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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순반란 사건과 섬진강 자원활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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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열강의 이데올로기에 묶인 대한민국
한국은 지금도 이데올로기 전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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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5월 07일(화) 23:19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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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열강의 이데올로기에 묶인 대한민국
한국은 지금도 이데올로기 전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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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탑 아래의 받침돌은 한반도를, 갈라진 돌의 모양은 한반도의 분단을, 위로 뻗은 여러 돌은 민중의 저항을 상징화한 것이다. | ⓒ 순창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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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팔마체육관 내 위령탑 옆에 있는 여순사건 설명비. | ⓒ 순창신문 | | 제주 4.3항쟁이나 여순반란 사건 모두는 열강에 의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힘없는 약소국가인 한반도가 동족상잔이라는 비극을 경험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때의 사건보다 더 참혹한 비극은 냉전 이데올로기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도 선거때만 되면 불거지고 있는 ‘종북세력’, ‘빨갱이’ 등의 용어가 대한민국 전역에서 살아 춤추고 있으며, 지난 대선 때는 더더욱 그랬다.
힘없는 국가에 살아야 했던 민초들은 살기 위해 미국의 눈치를 보아야 했으며, 미국 편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우익이어야 했다.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제1강대국의 위치에 있는 미국은 어떤 이념도 수용하지 않았다. 미국은 가난한 대한민국보다는 힘있는 일본을 우호적으로 받아들이며, 일본 끌어안기에 마음을 썼다.
그런 그들이 친일파들에 대해 숙청하지 않고 또다시 옷을 갈아입혀 득세하게 한 해방 전후 미 군정기가 되면서 가련한 민초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친일파와 미군이 심어놓은 이데올로기는 1945년 해방전·후에서 6.25한국 전쟁까지 한반도를 피로 물들이는 참상을 빚어냈다. 그렇게 손잡은 미국과 일본은 한국전쟁에 무기를 팔면서 돈을 벌어 강대국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미국이나 일본, 중국 그 어느 나라도 남한과 북한이 단결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답이 나오지 않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남북한은 공멸해야 하는 것이 강대국이 원하는 논리다. 남북한이 서로 협력하고 단결해 강대국의 대열에 들어서는 것은 주변 강대국들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데올로기 전쟁, 그 이념 대립의 분쟁 속에서 국민들은 서로를 죽이기 위해 대립하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나돌고 있는 국민간의 이념 분쟁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지금, 대한민국은 열강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동족간의 대치국면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가정의 달 5월, 진달래와 철쭉이 이 땅의 산하를 붉게 물들이는 요즘, 부모의 명예회복을 외치는 사람들의 눈에서는 피눈물도 함께 흐른다. 피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이 땅의 민초들은 조상들이 흘린 피의 대가를 얻어내는 일은 쉬워 보이지 않는다.
일본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한국인은 단결력이 원래 없었던 것인지’, 학교에서 배웠던 것처럼 ‘35년의 일제치하가 국민들의 단결력까지 없애버린 것’인지, 누구도 정확히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은, 지금도 미국과 소련이라는 세계열강의 이데올로기에 묶여 단절된 채 표류하고 있다.
여순(여수·순천) 반란 사건 왜 일어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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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여순사건 자료사진 | ⓒ 순창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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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여순사건 자료사진 | ⓒ 순창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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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여순사건 자료사진 | ⓒ 순창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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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여순사건 자료사진 | ⓒ 순창신문 | | 1948년 10월 19일 밤,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군인들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제주도 4.3 항쟁 진압 출동 명령을 거부하며 봉기했다.
2천여 명의 병력을 규합한 봉기군은 ‘남북통일’과 ‘친일 반역자 세력 타도’, ‘동족 학살 반대’를 주장하며 여수 읍내를 점령했다.
당시 국내 상황은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대부분의 국민들이 식량난으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35년의 긴 일제시대의 수탈이 가져다준 궁핍이었으며, 미국과 소련의 개입으로 나라가 두 동강이 난 반쪽만의 불안한 정부수립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봉기한 14연대 군인들은 ‘친일 반역자 세력의 색출’과 ‘동족 학살 반대’를 주장하며 봉기했던 것이다.
한창 학살이 진행되고 있던 제주 항쟁에 대한 진압을 14연대 봉기군들은 ‘동족 학살’로 규정했다. 실제로 제주항쟁의 희생자들은 어린 학생들이거나 아녀자,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제주 4.3항쟁의 배경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4.3항쟁의 도화선이 된 1947년 3월 1일, 제주도민들은 ‘3.1정신으로 통일 독립 전취’ 등을 외치며 제주북국민학교에서 3.1절 기념집회를 가졌다. 이날 집회장에 모인 제주도민들은 3만여 명이 넘었다. 미 군정체제였던 당시 미군정은 경찰서 등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무장경관들을 비상경비에 투입하는 등 기마대까지 편성해 해산하는 상황이었다.
해산 과정에서 기마대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다치는 일이 벌어졌다. 다친 어린아이를 무시한 채 해산시키던 광경에 분노한 도민들에게 발포가 시작되고, 이날 발포에서 6명의 사상자와 8명의 중상자가 생겼다. 경찰의 무모한 발포에 항의하는 대규모 도민 파업사태가 발생하면서 제주도는 극심한 혼란 정국을 맞았다. 당시 3.1절 기념식장에서의 경찰과의 충돌로 전국에서는 38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제주북국민학교 발포로 희생된 희생자들은 관람군중들이었다. 총탄에 쓰러진 희생자들을 검안한 결과 대부분 등 뒤쪽이 총탄에 맞은 것으로 판명돼 제주도민들의 분노가 컸다.
1947년 국제 정세는 긴장상태였다.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그러했다. 미국은 ‘공산주의 봉쇄’를 선언하며, ‘공산주의의 위협을 방지한다’는 명목하에 군비를 증강하고, 군사기지의 신설이나 확장에 경주하는 등 소련에 대한 경계와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적인 의식을 전세계에 공표한 상황이었다.
결국 미 군정의 소련에 대한 적대감정이 한반도의 피바람을 일게 했으며, 색출되지 않은 친일파들이 미군정체제에 가세하면서 냉전시대의 좌, 우 이데올로기는 한반도의 대규모 양민 학살로 이어지는 비극을 낳았다.
1947년 3.1절 기념행사 발포사건으로 불거진 제주도민들의 분노는 1948년 4월 3일 민중봉기로 이어지며 ‘4.3제주 항쟁’이라는 엄청난 양민 희생자를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제주 4.3항쟁때 희생된 제주도민은 3만여명에서 8만여명 까지로 추산되고 있다. 4월 3일 제주도민들의 봉기는 무차별적인 폭동이 아니었으며, 도민들을 탄압하던 조직과 인사들에 대한 방어적인 저항이었다.
하지만 미군정은 자신들이 추진하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으로 인식, 도민 봉기군의 진압을 위해 대규모의 군, 경찰, 청년단을 증파했다.
도민 봉기군과 미군정의 유혈 대치는 장기간 계속됐다. 여순반란 사건은 바로 제주도민 봉기군의 진압 출동 명령을 거부한 14연대의 최후의 몸부림이었다.
동족학살을 거부한 명령 불복종이 반란이 되는 시대였던 것이다. 제주도민의 민중 봉기에 따른 유혈사태가 지속되면서 진압군의 만행은 갈수록 도를 넘었다. 10월 8일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한 미군정 및 정부는 11일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대토벌작전’을 위한 준비조치를 감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본토의 군병력을 투입하고자 내린 출동명령이었다. 여순반란 사건의 주동자가 된 14연대의 출동명령이었다.
여순반란사건은 ‘동족상잔을 강요하는 제주도 출동 명령 거부’를 명분으로 내세운 것으로, 14연대의 출동거부로 인한 반란은 결국 제주도를 넘어 전라도 동부지역까지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반란에 가담했던, 가담하지 않았던 ‘손가락 총’에 의해 희생된 희생자들의 후손들은 ‘빨갱이’, ‘빨치산’이라는 연좌제에 묶여 대대손손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못하는 처참한 상황으로 모진 세월을 버텨왔다. 그러던 사람들이 수년전부터 단체를 만들고 명예회복과 보상을 위해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제주도 4.3‘사건’이 ‘항쟁’이란 명칭을 얻게 된 것은 정부의 최소한의 보상 차원이었다.
여순사건은 명예회복조차 못한 채 그 유가족들은 눈물로 호소하며 지금도 법정에 서고 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금전적인 보상보다 ‘명예회복’이 더 절실하다. 여순반란사건이 아니라 ‘여순항쟁’으로 불리는 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제주 4.3항쟁은 미군이 제안한 민중 학살 초토화 작전이었다. 민중 초토화작전은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까지 4개월동안 가장 참혹한 희생을 보였다. 이 기간 중에 160여개 마을 가운데, 130여개 마을의 수만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됐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8월 24일 한미간 ‘한미군사안정잠정협정’이 체결된 후 주한미군이 한국군의 작전권을 갖게 되면서, 미군정이 개입한 양민 학살은 잔인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토벌대의 잔인성은 ‘오라리마을 방화사건’때 보여준 ‘할아버지와 손자간의 뺨때리기’를 통해 단면을 보여준다. 시인 고은씨는 ‘오라리’라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제주도 토벌대원 셋이 한동안 심심했다/ 담배꽁초를 던졌다/ 침 뱉었다/ 오라리마을/ 잡힌 노인 임차순 옹을 불러냈다 영감 나와/ 손자 임경표를 불러냈다 너 나와/ 할아버지 따귀 갈겨봐/ 손자는 불응했다/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경표야 날 때려라 어서 때려라/ 손자가 할아버지 따귀를 때렸다/ 세게 때려 이 새끼야/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세게 찼다/ 영감 손자 때려봐/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손자를 때렸다/ 영감이 주먹질 발길질을 당했다/ 이놈의 빨갱이 노인아/ 세게 쳐/ 세게 쳤다/ 이렇게 해서 할아버지와 손자/ 울면서/ 서로 따귀를 쳤다/ 빨갱이 할아버지가/ 빨갱이 손자를 치고/ 빨갱이 손자가 빨갱이 할아버지를 쳤다/ 이게 바로 빨갱이 놀이다 봐라/ 그 뒤 총소리가 났다/ 할아버지 임차순과/ 손자 임경표/ 더 이상 서로 따귀를 때릴 수 없었다/ 총소리 뒤/ 제주도 가마귀들 어디로 갔는지 통 모르겠다.
고은 시인의 시에서 보듯이 제주 4.3항쟁은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전통을 중시하고 민족적 자부심을 갖고 살던 민중들에게 4.3은 민족적 자부심은 물론 민족 정체성과 동방예의지국으로서의 미풍양속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사건이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 14연대에 제주 4.3사건을 진압하라는 출항명령을 육군본부가 하달하자, 이에 반대하는 14연대 소속 군인들은 경찰의 저지선을 무너뜨리고 여수를 장악했다. 이에 여수 시민 600여명이 반군에 가담하면서 반군은 주요기관과 건물을 접수하고 체포된 경찰관과 기관장, 우익 단체원, 유지를 집단 사살했다.
반군의 사살 대상이 경찰들이 많았던 이유는 일제치하 ‘순사’로 활동했던 친일 하수인들이 정부수립후 미 군정 체제에서 또다시 경찰복만 갈아입는 현실적인 당시의 상황때문이었다.
여수를 장악한 14연대의 주력 2개 대대는 10월 20일 순천으로 북상했다. 순천에 북상한 14연대는 또다른 군인들과 합세해 20일 오후 순천시내를 완전 점령했다.
이에 정부는 광주에 토벌사령부를 설치하고, 미군의 지원을 받아 10월 23일에 순천을, 27일에는 여수를 차례로 진압했다. 진압 군경과 우익 세력들은 봉기군에 가담하거나 협력했던 사람들을 ‘손가락총’으로 지목해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발생시켰다. 여순반란사건에서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까지의 시간동안 항쟁과 토벌은 계속됐으며, 여수 순천에서만 군경과 민간인 희생자는 집계된 것만 1만여 명이 넘었다.
여순사건 당시 한국군의 작전 통제권은 미국의 수중에 있었으며, 따라서 여순사건에 대한 진압작전 또한 미군의 통제하에 있었다.
공중정찰기 등을 통한 미군의 발달무기 지원으로 14연대 봉기 군인들은 대부분 광양 방면의 백운산과 지리산 등에서 진압군에 의해 사살되면서 14연대 반란은 끝이 났다. 10월 23일 순천을 탈환한 진압군은 ‘이승만 정부의 여순사건 배후를 공산주의자들로 지목하는 등 모든 문제를 공산주의 좌익 세력’으로 모는 상황에 맞춰 14연대 반란군과 민간인을 구별하지 않고 사살했다.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한 이승만 정권은 ‘여순사건’을 계기로 ‘반공독재국가체제’를 더욱 강화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했으며, 희생자의 가족들은 연좌제에 묶여 힘겨운 세상을 살아야 했다.
(사)여순사건순천유족회(이사장 장준표)는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하나된 조국과 평등한 사회를 꿈꾸었다가 희생된 이들의 명복을 빌고 그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뜻을 담아 시민 모금과 순천시의 지원을 받아 지난 2006년 순천 팔마체육관 구내에 위령탑을 세웠다.
한편 진안 데미샘부터 이어진 섬진강은 순천 섬진강 하구변 공원에서 더욱 푸른 빛깔을 띠며 유유히 흐르고 있다. 1948년 10월 순천역 앞에서의 총성은 섬진강물과 세월에 묻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순천시는 현재 섬진강 하구변을 공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연재·보도되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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