정부의 올 관광객 목표는 2만명이라는 것. 항주시가 건물에 살던 사람들을 집을 지어 내보내는 ‘통큰’ 노력을 하는 것에 비해 한국인들의 관심은 높지 않다. “아쉬운 부분이며, 한국에 돌아가서는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지인들에게 항주 임시정부를 많이 알려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절강대 유학생들의 말이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항주 임시정부에 살던 사람들을 이주시킨 항주시는 개인에게 호텔로 사용하도록 위탁을 했다. 그래서 임시정부 건물에는 호텔과 고급 식당이 영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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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부관장은 임시정부 건물에 얽힌 전설 같은 실화들을 풀어 놓았다. 장의순이라는 사람은 임시정부 건물을 중국에 들어와 있던 일본 고위급 군관들의 숙소 임대 목적으로 지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 고위급 군관들은 중국 남경으로 진입하기 위해 항주만으로 들어와서 항주에 묵다가 상해를 거쳐 남경으로 이동했다는 것. 만주 사변과 중일 전쟁, 남경대학살 등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과 대량학살에도 항주가 다른 지역보다 피해를 적게 본 것은 고위급 일본 군관들이 항주에 와서 살았던 이유였다고 항주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현재 이 건물 호텔을 이용하려면 한화 60만원(인민폐 3000원) 정도가 든다.
임시정부가 있는 땅은 풍수지리상 ‘명당’에 속한다는 것이 관계자의 말이었다. 중국이 청나라 때 항주시 재산의 반을 가진 ‘호설암’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임시정부 땅이 특별히 명당이라 하여 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발소를 하던 한 사람이 땅의 일부를 웃돈을 준다 해도 팔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이발소 자리를 사지 못하고 살았는데, 한 기인이 호설암에게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이니, 네모가 다 채워지지 않으면 재산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끝내 한 쪽 구석의 이발소 땅을 사지 못한 호설암은 그 많은 재산을 지키지 못하고 패가망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전하는 이야기를 믿고 현재 호텔을 위탁운영하고 있는 호텔주는 항주시에 임시정부 자리를 호텔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간청을 하고 있다고 한다.
청나라 때의 호설암과 마찬가지로 호텔주도 명당자리의 네모진 건물에서 임시정부 자리 한 구석이 비어있으면 안된다는 풍수학상의 논리를 펴고 있다는 것.
최 부관장은, “몇 년 전 ‘상해 임시정부가 도시 건축계획에 따라 없앤다’는 말이 나올 때 한국의 한 기자가 항주 임시정부가 훼손 위기에 있다고 잘못 보도한 적이 있었다”고 바로 잡았다.
항주 임시정부는 상해 임시정부와 많이 달랐다. 임시정부 외관과 내부 모두 정리되고 깔끔했다. 입장객들에게 입장료는 받지 않았다. 다만 독립운동에 관한 영상물 시청과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사람에게만 인민폐 10원, 한화로 1500원 정도만 받고 있다. 그리고 희망하는 사람에게만 기부금을 받고 있다. 관계자들의 노력이 눈에 보여 사람들은 입장료와는 관계없는 적지 않은 금액을 기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난 2008년부터 항주 임시정부에 근무하고 있는 최 부관장은,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상호협력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역사를 너무 쉽게 잊는 게 가장 아쉬운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항주 임시정부의 의미는 대한임시정부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함께 했던 곳이라는 깊은 의미가 있다”며, “항주에서 어려운 고비를 만약 넘기지 못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다시 썼을 수도 있는 역사적인 의미의 장소”라고 말하고,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을 지켜준 독립 영웅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라고 의미를 되새기며 호소했다.
상해임시정부 문제점 지적
관리처인 국가보훈처, “노력 개선하겠다” 약속
상해 임시정부 청사는 현재 ‘상해시 황푸구 마당로 306로 4호’, ‘신천지역’ 근처로 상해 도시 중심에 위치해있다.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서울인 경성과 함께 수립된 이후 상해시에 있었던 여러 청사들 중, 1926년부터 1932년까지 가장 오래 사용된 건물로, 중국내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독립운동의 본거지이다.
10년 전부터 상해 임시정부에 대한 철거 관련 말들이 나온바 있으나, 상해시가 지난 2012년 상해시 황포구의 ‘문물보호단위’ 문화재로 지정해 철거 위기 등의 문제는 없을 것으로 관리처인 국가보훈처는 전망했다.
청사는 1988년부터 우리 정부와 상해시가 공동으로 진행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 발굴 조사를 통해 건물(4호)의 존재를 확인, 2년간의 복원작업을 거쳐 1993년 4월 13일 일반에 공개 되었으며, 해마다 연 평균 20만명 이상의 방문객이 방문하는 독립운동 대표 유적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4호 건물이 복원된 이후인 2001년에는 인근의 3호, 5호 건물로 확장해 전면적인 정비와 전시 내용 보완 작업을 거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대한민국 관리처인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이 중국에 있는 임시정부 기념관 근무 직원을 한국 독립기념관으로 해마다 초청해 ‘한국어 교육’과 ‘역사교육’을 시키고 있는데도, 상해임시정부 청사에서는 방문객을 위한 해설사 운영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한국 관광객들이 상해임시정부를 보기 위해 상해까지 가고 있는데도, 일체의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해설 또한 없어’ 임시정부를 관람한 관광객들의 실망은 더해가고 있는 상태다.
실제로 관람을 하고 나온 한국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해 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진 촬영 금지를 가장 아쉬운 부분으로 꼽았다. 해설사가 없어 더 많은 내용을 알고 싶은데, 전시물만 보고 돌아가야 하는 심정이 “허탈하다”는 관람객들도 많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중국이라는 국가적인 차이를 인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올해 들어 관람객들이 많아진 이유는 영화 ‘암살’에서 찾을 수 있었다. 관람객 3명 중에 1명이 영화 ‘암살’을 보고나서 “독립군과 독립운동에 대한 감흥, 궁금함이 발동해 임시정부를 찾게 됐다”고 밝혔다.
거제도에서 왔다는 상해 소재 대학 한국 유학생은, “중국이 부분적으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기념지를 철거하지 않고 관리, 안내해 주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것 같다”고 또 다른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상해임시정부를 찾는 관광객들의 불만에 대해 청사 유지, 보수와 관련 관리를 맡고 있는 국가보훈처 나라사랑정책과 이수현 담당자는, “상해시가 공안(경찰)을 배치하고 위압적인 분위기를 내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외교문제나 국가적인 문제로 관여할 사항은 아닌 것 같다”며, “중국과의 관계는 단발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지해가야 하는 관계인만큼 신중함이 요구된다”고 말하고, “관광객들이 아쉬워하는 부분인 사진촬영 금지 문제와 해설사 운영 문제는 상해 영사관에 공문을 보내 개선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지난 9월 4일 재개관식을 한 상해임시정부는 2013년 6월 한·중 정상회담 시 중국내 독립운동 유적지 보존 요청이 계기가 돼 2014년 1월 하얼빈 안중근의사 기념관 개관, 5월 시안 광복군 제2지대 표지석 설치, 올 4월 상하이 매헌기념관 재개관의 연장선상에서 추진됐다.
상해임시정부는 상해시 정부와 대한민국 독립기념관 등 한-중 양국의 협력으로 임정 요인들이 상해를 떠난지 60년만인 1993년 4월 13일에 1차 복원했다. 이후 2001년 12월 임정 건축물을 전면 보수하고 전시 시설을 확장하는 등 역사적인 유적지로 다시 태어났다.
상해 임시정부 역사에서 1930년 1월 ‘한국독립당’의 창립과 1931년 ‘한인애국단’의 조직은 당시 임시정부 역사상 빛나는 투쟁을 이루는 단초가 됐다. 윤봉길, 이봉창의 의거 등이 당시 임시정부 국무령이었던 김구 선생에 의해 실행돼 왜적의 심장을 가격한 역사적인 의거로 남았다.
상해임시정부의 요인들이 상해를 버리고 항주로 이동하는 계기가 바로 상해 홍커우 공원의 윤봉길 의사의 폭탄 의거였다. 1932년 4월 29일 한인애국단 소속의 윤 의사는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제의 ‘상하이 사변 전승 기념’ 및 ‘일본 국왕 생일 축하 기념식’ 식장에서 폭탄을 투척, 의거를 단행했다.
항주 임시정부와 상해 임시정부의 현대적인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중국에 있는 여러 임시정부는 한민족의 맥을 이어준 ‘독립운동의 성지’로서 한국 국민들의 마음속에 살아 숨쉬고 있으며, 한·중 양국의 우의를 발전시키는 없어서는 안 될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번 기획을 통해서는 소개하지 않은 중경 임시정부의 의미는 오늘날의 한 중 관계를 생각해볼 때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중경 임시정부는 임시정부 시절 임정 요인들이 배고픔을 잊고 지낼 수 있었던 곳이었으며, 이러한 배경에는 중국 정부의 보살핌과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 기획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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