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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항(龜項)마을
구항마을의 지세는 무이산에서 북동맥 태자 앞 치얄봉으로 박환하여 남맥 금산 뒤 설고개에서 전환(轉換) 진룡(進龍)하여 고재봉을 이룩하고 중중서진(重重西進) 낙맥하에 서향으로 구항마을이 있다.
이 구항마을은 지형상이 금구하산형(金龜下山形)으로 거북의 목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구항이라 이름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 마을은 진주강 씨 홍국(洪國)께서 이곳에 터를 잡고 이조 인조 때인 1600년경에 금과면 연화동에서 이곳에 입향했다고 전해오며, 현재는 13대손에 이르도록 집성촌을 이루어 이어오는 마을이다. 이분은 사장(射場) 활구지 훈련장 보강과 무과 별시관리에 여생을 공헌했다 전해온다.
마을 입구에 수효정이란 제각이 있고 통일교회가 위치하며, 이 마을에 신도가 많다. 마을 앞에 1997년 정자를 건립했다. 면사무소에서 동쪽으로 100m, 새터는 1945년부터 형성된 마을로 사정마을과 연접되어 있다. 농업협동조합 사무소, 연쇄점, 다방, 이발소가 도로변에 있다.
사정(射亭)마을
용심산 동록(東麓)에 복정리가 있어 현재 4호(당초 10호가 있었음), 남쪽에 활고지와 평지(平地)에 사정(射亭)이라 하며 1914년 행정구역개편 시 용산리에 속했다가 1971년 행정분리 시 사정으로 분리되었다.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전해오는 내용은 활고지 서편에 활터가 있었고 당산주변이 휴식처였다고 하며, 그 앞 일대가 훈련장 군마 조련장이 있다 하며 이 지역 주민뿐 아니라 금성산성 군인들도 이곳에서 조련했다 한다. 순창에서도 이곳에 와서 별시(別試)를 보았다고 전한다.
그러했기에 정유재란 당시 순창군수 배경남은 왜군이 남원부를 함락했다는 소식만 듣고 놀라 금성산성으로 피신해 버리자 군민은 혼비백산하여 우왕좌왕하게 되니 왜군은 물밀 듯 무인지경으로 순창에 침입하게 되었다. 일부는 원통산으로 피난했고, 금과 풍산쪽 아미산과 설산쪽으로 피난간 사람은 왜병의 만행으로 많은 인명이 살상당하였다.
일부 왜군이 이곳 금성산성 쪽으로 침입하게 되자 이곳 주민은 조유 장군과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으나 2명의 오장군이 선봉이 되어 창의군을 조직하여 이곳 사정벌에서 대격전을 치뤘다. 전세가 불리하여 백암벌로 밀려 이곳에서 모두 장렬히 전사하게 되니 그 시신도 찾지 못하고 초혼장(招魂葬)으로 주유 장군은 덕진면 백암무승동에 안치되어 그 후손이 관리하고 있으나 한 오장군 묘는 옛 덕진초등학교 뒤 배실마을 내백호 날끝에 모셔 태촌마을 오대식이 관리하고 있다. 또 한 다른 오장군 묘는 태촌 구룡골 삼지내 위산 밑에 역시 초혼장으로 봉안했으나 후손이 없어 폐허가 되어 있으니 안타깝다. 이는 행정이 복원하여 후예들의 애국정신을 함양하는 지주로 삼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팔덕면사무소, 초등학교, 지서(경찰서), 우체국이 모두 이 사정리에 있으며 지방도(순창-정읍)는 강천산 군립공원과 내장산 국립공원 관광지를 88고속도로가 개통된 이후에는 경상도, 남원, 구례, 곡성 관광객이 모두 이 도로를 이용해야 하니 교통량이 급증하고 있다.
이 마을 뒤 동록에 무량서원이 1960년에 건립되었다. 이 마을은 5대 이상 집성성 씨(集成姓氏)가 없음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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