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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전쟁 발발 당시의 임실 운암계곡 전투비화 및 운암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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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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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4월 02일(화) 22:33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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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순창신문 | | 섬진강의 발원지인 진안 데미샘 등에서 솟은 물줄기는 하천을 따라 임실로 이어지고, 임실 옥정호에 다다른 강물은 비경을 자아내면서 역사의 단면을 비추고 있다.
임실군의 자랑이 된 옥정호는 섬진강댐의 건설과 무관하지 않다. 옥정호의 탄생은 1965년 12월, 국내 최초의 섬진강 다목적 댐이 완공되면서 섬진강 관개 전용 댐인 운암제가 수몰돼 지금의 옥정호가 탄생했다.
운암제는 1925년 동진강유역에 상습적으로 발생하는 한발을 해소키 위해 섬진강 관개 전용 댐 역할을 할 운암제를 건설했지만, 댐의 높이가 낮아 풍부한 수자원을 이용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댐 건설이 절실했던 정부는 1941년 새로운 댐을 건설하려 했으나,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중단, 1965년 섬진강 다목적댐이 완성되면서 운암제는 수몰되고 옥정호라는 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섬진강댐이 건설되면서 생겨난 넓은 호수인 옥정호 주변 계곡 및 마을에는 인간 본성의 잔인성과 이념의 대립이 빚어낸 살육의 현장이 자료로 남아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남한 곳곳에서는 좌우익의 이념의 대립이 수없는 민간인의 학살로 이어지는 참혹한 상황이 전개됐다. 알려진 역사 말고도 아직도 진실조차 알 수 없는 민간인 희생의 현장이 구전돼 전할 뿐 전국 각처의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진실 규명은 요원하기만 하다.
임실에서는 운암면 일대의 운암계곡과 덕치면, 성수면, 신평면, 관촌면 등지에서 민간인 피해가 속출했다. 1948년 2월 26일에 일어난 2.26사건은 민간인과 경찰이 피해를 입은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는 좌익권력이 수립된 시기로 인민군 점령기간이었다. 이 시기에는 각 마을의 지주계급이나 경찰 및 공무원 출신들은 인민위원회라는 좌익세력들에 의해 살해되는 일이 빈번했다.
특히 인민군이 후퇴하기 직전인 9월말과 10월 초에는 임실읍과 관촌면, 삼계면, 덕치면 등의 우익진영의 주민들이 집단 학살되는 사건이 집중적으로 벌어졌다.
9월 28일 한국군과 유엔군의 서울 수복 이후 인민군은 후퇴하기 시작했고, 지방의 반지주세력은 유격대를 조직해 저항을 시작했다. 그들은 빨치산으로 불렸다.
수복이후 빨치산으로 불린 조직에 의해 민간인이 집단 학살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빨치산이 민간인에게 끼친 피해는 많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역으로 민간인은 빨치산에 의해 학살된 것이 아니었다.
우익과 좌익이라는 이념 대립보다는 마을이라는 공동생활에서 오는 인간적인 갈등에 의한 보복성 학살과 고발에 의한 살해사건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는 정황들이었다.
H면에서는 정씨와 전씨들이 양반행세를 하던 이웃마을의 홍씨에게서 하대를 받았다는 이유를 들어 지방좌익세력에 가담, 홍씨일가를 죽이는 일이 있는 등 개인적인 원한과 불만 등으로 인한 보복성 살해가 많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살해방법은 돌로 찍거나 죽창 등으로 척살, 생매장, 총살 등이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운암면 옥정호 부근에서 일어난 1951년 2월경의 일이다. 한 마을 청년들이 경찰들에 의해 강제 징용되는 일이 벌어졌다. 마을 청년들을 제2국민병으로 강제 징용한 경찰은 한 마을의 20대 청년들 9명을 강제로 끌어다 마을 인근에 모아두고 방치하자, 이 사실을 입수한 빨치산이 청년들을 운암 옥정호 부근으로 끌고가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라며 구타했다고 한다. 이에 7명의 청년들은 시키는대로 만세를 불렀고, 만세를 부른 청년 7명은 반동으로 찍혀 죽창으로 죽임을 당하고, 만세를 부르지 않은 청년 2명만 살아돌아 왔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경찰이 마을 청년들을 의용군으로 끌고가려 했다가 방치하는 바람에 죽임을 당한 것으로, 당시 마을에 있지 않아 목숨을 건진 김 모 씨에 의해 증언된 사건으로 전해지고 있다.
운암면과 섬진강 주변 덕치면, 아군에 의해 학살 자행
우리나라는 1946년 이후 좌익세력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좌익에 대한 폭력은 경찰과 우익세력에 의해 전쟁전까지 반복됐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군경에 의한 최초의 대규모 민간인 피해는 전쟁 직후 자행된 보도연맹사건으로 보고 있다. 보도연맹사건은 여순사건과 이어진다.
1950년 서울수복이후 빨치산 토벌작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피해가 속출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도내 빨치산토벌을 맡았던 국군제11사단은 남원에 사령부를 두고 작전에 돌입했다. 때문에 국군 11사단의 회문산 토벌작전이 시작된 1950년 10월부터 12월에 걸쳐 빨치산의 근거지였던 임실 삼계면의 학정마을 주민들과 회문산 주변, 섬진강의 조용한 마을 덕치면 일대와 덕치면 암치마을의 양민들이 희생양이 되는 참혹한 상황이 벌어졌다.
특히 국군제11사단의 토벌작전 종료시점인 1951년 2월 25일에 일어난 부흥광산사건은 임실지역에서 일어난 최대규모의 양민 학살 사건이었다.
섬진강변에는 임실 청웅면, 강진면, 덕치면이 이어져 있으며, 30여개가 넘는 굴 입구가 세 개 면 여러 마을에 걸쳐 있다. 부흥광산은 1933년 4월부터 1943년 말까지 채굴이 이뤄진 후 일제 말기 폐쇄됐던 곳으로, 폐광굴, 토굴 등으로 불린 곳이었다.
11사단에 의해 자행된 부흥광산사건은 1951년 2월 25일 200여명의 양민이 굴속에서 한꺼번에 참사를 당한 일이었다.
3월 2일에서 6일 사이에도 200여명의 양민들이 강진면 배소고지에서 집단 학살을 당했으며, 3월 19일에는 진안에서 빨치산과 전투를 끝내고 임실 성수면을 지나던 ‘백골부대’가 주민 40여명을 왕방리 문바우에서 잔인하게 학살하는 일이 발생했다.
‘문바우’라 불리던 바위는 지금은 물에 잠겨 흔적조차 없다. 200여명의 양민들이 학살된 강진면의 배소고지 사건은 제11사단 소속 군인들에 의해 양민들이 배소고지에서 학살당한 사건이었다. 강진면 배소마을 위 배소고지에는 당시 국군부대가 주둔해 있었으며, 섬진강 댐을 통해 정읍 산내면과 임실 옥정을 오가며 토벌작전을 벌였다.
1951년 3월 6일 임실 옥정리에 살고 있던 한 모 씨 가족은 정읍 종성 이화동 위 옹고개로 이사 가서 살다가 빨치산들에게 밥을 해줬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몰려 일가족이 모조리 배소고지로 끌려왔다. 또 백운마을에 살던 박 모 씨 가족 등 일가족들이 정읍으로 피난을 가다가 군인들에 의해 붙잡혀 배소고지로 끌려와 무차별 사격을 당해 모두 죽임을 당했는데, 이를 증언한 A씨만이 돌 틈 뒤에 숨어 천우신조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또 회문산과 지리산이 능선과 산으로 연결된 임실 덕치면의 암치마을에서는 11사단 군인들이 국군의 전과를 올렸다는 평가를 받기위해 한 마을을 쓸어버린 경우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제11사단은 한마을 한마을을 차근차근 불태우고 암치마을에 들어서서는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집에서 나오지 않으면 죽여버린다고 엄포를 놨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때 미처 피난가지 못한 노약자와 부녀자들을 마을 앞 당산나무 밑 한자리에 모여 놓고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아 40여명을 한 날 한 시에 죽였다고 한다. | 
| | ⓒ 순창신문 | |
섬진강의 유래와 운암댐, 섬진강다목적댐
섬진강은 본래 모래가 곱다하여 ‘사천’, ‘모래가람’, ‘모래내’ 등으로 불리었다. 그러다 고려 우왕 11년에 섬진강 하구에 왜구가 침범하자,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울부짖었으며, 이를 보고 놀란 왜구들이 광양쪽으로 피해갔다고 하는 전설을 담고 있다.
이때부터 두꺼비 섬(蟾)자와 나루 진(津)을 붙여 섬진강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섬진강댐이 건설되기 이전 섬진강에는 일제강점기 때 막은 댐인 운암댐이 있었다. 운암댐은 일제가 식량수탈을 목적으로 우리나리 최대의 쌀 생산기지인 전북서부 평야지역에 농업용수를 공급할 목적으로 섬진강의 물길을 동진강쪽으로 돌리는 유역변경식 댐인 운암댐을 막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25년에 착공해 1928년 11월에 준공된 이 댐은 임실군 강진면 옥정리의 배소와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의 황토마을 사이를 막았다. 길이 305m, 높이 33m로 아치형의 콘크리트 중력식 댐이었다.
1965년 섬진강다목적댐이 건설되면서 운암댐은 댐의 몸체에 구멍이 뚫려 물속으로 잠기며 용도 폐기됐다.
섬진강 다목적댐은 섬진강 상류로부터 82.4km 지점인 임실군 강진면 용수리와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사이를 막은 최초의 다목적댐이다. 이는 섬진강의 물길을 동진강으로 돌려 전북 서부의 평야지대인 정읍, 김제, 부안 일원과 계화도에 관개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막은 유역변경식 댐으로 알려졌다.
섬진강 댐의 저수 용량은 4억6천600만 톤이며, 유효저수량은 3억7천만 톤이다. 댐 정상부에는 위로 공도교가 설치돼 소형차량 등의 통행이 가능하다.
섬진강댐이 건설되면서 생긴 저수지의 이름이 옥정호이며, 옥정호는 태초의 신비를 머금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옥정호는 강진면 옥정리란 마을의 지명에서 따온 이름으로, 실제 마을안에는 ‘옥정’이란 샘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도로 확포장공사로 메워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 | ⓒ 순창신문 | |
섬진강따라 그려지는 역사여행, 옥정호 물안개길
다양한 볼거리와 사시사철 색다른 즐거움을 제공하는 임실 옥정호 물안개길은 지난해 개장해 호수의 절경을 볼 수 있는 드라이브 코스 및 트레킹 코스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피비린내를 풍겼던 덕치 천담 구담마을의 매화향기는 피맺힌 역사를 담고 흐르는 섬진강에 배어 강물과 함께 유유히 흐르고 있다. 피끓는 원한과 억울함은 공허한 절규로 남아 섬진강물과 더불어 처연히 흐른다.
역사의 질곡과 거대 권력 앞에서 힘없는 민초들은 자유롭지 못했다. 하나뿐인 목숨들은 매화꽃잎보다 더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구담마을 한켠에 핀 매화는 동족간의 총칼과 이웃들의 죽창에 흩뿌려진 붉은 선혈이 돼 강물과 함께 흘렀다.
진안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 물은 옥정호에 잠시 갇혔다 순창 동계, 구례, 곡성을 거쳐 광양과 하동을 지나 남해로 흘러간다. 섬진강 상류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 불리는 진뫼와 구담마을은 마을앞에서부터 핀 매화가 일품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해발 475m의 국사봉에 올라가면 옥정호를 한 눈에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늘에 닿을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일교차가 심한 날 아침에 산을 오르면 옥정호를 감싸고 있는 운해의 장관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옥정호의 물안개는 마치 신선이나 노닐법한 풍경을 자아내 사진작가 등의 예술가들이 많이 찾는 명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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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화 기자 sclj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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