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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단한사람 나의 반쪽과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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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의 로미오와 줄리엣
신용균 군의회 부의장 부부의 사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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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5월 14일(화) 21:32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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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순창신문 | | 같은 복흥초등학교를 나와 정읍으로 중학교를 갔던 군의회 부의장 신용균·조정래 부부는 중학교 시절부터 이미 부부의 인연을 가졌던 것일까? 신용균 부의장은 정읍의 A중학교에, 아내 조정래 씨는 B여중에 다니게 되면서, 집은 한 채인데 주인은 둘인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됐다. 부부는 한 집에서 하숙을 했지만 주인이 둘이다보니 한 밥상에서 밥을 먹지는 못했다고 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서울로 전학을 가고 말았다. 양조장을 했던 탓에 가정형편이 부유해 모두 서울로 보내졌던 것이다. 마음에 있었지만 어린 나이라 아무것도 못하고 서울로 떠나보낸 신 부의장은 정읍 모 고등학교에 진학하지만, 학교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천성이 착하고 정의감에 불탔던 부의장은 충격적인 사건에 직면하면서 인생의 소용돌이를 겪게 된다. 가난하고 배고팠던 그 때 그시절, 끼니도 제대로 못 먹은 상태에서 솜장갑 하나 없는 친구들을, 꽁꽁 얼어서 갈라진 손과 얼어서 고구마 색깔을 띤 땡땡얼은 얼굴로 겨우 학교에 온 친구들을, ‘숙제를 안해왔다’는 이유로 담임교사는 ‘타이어창쓰레빠’로 언 얼굴을 사정없이 때렸고 그것을 본 부의장은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했다.
이 일로 신 부의장은 무능교사 5명을 교단에 서지 못하게 하는 학내데모를 주도해 정학조치를 당했다. 천만 다행으로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서울 서라벌 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 부의장은 서울 돈암동에서 하숙을 하게 되고, 중학교 때 서울로 전학가 안암동에서 살고 있던 아내와는 극적인 재회를 하게 된다.
아내는 경희대 사대 불문학과에 진학을 했지만, 신 부의장은 대학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공주처럼 살아온 아내를 얻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다. 복흥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만큼 부자였던 아내의 집에서는 부의장을 완강히 반대했다.
부의장의 가정형편도 부유한 편이었으나, 아내의 집은 워낙 ‘있는 집’이다 보니 두 집안은 차이가 많이 났다. 그 때문이었는지 갈수록 반대가 심해지는 양가 부모를 피해 둘은 학교도 그만두고 광주행 야간열차를 차고 광주로 가 신혼살림을 차렸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신동’이라 불렸던 신 부의장은 한 학년을 월반할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고 한다. 자식을 키우면서 큰 소리 한 번을 내지 않고 조용히 타이르던 부친의 성격을 그대로 닮아, 어렸을 때부터 가난하고 힘이 없는 아이들과는 싸우거나 대립하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아내는 지난날을 회상했다.
누가 부탁하면 거절을 못하는 성격에다 마음이 유순해 작은 일이라도 남을 돕고 나면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 남편을 선택하고, 사랑하고, 함께 해 온 세월이 그저 고맙고 행복하다는 아내다.
남한테는 한없이 부드럽고 인자한 사람이 집에서는 무척이나 엄했다. 지난 2005년 ‘전북도덕성회복운동본부’와 순창군수가 주는 효행상을, ‘당연히 할일을 했을 뿐인데, 무슨 상을 받냐’며 부의장은 상 받기를 거절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끌다시피해 상을 받게 되었고, 상을 받은 후 부의장은 자식들에게도 말하지 않고 상패를 감춰버릴 정도로 어떤면에서는 완고한 사람이다.
아내는 아들 셋과 조카 둘을 키우면서 중풍으로 고생하던 시아버지를 10년 동안이나 정성껏 보살폈다. “아버님을 돌아가실 때까지 모신 일은 제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일입니다. 혹시 저 세상에 가면 그곳에 계신 조상들이 ‘뭐하다 왔냐’고 물으면, ‘아버님 목욕시켜드리고, 보살펴 드리다가 왔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을 살려고 노력했어요”라고 말하는 아내는 아들 삼형제 모두가 착하고 며느리까지도 착하다고 흐뭇해한다.
“부부간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것”
야반도주로 살림을 차린 부의장 부부는 20살 어린 나이에 사업을 한다고 화장품 대리점 등을 차려 2~3년 사이에 큰 돈을 다 날리고 빈털터리가 됐다.
이 때 진 빚 때문에 부모의 재산이 거의 없어지는 결과를 맞닥뜨리면서 부의장은 공무원이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 ‘머리를 믿고 살아라’는 부친의 뜻을 그제서야 따르기로 한 것이다.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부모의 용서도 받고, 부모에게 지은 죄를 씻기 위해 부모에 대한 은혜를 갚기로 서로 맹세한 부부는 정성을 다해 부모를 모셨다.
하지만 아내는 15년을 친정에 가지 못했다. 친정에 발을 들이지 못한 아내의 귀에 들려온 소문은 아내의 마음을 갈갈이 찢어 놓았다. ‘딸이 집 나가고 속이 상해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문이었다. 친정아버지 장례식장에도 가지 못한 아내는 “‘내가 저지른 죄는 내가 다 안고 가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다”고 말했다.
집안의 재산을 다 잃고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부의장은 인생관을 바꿔놓는 한 선배를 만나게 된다. ‘세상을 살면서 내 입장보다는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해주면서 몸소 멘토가 돼 준 전 농림부차관 박상우 씨를 부의장은 평생 가슴에 담고 있다.
‘술과 음식, 돈으로 맺어진 인간관계는 술과 음식, 돈뿐인 사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주며 ‘인간관계는 평상시에 맺는 것’이라고 처세술을 가르쳐준 박 차관과는 40년 동안 의형제를 맺고 있다. 인생을 살면서 참을 줄 아는 것, 기다릴 줄 아는 것, 베풀고 청렴해야 한다는 것 까지 몸소 배우지 않은 것이 없으며, 모든 인생사를 박 차관에게서 배웠다고 부의장은 술회했다.
천성이 유순하고 유머를 좋아해 ‘신소리꾼’이라는 별명을 듣고 있는 부의장은 아내와 단둘이 살고 있는 지금은 아내 사랑이 지극하다. 아내 친구들 결혼기념일이나 생일까지 챙기며 아내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함께 하려고 노력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아내가 실수를 하더라도 목소리 높여 나무라거나 싫은 내색을 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아내에 대한 마음이 남다르다고 한다. “부부는 서로 배려하고 서로의 인격을 존중해주고 사는 것이 최고”라며, “부부로 살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요소다”며, “남은 생애 마지막 생을 다하는 날까지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다른 한 쪽을 먼저 생각해주는 배려심으로 살 것”이라고 부의장 부부는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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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화 기자 “” - Copyrights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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