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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역민의 충절과 역사문화가 오롯이 남아있는 강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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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산을 말하다
대한민국 최고의 공원으로 거듭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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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2월 11일(수) 11:27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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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산에는 지역민의 충절이 서린 ‘삼인대’가 있다. 삼인대는 지난 1973년 지방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됐지만, 지역민들은 국가지정 문화재 승격을 고대하고 있다. 지역민들의 국가지정 문화재로의 승격을 고대하는 데에는 삼인대에 남아있는 정신이 크기 때문이다.
삼인대에는 한 임금, 한 왕비만을 생각하는 신하된 도리의 충의 정신과 임금과 왕비를 어버이로 생각하는 효의 정신,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순간에도 친구를 생각하는 의로움의 정신이 담겨있다.
따라서 문화재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정신문화’이며, 삼인대에서 볼 수 있는 정신문화에 대한 관리나 전수는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뤄져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에 지역민들은 삼인대에 대해 국가지정 문화재 승격을 촉구하고 있다.
한 해 200만여 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는 강천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군립공원이다. 맑은 물과 공기, 음이온은 사람들이 강천산을 찾는 이유이며, 현수교나 단풍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다. 하지만 군이 여기서 만족하고 이쯤에서 머무른다면 강천산의 역사적 가치는 더 이상의 빛을 보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 강천산의 자연적 가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다. 수려한 풍광과 맑은 물과 공기, 가을이면 형형색색의 단풍들….
우리나라 어느 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강천산에는 이러한 자연적인 가치 뿐 만 아니라 더 강조돼야 할 정신적인 가치가 있다. 삼인대의 정신적 가치는 국가가 나서서 권장해야 할 정신문화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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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순창신문 | |
삼인대에 얽힌 역사적 가치
삼인대는 강천산에서 유명한 병풍폭포에서 1.5킬로미터가 떨어져있는 강천사 맞은편에 위치해있다. 강천사 맞은편 길에 우뚝 서있는 절의탑과 계곡 건너 산 아래에 홀로 서있는 비각 삼인대(三印臺), 삼인대에는 연산군과 신씨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담겨 있다.
1506년 조선중기 성종의 첫째아들인 연산군은 조선왕조 10대 왕으로 등극, 선정을 베풀던 중 어머니 윤씨가 폐비가 돼 사사됐다는 사실을 알고 패륜적 행위와 폭정을 일삼은 왕이 되기에 이른다. 이것을 본 조선의 박원종 지중추부사와 성희안 이조판서 등은 당시 연산군의 처남이며 좌의정 자리에 있던 신수근에게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옹립하자고 제의, 이를 신수근이 받아들이지 않자 신수근을 죽이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세운다.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것이 중종반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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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순창신문 | |
하지만 박원종 등은 자신들이 죽인 신수근의 딸이 여전히 왕비의 자리에 있는 것이 두려워 신비를 폐위시킨다. 이 때 중종은 자신을 왕위에 세운 박원종 등에게 밀려 힘없이 신씨 폐위 명령을 내리고 괴로워한다. 신비는 왕비에 오른지 7일 만에 폐위되는 조선왕조상 가장 짧은 재위 기간을 갖는 비운의 왕비로 남았다.
중종은 그로부터 수년 후 왕비인 장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백성들에게 좋은 의견을 묻는 구언교(求言敎)를 내리게 된다. 중종 9년 9월 9일의 일이었다.
구언교에 힘을 얻은 지방의 세 관료는 7일 만에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난 신씨의 복위 상소를 준비한다. 바로 순창군수 충암 김 정, 담양부사 눌재 박상, 무안현감 석헌 류 옥이었다. 이들 세 사람은 ‘벼슬과 직인을 어찌 가볍게 버리랴마는, 편리한 때를 보아 일을 도모하리라’라는 시를 지어 뜻을 같이 한 뒤, 강천사 맞은편 계곡에서 밀회를 갖게 된다.
바로 지금의 삼인대 자리다. 이들 세 명의 관료는 박원종 등은 죽고 없었지만, 중종의 구언교에 힘입어 폐비 신씨의 복원 상소를 올리기로 하고 상소문을 작성하던 중, 무안현감 석헌 류 옥에게는 부모를 봉양할 형제가 없음을 알고 석헌의 이름을 뺀 상소문을 올리게 된다.
무안현감은 뜻은 같이했으나 상소문에는 이름이 오르지 않아 화를 면하게 되니, 벗을 먼저 걱정해 준 의로움이 멸문지화를 면하게 한 것이다.
이후 중종은 추천에 의해 관리를 등용하는 현량과를 실시해 조광조 등의 사림을 대거 등용, 이에 위기감을 느낀 훈구파는 주초위왕(조광조가 왕이 될 것) 글자를 나뭇잎에 새겨 꿀을 발라 놓으니 벌레가 이를 파먹어 훈구파 뜻대로 반역을 꿈꾼 조광조가 되기에 이른다. 조광조를 시작으로 수백명의 선비들이 목숨을 잃게 된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삼인대 주역의 한사람이었던 순창군수 김 정도 사사되기에 이른다. 그때의 나이가 서른여섯이었다.
한편 삼인문화선양회 등 세 관료의 후손들은 지난 1995년부터 매년 7월 30일에 강천산 삼인대 앞에서 세 명의 충절을 기리고 그들의 절의정신을 계승, 선양하고 있다.
강천산과 강천사의 문화사적 가치
강천산 안에 들면 천년고찰 강천사가 있다. 강천사에는 전설로 내려오는 많은 이야기가 신비로움을 더하고 있는데, 강천사 고승들의 사리를 담은 사리탑과 강천사 중건을 위해 거지가 시주를 받으며 정성을 다했다는 거라시 굴, 강천사 중건을 위해 당시 명망을 떨치던 여류화가 설씨부인이 권선문첩을 만들어 시주를 권했다는 이야기까지…, 그에 담긴 전설과 역사적 사실이 문화사적인 가치를 한층 더해주고 있다.
병풍바위를 지나 유난히 단풍이 아름다운 아랫용소에 닿기 전 오른쪽 계곡 건너 멀찍이 서있는 사리탑은 세월의 유구함을 처연히 보여주고 있다. 역사적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강천사 12암자 중의 하나였던 부도암은 임진왜란 당시 소실돼 흔적조차 없지만, 기록으로 남겨진 부도암 주변의 4기의 사리탑은 부도암 근처에 있었다 하여 부도암 자리였음을 구전으로 전하고 있다.
순창 설씨는 의로운 가문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귀래정공 신말주 선생의 정부인이었던 설씨부인은 문장과 서화에 능해 우리역사상 여류문인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특히 누구나 다 아는 신사임당 보다는 72년이나 앞서고 있는 여류문인으로 설씨부인의 권선문첩은 역사적가치가 매우 높다.
설씨부인의 권선문첩은 15세기 후반, 1482년에 강천산 계곡 안의 남쪽 산인 광덕산에 있던 사찰을 지키던 두 스님이 절이 다 무너져 내려 절을 새로 지어야 한다 하여 절을 지으려는 계획을 갖고 설씨부인을 찾았다.
설씨부인은 ‘선을 행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써 두 스님에게 주니, 이것이 권선문첩이었다. 권선문첩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편하고, 지니기에 편한 문첩형식으로, 문첩에는 아름다운 산수화 두 폭을 넣었다. 또 권선문에는 ‘순창의 불심을 모았던 절이 낡고 오래돼 무너져 내리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라며, ‘중생들의 힘을 모아 중건하는 것이 옳다’며, ‘시주를 함은 공덕을 쌓는 일이며, 선한 일의 뿌리를 내리고 나라와 부모의 평안을 비는 일’이라고 적어 중생들을 설득했다.
또한 권선문첩에는 시주를 해 좋은 일이 생긴 일에 대한 사례를 함께 실어 설득력을 높인 것은 현대적 감각의 논술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 훌륭한 문장이라 할 만하다.
설씨부인의 권선문첩은 보물 728호로, 병풍 형식의 묵필로 쓴 권선문 14폭과 채화 2폭, 총16폭으로 짜여 있다. 권선문첩은 ‘착한 일을 하면 반드시 복이 온다’는 내용을 담은 강천사 중건을 위한 시주 권언문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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