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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 김진우 씨, 6일 현충일 군수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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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과묵한 성격으로 협력 으뜸
6.25한국전쟁 당시 9살
실탄껍질 따먹기 놀이 껍질 줍다 관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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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6월 05일(수) 09:02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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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순창신문 | 읍 옥천로에 사는 김진우(71) 어르신은 오는 6일 제58회 현충일 행사에서 군수표창을 받는 영예를 안게 됐다.
군수 및 기관장 표창 대상자는 총13명으로, 김 어르신은 상이군경회의 일반회원이다. 평소 과묵한 성격으로 보훈 및 상이군경 등의 단체 행사에 묵묵히 협조를 아끼지 않은 점이 높이 평가돼 추천 대상자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1950년 6.25한국전쟁이 나던 해 김 어르신은 겨우 9살이었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 때의 기억이 생생하지는 않지만, 조각조각 떠오르는 편린은 아찔하기만 하다.
6.25가 발발하자 김 어르신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반공호에 숨는 게 일이었다. 전쟁 초기 그 때는 이미 북한군이 점령했기 때문에 지상은 북한군 세상이었다. 반면에 공중에서 쏟아붓는 폭격 비행기는 국군 비행기였다. 국군 비행기는 북한군과 주민들을 구분하지 않고 폭격했다. 동굴이나 반공호에 함께 숨은 북한군과 금과 주민들은 누가 적인지, 누가 아군인지 분별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같이 생활했다. 당시 붉은 완장을 팔에 찬 여자 북한군은 반공호 안에서 주민들에게 인민군 노래도 가르쳤다고 김 어르신은 당시를 회상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금과에서 읍으로 이사 온 어르신네 가정 형편은 당시는 상당히 부유했다. 논 20여마지기와 머슴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6.25 당시 소위 브루조아였음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어르신은 “아버지께서는 북한군이 쌀을 달라고 하면 달라는 양보다 더 주고, 소를 달라고 하면 소도 줘 버리고, 집안에 있던 닭이며 가축도 잡아 달라고 하면 다 잡아줬다”며 부친을 떠올렸다.
어린나이였던지라 철모르고 아군과 북한군이 교전을 벌이던 곳에서 실탄 껍질을 주우러 다니다 누구의 총에 맞았는지 모르게 오른쪽 다리 허벅지를 총알이 관통해 자칫 잘못했으면 다리를 못 쓸 뻔하기도 했다. 그때는 아이들의 놀잇감이 실탄 껍질 따먹는 것이었다. 고무줄 따먹기처럼 실탄 껍질을 누가 많이 따먹느냐가 당시의 아이들에겐 가장 흥미로운 놀이였다.
낮에는 국군이, 저녁이 되면 북한군이 주민들을 힘들게 했다. 낮에 국군한테 밥을 주거나 닭을 잡아 준 동네 사람들은 저녁이 되면 북한군에게 끌려갔다. 마을 사람들은 향토예비군 같은 마을 조직을 만들어 마을 뒷산 높은 곳에 올라가 보초를 서며 북한군이 내려오는 걸 지키기도 해봤으나, 수적으로 열세였던 마을 사람들은 죽창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가거나 발각돼 죽기도 했다.
김 어르신의 매형은 당시 경찰이었다. 충청도가 고향인 매형은 처갓집인 금과로 피신와 곡성에서 숨어지내다가 걸어서 다시 금과 처갓집으로 오는 길에 북한군에게 잡혀 처형당했다.
어르신의 부친은 농사를 지었고, 형제 중 둘째 형님은 북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다 퇴직해 지금은 전주에 살고 있다. 막둥이 동생도 군산에서 교편 잡다 퇴직했다.
어르신은 6.25한국전쟁 당시를 떠올리면 몸서리쳐진다며, 다시는 이땅에 그런 비극은 없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지금도 6.25기념일이나 현충일 같은 날이 오면 무슨 날인지도 모르고 웃어버리는 젊은 사람들이 있다”며, “6.25 전후세대가 세상을 다 등지고 나면 젊은 세대들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며, “지금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 정부는 정부대로 해결 못하고 있는 게 너무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개성공단 문제에서부터 위안부 문제까지 정부에서는 어떤 말도 안하고 있는데, 그 부분에 정말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김 어르신이 밝히는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37개월간의 한국전쟁으로 인해 국토는 초토화되고 먹을 것이 없어 사람들은 기아에 시달렸다.
전쟁 전 학교를 다니던 아이들이 보통 한 마을에서 300~400명이었으나, 전쟁 후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한 마을에서 3~4명에 불과했다. 김 어르신도 전쟁 후 2년을 쉬였다가 초등학교 3학년을 다시 다녔다.
그 때는 전쟁의 상흔이 커 학교다니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나마 어르신 가정은 쌀보리가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나무껍질을 벗겨 끓여 먹는 것을 보면서 ‘쌀밥을 먹으면 죄로 간다’며 집에 쌀을 두고도 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다는 어르신의 부친은 보리죽을 쑤어 먹게 했다.
수리시설이 없어 비가 오지 않으면 모를 심을 수 없어 논밭에서 나는 작물은 금보다도 귀했던 시절이었다. 그 때의 상황을 김 어르신은, “학교에 갈 때는 산에서 해 온 나무를 2~3개 씩 들고 가 교실에 있던 나무난로에 넣어야 선생님한테 혼나지 않았다”며, “학교에 가서도 공부는 하지 않았다”고 초등학교 시절을 설명했다.
그렇게 보낸 어린시절이 엊그제 같이 생생한데, 벌써 칠순을 넘긴 나이가 됐다고 한숨짓던 김 어르신은 “일본 아베 정권이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 망령된 말을 서슴치 않고 있는데도 정치인들은 입을 다물고 있다”며, “아무것도 한 것 없이 나이를 먹은 것보다도 지금의 정치 상황을 보면 더 답답할 뿐”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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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화 기자 “” - Copyrights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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