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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의 거룩한 이름들이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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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순창신문이 그 뜻을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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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8월 12일(수) 11:13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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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는 올 ‘국군발전특별기획전’을 열고 의병 및 광복군 등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의사들을 발굴해 독립유공자로 이름을 올렸다.
우리지역 순창에도 수많은 의사와 지사들이 있었다. 이미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면암 최익현 선생을 비롯 설진영, 김상기, 국동완, 최산홍, 조유, 한응성 선생 등과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김선여, 임백, 김일두 선생 등 일일이 나열하기 힘든 구국 투사들이 이 땅을 지켜왔다. 올해로 광복 70주년을 맞은 군민들의 가슴에는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지역 구국 투사들의 거룩한 이름이 감사와 송구함으로 물들어있다.
본지는 학문이 높고 구국의지 또한 강했던 최익현 선생을 비롯,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장을 표창 받은 김일두, 김선여 선생과 양춘영 의병장, 남겨진 사적 기록이 없어 아들 임대량과 함께 순절했지만 그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임백 지사 등에 대해 지속적인 조명을 해나가고자 한다. 또한 임백 지사의 발자취를 알고 있는 후손들의 연락이 있기를 함께 기대해본다.
조선의 마지막 선비 면암 최익현(崔益鉉)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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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순창신문 | |
면암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은 구한말 수많은 의병장 가운데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행적을 보인 의병장으로 손꼽힌다. 그는 평생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지조를 지킨, 외세에 맞서 의병 항쟁을 벌이다가 적국 일본 땅인 쓰시마(對馬島-지금의 대마도)에서 순국했던 조선의 마지막 선비였다.
몇 년 전 본 기자가 일본 대마도에 갔을 때 본 것은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더 추앙받고 있는 모습이었다. 일본인들은 지금도 최익현 선생의 사당과 추모비 앞에서 존경과 경의를 표하고 있다.
최익현 선생은 1833년 경기도 포천군 가범리에서 최대(崔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는 최광조(崔光肇), 할아버지는 최극경(崔克敬), 어머니는 이계진(李啓晉)의 딸이었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찬겸(贊謙)이며, 호는 면암(勉庵)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초명(初名)을 기남(奇男)이라고 했다. 선생은 집안이 가난해 4세 때 단양으로 이사한 것을 비롯, 여러 지방으로 옮겨 다니며 살아야 했다.
9세 때 김기현(金琦鉉)에게 유학의 기초를 배우고, 14세 때에 성리학의 거두인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1792~1868)의 문인이 돼 『격몽요결(擊蒙要訣)』·『대학』·『논어』 등 유학의 기초를 배웠다. 이를 통해 우국애민적인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과 위국충의사상 및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론으로 승화, 발전시켜 자주적인 민족사상으로 체계화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화와 박제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등 을사5적(乙巳五賊) 처단을 주장한 「청토오적소(晴討五賊疏)」를 올린 일 등은 위정척사사상이 단순히 과거로의 복귀가 아니라 한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또 선생은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발표해 항일투쟁을 호소하고, 포고문과 신문을 통해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에 나선다. 경제적 자립을 통해 민족경제를 살리기 위한 운동이었다.
하지만 조정에서 그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익현은 1906년 1월에 충청남도 노성의 궐리사(공자를 모신 유림의 사당)에서 원근의 유림을 모아 강연을 열고 시국의 절박함을 알리며 일치단결해서 국권 회복에 동참해 줄 것을 촉구했다. 이 강연에는 1896년 진주의병진에서 활약했던 경남 합천의 정재규가 10여명의 지사들과 함께 참석했고, 제천에서는 유인석 등도 동참했다.
1906년 2월 21일(양력 3월 15일), 면암 선생은 가묘(家廟)에 하직을 고하고 집안 사람들과 이별하고, 집을 떠나 충남 홍주의 유학자 민종식(閔宗植)이 구성한 의병과 연대해 항일 의병투쟁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상소만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다시 한 번 참담함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판서 이용원, 김학진, 참판 이성열, 이남규 등에게 서신을 보내 함께 국난에 대처할 것을 바랐으나, 한 사람도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선생은 애제자였던 고석진의 소개로 전북 태인의 종석산(鍾石山) 밑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임병찬(林炳瓚)을 만나게 된다.
임병찬은 낙안군수까지 지내다가 왜인들의 정치를 마다하고 사퇴한 올곧은 선비였다. 임병찬이 “호남의 선비들이 장차 의병을 일으키려 하는데 모두 선생을 맹주(盟主)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곳으로 가셔야 하겠습니다.”고 고하자 선생은 남으로 내려가 영호(嶺湖)와 호서(湖西)가 기각의 행세를 갖추어 서로가 성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뜻을 굳힌 다음 거사에 앞서 세의 규합에 힘썼다. 거사 장소는 태인의 무성서원으로 정한 뒤, 면암은 동참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담양으로 내려가 호남의 유림 지도자급 인사들을 만났다. 당시 기우만, 이항선, 장제세, 조안국 등 50여 명의 유림 지도자들이 면암의 명에 따라 모였다. 모인 이들은 모두 면암의 지시에 따라 호남 각 지역으로 격문을 돌려 외세를 척결하고 부패한 관리들을 처단키 위해서 거병함을 알리고 동참을 호소했다. 당시 백발의 면암은 이렇게 호소했다.
“왜적이 국권을 빼앗고, 적신이 죄약(罪約)을 빚어냈다. 구신인 나는 이를 차마 그대로 둘 수 없어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이제 대의를 만천하에 펴고자 한다. 승패는 예측할 수 없으나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죽음을 무릅쓴다면 반드시 하늘이 도울 것이다.”
이후 두 달 남짓 동안에 시골 포수들로부터 총칼이 모아지고 2백여 명의 우국지사가 모여들었다.
4월 13일(양력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있은 선생의 강회(講會)는 항일의병의 역사적 분기점을 이룬 날로 기록된다.
“지금 왜적들이 국권을 농락하고 역신들은 죄악을 빚어내 오백년 종묘사직과 삼천리 강토가 이미 멸망지경에 이르렀다. 나라를 위해 사생(死生)을 초월하면 성공 못할 염려는 없다. 나와 함께 사생을 같이 하겠는가!”
1906년 음력 윤4월13일(양력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출발한 최익현과 임병찬의 의병부대들은 모두 엄격한 군율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고, 이에 놀란 태인군수 손병호(孫秉浩)는 저항할 엄두도 못내고 달아났으며, 의병은 태인을 무혈 점령했다.
의병들은 또 정읍에 무혈 입성해 총칼과 탄환을 걷고 군사를 모집했다. 또한 좌장인 면암은 노구를 이끌고 일본을 엄히 꾸짖는 <기일본정부서(奇日本政府書)>를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성리학의 도리를 저버린 일본의 행위를 조선에 대한 배신행위로 규탄하면서 그 죄상을 16가지로 나누어 규탄하고 나아가 동양평화를 위한 일본의 각성을 촉구했다.
“(전략).....우리 국권을 침탈하고 우리 백성을 학대하는 전후에 맺은 여러 늑약을 모두 만국공론을 부쳐서 취소할 것은 취소하고 고칠 것은 고쳐서 기필코 우리나라 자주권(自主權)을 회복하고 우리나라 백성들이 어육 참화를 면하게 하는 것이 신의 소원이요. (중략)....그러나 만일 하늘이 우리나라를 돕지 않고, 이 뜻을 이루지 못할진대 놈들에게 유린 당하기 전에 신 이 먼저 놈들과 싸워 패하여 죽는다면, 악귀가 되어 기어코 원수놈들을 몰살시켜 이 땅에 용납못하게 하겠습니다. 이로 인하여 신을 함부로 백성을 동원하는 반역이라 할지라도 신은 돌아보지 않을 것입니다.”
정읍을 떠난 의병은 내장사를 거쳐 6월 6일 순창 구암사에 진을 치고, 6월 7일 순창읍으로 들어와 순창객사에 주둔했다. 순창군수 이건용이 의병에 가담해 최익현, 임병찬 등의 의병은 많은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으며, 소총과 화약 등 무기를 수합하고, 각지에서 도착한 의병의 수가 약 800여 명에 이르렀다.
6월 8일에는 곡성에 무혈 입성해 일제 관공서를 철거하고 세전과 양곡을 접수하였고, 바로 남원으로 밀고 들어가려 했으나, 10일 순창으로 회군할 수밖에 없었는데, 남원의 방어가 워낙 견고했기 때문이었다.
6월 11일 광주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해산을 종용하였으나, 면암 선생은 “이미 소장(疏狀)을 올려 의병을 일으키게 된 연유를 말씀드렸으니 나의 진퇴는 관찰사의 직권으로 지휘할 바가 아니다”는 답장을 보내 거절했다. 그러나 곧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종황제의 조서가 내렸고, 이 명령에 따라 일본군이 아닌 전주관찰사 한진창(韓鎭昌)이 이끄는 전라 감영의 진위대가 의병의 진격을 막았다. 진위대 측은 “대감이 민병을 해산시키지 않으면 전진이 있을 뿐”이라는 통보를 세 차례나 보내왔다. 선생은 임병찬에게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고 난 후 같은 동포끼리 서로 박해를 하는 것은 원치 않으니 의병을 즉시 해산시키라고 명령했다. 쉽사리 흐트러지지 않던 의병들은 눈물을 머금고 해산하였고, 선생 곁에 끝까지 남은 임병찬, 고석진 등 13의사와 함께 순창에서 체포돼 4월 23일(양력 6월 14일) 서울로 압송, 우리 사법부가 아닌 일제에 의해 재판을 받게 되고, 일본군 헌병사령부에 구금됐다. 4개월 후 다시 대마도(쓰시마)로 압송돼 위수부 경비대에 갇혀 있다가 그곳에서 함께 갇힌 임병찬에게 유소(遺疏)를 구술하고 음력 11월 17일(양력 1907년 1월 1일) 순국하였다. 이후 석방되어 돌아온 임병찬이 전한 최익현의 유소(遺疏)와 마지막 모습은 다음과 같다.
“신의 나이 74살이오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다시 찾지 못하여 4천년 화하정도가 더럽혀져도 부지하지 못하고, 삼천리 강토 선왕의 적자가 어육이 되어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대마도에 도착한 직후 일본인 장수가 갓을 벗기고 머리를 깎으려고 협박하자 최익현은 그를 꾸짖고 “목을 끊고 죽을지언정 머리를 깎고 살 수는 없다”며 단식을 감행했다. 곧 일본인 대장이 와서 사과하며 밥 먹기를 권했지만 “너희들이 주는 밥은 먹을 수 없다”며 단식을 계속했다. “음식 값은 대한에서 보내온 것”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3일 만에 단식을 풀었다. 그러나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데다가 풍증(風症)까지 겹쳐서 결국 그곳에서 순국했다. 그의 장렬한 최후에 감동한 일본인들은 그의 시신 환국을 전송하며 존경의 뜻을 표했다고 한다.
유해는 1906년 11월 20일(양력 1월 4일) 일본 대마도 수선사(修善寺)에서 임병찬이 제문을 읽은 후 이틀 후에 부산 초량에 닿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유림과 주민들은 눈물을 머금고 나와 맞이하였으며 영구(靈柩)를 붙들고 통곡했다. 하늘 높이 만장에는 “춘추대의 일월고충’(春秋大義 日月孤忠)” 이라고 쓰여 있었다.
상여가 마련돼 정산(定山) 본가로 운구하는 곳에 따라 노제로 전송하고 울부짖는 민중들 때문에 하루에 10리 밖에 운구하지 못했다. 영구는 구포, 김해, 성주, 공주를 거쳐 15일 만에 정산에 도착하여 그 해 4월(양력 5월) 충청남도 청양군 노성 무동산에 안장됐다.
이후 1907년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국도변에 안장되었다가,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21-1번지로 이장됐다.
1973년 4월 9일 예산 모현사업회(慕顯事業會)에서 최익현의 춘추대의비(春秋大義碑)를 묘소가 있는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세웠다. 제향은 1914년에 건립된 사당인 모덕사(慕德祠)[충청남도 청양군 목면 송암리 소재]와 포천·해주·고창·곡성·순화·무안·함평·광산·구례 등에서 봉향되고 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에 대한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저서로는 『면암집(勉庵集)』 40권, 속집 4권, 부록 4권이 있다.
한편 쓰시마 곳곳에는 최익현의 숨결이 깃든 유적지가 남아있어 후손들에게 많은 교훈을 일깨워준다. 수선사(修善寺)에 모셔진 위풍당당한 영정에서 진정한 대한민국 선비의 표상을 엿볼 수 있다. 현지 일본인들은 그에 대한 추모행사를 정례적으로 거행한다. 참된 삶의 가치관을 본받고자 하는 마음은 민족과 국적을 초월하여 모두가 같다고 할 수 있다.
양반 유생들이 주로 참여해 일어선 1895년 을미의병과 달리 1906년 을사의병은 나라를 잃은 민중들의 봉기였다. 나라를 잃은 슬픔은 지위가 높은 자이든 낮은 자이든, 부자이든, 가난한 자에게든 동일했다. 그러나, 각지에서 들고 일어선 민중들의 분노는 일제의 조선을 향한 야욕을 잠재우지 못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의 민중들은 나라를 잃은 설움을 감내해야 했다.
최근까지 면암 최익현의 위정척사사상은 당시 국제 정세를 읽지 못한 시대착오적인 쇄국정책이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조선을 그대로 두자는 것이 아니라, 개혁을 하되 원칙 있는 ‘자주적 개혁을 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면암 선생의 위정척사사상은 구국 의병항쟁의 불씨를 점화시켰을 뿐 아니라 ‘나라가 흥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 우리의 마음을 잃지 않는데 있으며, 국권 없이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진리를 가르쳐 일제 강점기 민족운동의 지도이념으로 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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