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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과면 매우리의 ‘설공찬전’을 통해 우리지역이 얻을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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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9월 24일(화) 21:47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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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란 무엇인가, 왜 문화여야 하는가?
세상은 정말 많이 변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시대에, 그 분들이 한참 경제활동을 하던 50~60년대, 80~90년대에 예술의 길을 가겠다는 자식들에게 가장 많이 해주던 말이 ‘예술이 밥 안 먹여준다’였다. 그 시대는 예술하면 다 굶는 줄 알았다. 예술이 밥이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신문지상이나 미디어에서 매일같이 떠드는 말이 ‘문화’이고 ‘예술’이며 ‘창조경제’라는 단어들이다. ‘이제는 문화가 선택이 아닌 필수’라며 ‘문화예술을 통한 창조경제를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 지금 우리나라 국민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 시대는 지금 ‘문화’라는 거대한 축을 향해 한 시대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지역은 귀머거리로 살고 있다. ‘귀머거리 제 마음에 있는 소리만 하고 있는 것’이다. 남의 말을 듣지 못하니 스스로 가진 생각만을 고집하는 것이다.
지역발전이란 무엇인가? 지역발전이란 지역의 경제적 발전을 모토로 한 경제발전의 실현에서부터 시작된다. 지역의 경제적 번영을 얻어내는 것이다. 경제적 번영을 얻기 위한 지역의 자원이 바로 지역 번영을 위한 성장동력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장동력을 발굴해내는 일은 지역경제 발전의 초석이 된다. 성장동력은 지역의 환경적인 자원에서부터 인문적인 자원 등 다양하다. 성장동력이 될 인문적·환경적 자원이 지금의 우리지역에 산재해 있다. 강천산과 회문산, 섬진강과 금과면 매우리의 설공찬전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지금 왜 ‘문화’에 집중하는가? 첫째는 대한민국이 문화에 열광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문화가 가지는 경쟁력이다. 셋째는 문화가 가지는 차별성과 고유성이다.
문화에는 힘이 있다. 문화를 통해 고부가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의 영역은 매우 포괄적이다. 역사와 예술, 생활, 생태와 교육, 산업으로까지 문화를 확대해 재생산해 낼 수가 있다. 문화를 통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으며, 문화와 더불어 생존하고 문화와 더불어 성장동력 발굴이 가능하다. 문화는 성장동력이며 지역발전의 키워드다.
금과면 매우리의 ‘설공찬전’을 통해 우리지역이 얻을 수 있는 것
산업사회로 치달으면서 도시와 농촌의 불균형에서 오는 경제적인 격차는 새로운 형태의 구조조정을 필요로 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대안적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창조경제, 창조도시 개념이다.
창조경제 도시를 위한 전략적인 접근에 대한 시도의 하나로 ‘장소 마케팅’이 떠오르고 있다.
장소마케팅(Place Marketing)이란 도시나 지역의 특정 장소를 하나의 상품으로 인식해 지역의 공공성과 민간의 협력이 하나가 돼 특정 장소를 하나의 상품으로의 가치를 상승시켜 지역경제활성화를 달성한다는 전략이다.
장소마케팅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쇠퇴한 공업도시나 역사성을 가진 농촌 문화의 중요성을 인식해 위기에 처한 빈곤 도시나 농촌사회의 경제를 활성화하고 자급자족적인 경제구조를 이루자는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장소마케팅이란 도시나 농촌의 특정 장소를 단순한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중요성을 지닌 경쟁력있는 상품으로 보자는 것이다. 경쟁력이 보장된 지역상품은 차별적이고 고유한 고부가치의 상품으로 정체성을 담보한 지역경제 활성화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때문에 지자체에서는 이러한 장소마케팅을 선호하면서도 이에 대한 전략적 접근은 기피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우리 군에서도 금과면 매우리의 ‘설공찬전’을 ‘남의 집안 이야기’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장소마케팅을 통한 문화적 접근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은 바로 ‘인식의 부족’에서 오는 개념의 부재에 있다.
인식의 부족과 개념의 부재는 결국 지역주민의 삶의 질 저하로 귀결된다. 국가예산을 확보하는 일을 맡고 있는 공무원들의 인식의 부족은 ‘문화예술 말살’이라는 엄청난 실책이 되기 쉽다. 국가예산 확보를 강조하면서 정작 국가예산을 어떤 곳에 투입해야 할지를 모르는 집행부의 정책적 실책이야말로 크나큰 실수라 아니할 수 없다.
금과면 매우리의 설공찬전의 배경이 되고 있는 설씨 집안은 현재 뿔뿔이 흩어져있다. 조상들이 얼마나 훌륭하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후손들은 별 관심이 없다. 먹고 살기에 급급해 조상들에 대한 가치를 생각해보는 일 또한 녹록하지 않다. 설 씨 집안에서 나서서 서두르는 사람이 없다보니 행정에서도 ‘강건너 불구경’이다. 위정자는 위정자대로 지역문화에 관심이 없다. 문화를 문화 그 자체로 보지 않는다. 문화에 대한 인식부족에서 오는 오류라 할 만하다. 위정자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지역의 문화는 방치되고 소멸될 것이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듯이, 문화를 모르는 주민에게 발전은 없다.
일본 가나자와 시민예술촌의 촌장은 “문화에 투자하지 않는 지역은 미래가 없다”고 했다. 문화에 대한 투자는 “지역주민의 삶을 윤택하게 하며 지역을 활력있게 만든다”고 강조했다.
우리지역이 설공찬전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은 지역문화의 정체성이다. 지역문화를 통해 지역경제활성화는 물론 지역민의 삶을 윤택하고 활력있게 만들며 경제적으로 넉넉한 생활을 찾아줄 수 있다.
금과면 매우리의 ‘설공찬전’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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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채수의 한문소설 설공찬전(1511) 한글 번역본. | ⓒ 순창신문 | | 설공찬전은 조선왕조 최초의 베스트셀러였다. 중종조 때 불온서적으로 분류돼 모두 불살라졌으며, 훈민정음 창제 이후 최초의 한글 번역소설이었다.
당시 금서가 됐던 채수의 ‘설공찬전’이 우연한 기회에 발견됨으로써 전국의 국문학계는 떠들썩했다. 1997년의 일이었다.
우리나라 고소설의 전달방식은 구전에 의해 전달되는 구비문학과 기록에 의해 전달되는 기록문학이 있었다. 고소설이 후세에 전달되는 방식이 구전에 의해 전달되기도 하고 한 번 읽어본 소설을 타인에게 읽게 하기 위해 손으로 직접 베껴서 전달하는 ‘필사본’의 방식이 있었다.
채수의 설공찬전은 ‘국문필사본’으로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한 16세기에는 필사로 유통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한문소설 설공찬전은 말 그대로 붓으로 직접 베낀 한문을 아는 유식층에서 주로 필사가 이뤄졌을 것으로 학계는 추측하고 있다.
이러한 경로로 필사된 한문본은 대개 상응하는 한글본이 존재하는게 당시의 상황이었으며, 한글본은 한문본으로 필사되는 경우도 있었다.
한문본 역시 한문을 아는 유식층에 의해 필사됐으며, 설공찬전의 경우가 이에 해당되는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한글소설의 경우는 주로 여성들이나 가난한 양반, 서리, 궁인들에 의해 필사가 이뤄졌던 것과는 반대로 한문소설인 설공찬전의 경우는 한문을 아는 유식층인 양반들에 의해 필사가 이뤄졌을 것으로 보는 부분이다. 묵재일기 속에 숨겨져 발견된 설공찬전 역시 양반들에 의해 필사되고 유통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설공찬전이 조선왕조 최대의 필화사건을 일으킨 작품으로 조선왕조실록 중종조에 기록돼 있으며, 민중을 현혹한다는 이유로 수거되고 불태워진 작품이다.
원작자 채수도 교수형에 처해질 위기에 처해졌으나, 중종반정에 가담한 이유를 들어 간신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설공찬전의 줄거리
순창에 살던 설충란에게 남매가 있었는데, 딸은 결혼 후 바로 죽고 아들 공찬도 장가들기 전에 죽는다. 설충란은 공찬이 죽은 후 신주를 모시고 3년 동안 제사지내다가 3년이 지나자 무덤 곁에 신주를 묻는다.
설충란의 동생 설충수의 집에 귀신(설공찬 누나의 혼령)이 나타나 설충수의 아들 공침에게 들어가 병들어 죽는다.
설충수가 귀신퇴치를 위해 방술사 김석산이를 불러다 조처를 취하자, 오라비 공찬이를 데려 오겠다며 물러간다.
설공찬의 혼령이 와서 사촌동생 공침에게 들어가 수시로 왕례하기 시작한다. 공찬의 혼령이 들어가면 집 뒤 살구나무에 가 있곤 하였는데, 평소에 공침은 오른손잡이였는데, 공찬의 혼이 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왼손으로 밥을 먹는다. 그 이유를 물으니, 저승에서는 다 왼손으로 밥을 먹는다는 대답을 한다.
설충수가 아들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김석산이를 불러다 그 영혼이 무덤 밖으로 나다니지 못하게 조처를 취하자, 공찬이 공침을 극도로 괴롭게 해 설충수가 다시는 방술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공침의 모습을 회복시켜 준다.
공찬의 혼령이 사촌동생 설위와 윤자신이를 불러오게 했는데, 저들이 저승 소식을 묻자 다음과 같이 저승소식을 전해준다.
저승의 위치는 바닷가로서 순창에서 40리 거리이며, 저승나라의 이름은 단월국, 저승임금의 이름은 비사문천왕, 저승의 심판 양상은 책을 살펴서 명이 다하지 않은 영혼은 그대로 두고, 명이 다해 온 영혼은 연좌로 보낸다는 내용이다.
공찬도 심판받게 되었는데, 거기 먼저 와있던 증조부 설위의 덕으로 풀려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저승에 간 영혼들로부터 저승의 형편을 듣게 되는데, 이승에서 선하게 산 사람은 저승에서도 잘 지내나 악하게 산 사람은 고생하며 지내거나 지옥으로 떨어지는데 그 사례가 아주 다양하다는 것이다.
염라왕이 있는 궁궐의 모습은 아주 장대하고 위엄이 있으며, 지상국과 염라국과의 관계는 성화황제가 사람을 시켜 자기가 총애하는 신하의 저승행을 1년만 연기해 달라고 염라왕에게 요청하자, 염라왕이 고유 권한의 침해라며, 화를 내고 허락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당황한 성화 황제가 염라국을 방문하자, 염라왕이 그 신하를 잡아오게 해 손이 삶아지리라고 하는 내용을 끝으로 발견된 부분의 설공찬전은 막을 내린다. 이 내용의 앞과 뒤에 어떤 내용이 이어지는 지는 새로운 발견이 있기까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설공찬은 실제인물 설공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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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금과면 매우리에 있는 설공찬전의 배경지 | ⓒ 순창신문 | | 설공찬전의 배경지가 순창 금과의 매우리라는 것은 학계를 통해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또한 특기할만한 것은 설공찬이 실제인물 설충란의 둘째아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순창 설씨 대종회에서 제공한 순창 설씨의 족보를 보면 설충란에게는 공포와 공순이라는 아들이 있다. 설충란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금과의 설 모씨가 성장과정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설공찬은 설충란의 둘째아들 설공순이었다는 것이다.
설충란과 설충수의 묘가 모두 순창에 실재해 있고 설공찬은 설충란의 둘째아들이 맞다는 후손의 말로 미루어 보아 설공찬전의 사실여부에 대한 재조명과 함께 설공찬전을 통한 지역문화 개발이 시급한 실정이다.
설공찬전의 배경지가 순창이며 등장인물들 또한 순창에 살았던 실존인물들이므로, 장성의 홍길동전과 남원의 춘향전이 관광상품화 됐던 것처럼 우리지역에서도 설공찬전을 지역문화상품으로 개발함은 물론 설공찬전을 통한 지역경제활성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순창을 설공찬전의 배경지로서, 소설속의 주인공이 실존인물이라는 사실에 대한 검증을 통해 순창을 널리 알리고 이를 지역문화와 연계한 문화의 사적지 즉, 장소마케팅을 활용한 역사와 문학, 문학이 접목된 사적지로서의 개발이 지역경제활성화는 물론 지역의 창조 경제를 실현하는 모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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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40년대에 건축된 대한통운 창고 등이 스튜디오 등의 예술공간으로 탈바꿈 된 인천 해안동의 아트플랫폼 | ⓒ 순창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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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문래동 철공소 거리에 있는 구멍가게를 철공소에 입주해있는 예술가들이 그림을 그려 예술적인 가게로 만들었다. | ⓒ 순창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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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문래동 철공소 거리가 에술인들의 거리가 됐다. | ⓒ 순창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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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아트플랫폼 견학을 위해 대만에서 온 학생들. | ⓒ 순창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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