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곡(乾谷)마을
거등산에서 기두하여 남쪽으로 내려와 개장하여 마을이 형성되고 동쪽을 뻗어 지맥이 남으로 박환하여 정금산이(해발 169m) 청룡이 되고 비록 고개에서 창신리를 지나 남쪽으로 내려온 맥이 백호를 이루니 지리학적으로 명기가 분명하다. 따라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옛날부터 취락이 형성되었고 고려조 말기로 믿어지는 어느 장군 또는 어느 벼슬아치의 무덤이 마을 한복판 여근곡(女根谷)에 자리하고, 그 아래에 그 자손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것은 묘비 또는 상석이 있었는데 묘의 주인이 나타나면 사패지지로 땅을 몰수당한다는 무지한 생각으로 묘비를 마을 서쪽에 있는 수랑 논에 묻었다고 전하여 오고 있으며, 마을 앞 현 회관 근처에 홍살문과 개하마비기 1940년대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어느 귀족의 묘이며 취락지였던 것은 확실하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아래건실ㆍ웃건실 그리고 쇠판이를 합쳐 건곡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여근곡 앞에서 솟아로른 샘물은 음수(陰水)로 아주 좋은 물이었던 것이나 지금은 오염되고 있으나 옛날에는 이 물과 이곳의 지형 때문에 발효식품의 제조에 적지였으므로 1940년대 초까지 곡자, 일명 누룩이라고 하는 술을 빚는 원료를 이곳 건실에서 생산하여 전국에 판매하였다. 그래서 해방 전까지 순창읍에 곡자주식회사가 있었으며 평양 기생방에 술을 만드는 데 건실 곡자가 아니면 술맛을 낼 수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학촌(鶴村)마을
거등산을 현무로 하고 정금산이 동쪽을 막아주고 서쪽은 건곡으로 내려온 능선이 막아주고 본신은 동서로 개장하여 전형적인 취락지로 명지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오랜 옛날부터 취락이 형성되어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기록이 없기에 확언할 수는 없고 웃건실과 같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현재 형태의 취락은 약 300여년 전에 입향한 씨족들이 대대로 살아온 것이다. 그것은 종중문서인 종보에 의하여 추정한다. 웃건실과 함께 여근곡으로 물이 좋고 장풍향양되어 취락지로 적지이며 오랜 역사를 입증하듯 당산나무와 함께 마을 안 당산 앞에는 연목이 있어 산강수약함을 막았던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1970년대 새마을운동 때에 마을에 불미한 일이 자주 생긴다는 이유 때문에 연못을 없애고 마을 이름도 후록이 학이 날아가는 모양과 같다고 학촌(鶴村)으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는 학촌으로 불리우고 있는 곳이다.
금판(金板)마을
거등산에서 동쪽으로 한 지맥이 내려와 다시 남으로 박환하여 학촌 옆산 정금산으로 내려가면서 골짜기를 형성하니 이곳에 장풍향양되었기에 예T부터 취락이 형성되어 농경문화의 적지라 하겠다. 어느 때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기에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예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믿어진다.
이 마을 앞산에서 금이 나왔기에 금판이라고 하였다고 하나 원래는 쇄판이었으며, 이 마을의 형상이 겸(鉗)바닥으로 족집게처럼 생겼다 하여 자물쇠와 같은 언덕 비달이란 말로 쇄판(鎖板)이었던 것을 쇠판이라고 하니 금판(金板)으로 기록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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