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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거룩한 이름 - 김일두 선생과 항일 의병·독립군의 발자취를 찾아서

1.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김일두 선생과 지역 구국 투사들

2015년 10월 21일(수) 10:28 [순창신문]

 

보/도/순/서
1.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김일두 선생과 지역 구국 투사들
2. 구국 투사들의 이름이 잊혀지고 있다
3. 상해 임시정부와 항주 임시정부
4. 남경대학살과 한중 독립운동
5.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영화 ‘암살’이 우리나라 독립운동과 독립군의 삶,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위대한 이름들을 왜 기억해야 하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또 국민들의 애국심 고취를 위해서는 나라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투쟁사가 영화로 많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도 보았다. 영화 ‘암살’을 본 국민들이 상해임시정부와 항주임시정부를 찾고 있는 것을 보면서 영화의 흥행이 애국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임을 확인했다.
또 상해 임시정부의 운영이 문제점을 갖고 있는데도 ‘더 많은 국민들이 임시정부를 찾아야 하고, 외면하지 말아야 하고, 유지돼야 한다’고 말하던 유학생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역사의 현장이 남아있어야 하는 이유는 다른 게 없었다. 바로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었다.
광복 70년을 맞은 올해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교류전을 펼치고 있다. 사랑이나, 전쟁이나, 죽음에서조차 잊혀지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지 않을까? 후손된 우리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독립투사들의 그 거룩한 이름을 기억하는 것, 그것만이 구국 영웅들이 영원히 사는 길일 것이다. 독립기념관에서 만난 박민영 선임 연구원의 3년여에 걸친 면암 최익현 선생에 대한 연구는 가슴을 뜨겁게 했다. 잊지 않는다는 것은 발로 뛰는 것이었고, 발로 뛴다는 것이 바로 애국이었다. <편집자 주>

ⓒ 순창신문


▲ 독립군 김일두 선생의 생가터 또한 흔적조차 없지만 태생지인 동계 추동마을을 방문해 선생에 대한 일화를 듣고 있다.


독립기념관 하나 없는 우리지역

영화 ‘암살’이 국민들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청산되지 않았던 일제의 잔재에 대해,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과거사적 청산 문제에 대해, 그러면서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의 일본의 행보에 대해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음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인 일본이 가당치 않게도 피폭 사실만으로 피해국임을 자처하면서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자위대 발동을 법제화하기 위한 헌법 개정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러한 아베정권을 보면서 전쟁은 과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우리나라가 역사 속에서만 침탈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베의 자위대 발동권의 법제화는 무서운 의미를 갖고 있다. ‘일본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선제적으로 공격할 수 있음’을 헌법에 명시하는 것으로, 과거 일본이 우리나라와 중국을 집어 삼키기 위해서 거짓 명분을 만들고,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사건을 조작해 전쟁을 일으켰듯이 아베의 일본은, 언제든지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할 것이다.
을사조약 이래 나라를 빼앗긴 채로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삶이 얼마나 곤궁하고 처참했을지를 잊어서는 안 되는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라를 잃고 조선인으로도, 일본인으로도 살아갈 수 없었던 조상들은 일제의 핍박을 피해 만주를 향해 보따리를 싸야 했다. 그 중 독립운동에 뛰어든 독립투사들의 삶을 우리는 ‘암살’ 같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고, 추측해볼 뿐이다.
나라를 위해 부모와 처자식을 돌보지 않고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독립투사들의 삶을 아무리 시대 탓으로 돌린다 해도, 사람 사는 인정이 이와 같아서는 안 되지 않을까? ‘독립운동가’라는 호칭이 호칭으로만 끝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짚어볼 일이다.
우리지역에도 많은 의병과 독립군이 있었다. 지역에서도, 나라 안에서도 잘 알려진 면암 최익현 선생의 의병활동과 항일 의식을 비롯해 양윤숙, 최산홍, 김일두 선생의 항일 투지와 독립 정신은 후손 대대로 이어져야 할 거룩할 정신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면면히 이어져 길이 후세에 남겨야 할 구국 투사들의 행적을 기리는 기념관 하나가 건립되지 않고 있다. 지역의 관변, 사회단체들은 다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정부와 행정으로부터 보조금을 받고, 해마다 미역이나 김을 팔아서 무엇에 쓰려는 것일까? 행락철에 단풍 구경가고 잔치를 열려는 것일까? 사회, 관변 단체들의 존립의 의미가 희석해질 수밖에 없는 세태가 아닌가? 일제의 만행과 수탈을 겪어보지 않은 우리 또는 어린 세대들은 무엇을 보고 역사를 기억할 것인가?
우리는 흔히 미래 제1의 강대국을 중국으로 꼽는 경우를 종종 본다. 미국을 넘어 중국이 제1의 패권국이 될지, 아닐지는 지켜봐야 알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중국의 저력은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사회주의에 있지 않다. 중국의 무서운 힘은 ‘과거를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취재에서 남경대학살 기념관을 둘러봤다. 그곳에서 소름 돋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중국인들의 힘이었다. 그 힘의 원천은 ‘애국’이었다. 어린아이부터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끝도 보이지 않게 이어지는 줄과 비장한 표정들. 그들의 표정 어디에서도 역사를 망각하는 일 따위는 벌어질 것 같지 않았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차치하고라도 우리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자. 어른들은 선진지 견학이라며 다른 나라, 다른 지역을 돌아다니기에 바쁘다. 학생들 또한 마찬가지다.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할 학생들이 학기 때, 방학 때 가고 있는 곳에 천안 ‘독립기념관’은 없다.
독립기념관은 우리의 살과 피, 뼈로 이루어진 곳이다. 그곳에 우리의 정신이 있고, 그곳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 정신을 일깨우지 않고 어떻게 애국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중국인들의 힘이 ‘정신’에 있음을 본 것에서 끝나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정신을 되살리고, 우리의 굳건한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핍박과 침탈의 역사가 있었음이 기억돼야 한다.
지자체장의 치적을 위해 해마다 12억원이 넘는 막대한 예산으로 열리고 있는 축제의 규모를 줄여서라도 독립투사들의 무덤이, 기념비가 관리돼야 하며, 애국의 고장임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념관이 지역의 자랑으로 우뚝 서야 한다.

지자체장 치적예산이 우선,
드높은 정신은 뒤로…

독립군 김일두 선생의 업적은 동계면에 세워져있는 추모비와 전주에 있는 기념비 등에 기록된 것이 전부다. 목숨을 바쳐 의병이나 독립군으로 몸담고 항일 투쟁을 했던 투사들의 일대기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정부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이 나라와 정부가 있기까지 구국 투사들의 살신성인의 정신이 없었다면 국가라는 형태의 한 나라가 어떻게 존립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구국 투사들의 일대기와 업적을 찾아내고 기록하며 후손들을 챙기는 일에는 너무나 미온적이다.
독립투사들의 후손들은 가난에 찌들려 길거리에서 박스를 줍는 등의 피폐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친일파의 후손들은 권력과 재력, 명예를 모두 움켜쥐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광경은 구국항쟁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도 정부와 지자체는 구국 투사들의 후손을 챙기는 일에 앞장서야 하나, 광복절에만 선물 꾸러미 하나 건네며 생색내기에 그치고 있다. 순창군에서는 그나마 생색내기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다. 또 독립군의 후손을 찾는 일에도 관심이 없다.
구국 투사들의 추모비가 잡풀에 싸여 참담한 광경을 하고 있어도 지자체에서는 무엇 하나 노력을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역사는 과거일 뿐 현재 필요한 것은 지자체장의 치적 만들기가 우선이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보면서 하나 뿐인 목숨을 아낌없이 버린 구국 투사들의 이름은, 사진은 지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추모비가 잡풀에 둘러싸여 형체를 제대로 볼 수 없어도 군에서는, 사회단체에서는 예산이 없다는 말로 상황을 종결짓고 만다. 이는 예산이 없는 것이 아니라, 관심이 없어 예산을 세우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순창신문


▲ 구 동계중고 뒤편에 세워진 독립군 김일두 선생의 추모비- 어느 누구도 관리를 하지 않아 잡풀이 우거져 다가갈 수조차 없는 상황. 드높았던 선생의 구국투지는 지역에서 외면당하고 버려졌으며 잊혀지고 있다.


열일곱에 구국의 길로…, 한 평생을 몸 바친
독립군 김일두(金一斗) 선생의 발자취

추산 김일두 선생은 1891년 4월 12일에 동계면 추동마을에서 김해김씨 김봉진 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동수이며, 호가 추산이다. 추산은 경암 김교준 선생에게 한학을 배워 14세가 되던 해에는 사서삼경을 통달해 천재로 촉망 받았다.
김일두 선생은 장대한 체구에 위엄이 있는 얼굴로, 마음속은 옥같이 깨끗해 선함을 즐기고 의를 행하는 성품이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던 중 1905년 일제의 외교권 박탈 등의 강압적인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명성왕후의 조카로 알려진 민영환이 자결하는 등 일제의 야욕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뜻있는 선비들은, 읽던 책을 뒤로 하고 의병에 가담하는 형국이었다.
소년 김일두 선생도 그 때 원주의 진위대장 민긍호 의병 대장을 찾아가 의병이 돼 일제의 총칼에 맞서 항일 항전을 벌였다. 그러다 충주 결전에서 민긍호 의병대장이 전사하자, 이재후 의병과 함께 1년간 의병부대를 이끌며 항일전을 진두지휘했다.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우리나라를 집어삼킨 국권피탈의 상황이 벌어지자 김일두 선생은 한일병탄에 대항할 반항회를 결성했다. 그 때 선생은 영국인이 경영하는 태화상회에 많은 폭탄이 있음을 탐지하고 전재산을 방매해 폭탄을 구입, 동지들에게 나눠주며 전국의 경찰서를 일시에 폭파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일제의 경찰들에게 발각돼 결국은 중국 상하이 망명길에 오른다.
그 후 중국 순현 대빈구에서 한약방을 하면서 독립군 최전구, 이동수, 백정기 의사 등과 함께 ‘대한유생독립단’을 조직해 단장으로 추대되고, 독립군 병력을 지휘하는 한편 대종교에 입교해 시교원 참교로 동포들에게 단군사상을 통한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그 뒤 지금의 서울인 경성에 잠입해 ‘독립의군부’를 조직해 맹활약을 하던 중 일본 헌병 경찰에 발각돼 또다시 중국으로의 망명길에 올랐다.
재차 망명길에 오른 선생은 고평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독립군 중장으로 추천돼 수십 차례에 걸친 일제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다 1919년 3.1만세 운동이 벌어지고 상해 등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신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서 병법에 대한 것을 가르쳤다. 1909년 신민회 등과 관련된 만주 신흥무관학교와 같은 학교는 아니었으나,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관학교였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후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로 건너가 통신 책임자로 활약하다 다시 경성으로 잠입, 국내 곳곳을 돌며 독립자금을 모으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와 춘천 형무소에서 5년간 복역 후 다시 북만주로 망명했다.
만주에서 또 다시 국내로 잠입한 선생은 황병길 등과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체포돼 전주 형무소와 서대문 형무소에서 3년간 재복역했다.
이후에도 선생은 독립운동을 지속하다 발각돼 구류 등 미결 재판에 넘겨지기를 몇 번, 전· 후 십수년의 모진 옥고를 치뤘다. 출옥 후에는 지리산으로 피신, 8.15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는 귀가해 3.1동지회를 조직, 건국에 힘쓰는 한편 김구 선생과 함께 남북통일정부 수립에 전력투구했다. 그러나 김구 주석의 피격후 고향에 내려온 선생은 옥살이 때의 고문의 여독과 주석을 잃은 슬픔, 해방을 맞은 나라 안의 어수선한 형국과 아이러니한 상황에 할 말을 잃고 실의에 빠져 고독하게 지내다 1955년 4월 14일 6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구 동계중학교 뒤뜰 아무도 찾지 않는 공터에 외롭게 서있는 선생의 추모비에 새겨진 덧없는 추모시만이 선생의 거룩한 희생을 예찬하고 있다.
‘푸른 잎새로 겨레를 감쌌던 거목이시여! 국경선에 어리던 그 기약같이 믿었던 모습이여~!(중략)’
항일 의병이었고, 독립투사였던 김일두 선생은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 548에 안장돼있다.

우리지역 출신의 독립군 조동현 선생
일제 강제 징용에서 탈출 광복군 제3구대 입대, 작전 중 전사

이번 취재에서 새롭게 알게 된 독립군 조동현 선생은 지난 1982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됐다.
우리지역 출신으로 1945년 5월 광복군 작전 수행 중 전사한 선생은 일제에 의해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일본군에 입대되는 처참한 상황을 맞았으나, 중국 중북호북성에서 일본 군대를 용감히 탈출해 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에 입대, 혁혁한 공을 세웠던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45년 중국 제9전구 지역에서 광복군으로 작전을 수행하던 중 전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 순창신문


전주 덕진공원에 세워진 김일두 선생의 추모비.
공원에 있어서인지 단정하게 정돈된 모습이 순창에 있는 추모비와는 사뭇 비교가 되는 모습이다.

이정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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