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북리(官北里)
우리 선인들의 주거풍속은 남향집을 짓고 북풍을 막으면서 맞바람은 보비(補裨)로 막는 방법으로 바람의 피해를 최소화 하고 일조량(日照量)을 충분히 받아 자연의 섭리를 최대한 이용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러기에 순창고등학교 앞 진수페에서 동쪽으로 거목을 가꾸어 북풍을 막았고 맞바람은 군청 앞에서 경천을 따라 사정숲까지 거목 느티나무를 가꾸어 동남풍을 막은 방풍(防風) 비보(碑補)로 가꾸었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에서 진수페의 나무는 한 그루도 없이 제거되어 버렸고 경천 변의 느티나무도 일본인들이 제 2차 세계대전 때에 조선용(造船用)으로 벌목하여 가버리고 지금은 몇 그루만 남아 있으니 애석하기 한량없다.
이와 같은 주거풍속과 조선조 때의 관존민비 사상에서 그 고을의 관아는 남쪽에 있어야 하고 민가는 북쪽에 두어야 된다는 봉건적인 사고방식은 관아의 북쪽이라기보다는 뒤쪽에 민가는 있어야 된다고 하는 관존사상이었다.
따라서 관아의 북쪽마을이라는 말보다는 관아의 뒤쪽이라는 말에서 관북(官北)리가 되었지 않나 생각된다.
그러기에 순창읍 관북리를 살피면 관아의 북쪽이라기보다는 관의 뒤쪽이 관북리로 명명되었다. 그러다가 1991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1, 2관북리로 분리하여 행정하고 있다.
관서리(官西里)
진수페에서 내려온 작은 지맥의 구릉(丘陵)이 돌출하여 동산을 이루고 있는 곳이 현 천주교 자리로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이 동산의 남쪽에 관서당(官書堂)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관서당은 말 그대로 관에서 세운 서당이란 말로 관립(官立)서당이고 향교(鄕校)는 공립(公立)이고 사마제(司馬齊)나 사교제(四校齊)는 사립(私立)서당으로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관서당의 마지막 훈도(訓導)를 별지에 밝히었기에 생략하고, 이 관서당에서 조선조 때 향시(鄕試)를 보았다는 구전이 있다.
향시란 전국 팔도 각 감영에서 초시(初試)를 실시하는 것을 말하는데 전라도는 본 군이 중심지이고 주변은 거의 현(縣)인데 순창은 군(郡)이기에 초시를 우리 고을에서 볼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기록이 없고 구전일 뿐이나 충창을 옥당골(玉堂)이라 불렀던 것이나 전라감사가 순창에 많이 왔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사실이 아닌가 한다.
전라관찰사(觀察使) 이서구(李書九)의 송덕비, 전라감사 정민시(鄭民始)가 섬진강에서 뱃놀이하면서 지은 합강정가(合江亭歌)등으로 미루어 많은 감사들이 순창군을 드나들었던 것으로 보아 구전이 사실이 아닌가 한다. 또한 옥당이란 홍문관(弘文館)의 별칭이므로 옥당골이라 하는 것도 이와 같은 뒷받침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관서당이 있었던 마을이라는 말로 관서리(官西里)라 하였던 것을 1914년 왜인들이 행정구역 통폐압 때에 관서(官書)를 관서(官西)로 표기하지 않았다 생각된다.
현재는 순창읍의 중심지로 또한 옛 관서당의 여운(餘韻)처럼 교육청이 이곳에 세워지고 중앙초등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만민(萬民) 제세(濟世)라고 한들 부당할 것은 없으나 어의(語意)대로 관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란 말은 아닌 것으로 본다.
이유는 관의 동북쪽이지 서쪽은 아니니까 말이다.
현재는 교통 중심지로 순창읍의 핵(核)이 되고 있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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