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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구한 성웅 이 충무공

영웅 이순신 장군 탄신일을 맞아

2013년 04월 30일(화) 22:15 [순창신문]

 

ⓒ 순창신문

@4월 28일은 성웅 이순신(1545~1598)장군의 탄신일이다. 세종대왕이 문(文)으로 나라를 구했다면, 성웅 이 장군은 용맹과 무(武)로써 나라를 구했다.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충렬사에는 충무공의 시신을 안치했던 가묘와 영정이 있다.
충렬사는 충무공이 순국한지 34년이 되던 1632년에 지역의 선비들이 노량해전과 충무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던 조그만 사당에서 시작됐다.
1662년에는 나라에서 충렬사란 이름을 내렸으며, 충렬사 옆에 있는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충렬사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충무공의 일대기가 기록돼 있다. ‘충렬사는 충무공의 제사를 받드는 곳’이라고 비문은 시작한다.
‘1591년에 공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이듬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곧 바다로 침입하는 왜적을 맞아 싸워 옥포, 노량, 남포, 사량에서 적을 크게 무찌르고, 당항포에서는 적선 40여척을 쳐부수었고, 다시 영등포, 견내량, 안골포 등에서 적을 대파하고 부산으로 나아가 적선 백여척을 쳐부수고 한산도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나라에서는 공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였다. 이 때에 공의 빛나는 공적을 시기하는 자가 거짓으로 모함하는 것을 듣고 정부에서는 공을 소환하여 옥에 가두고 장차 큰 화를 당하게 되었으나, 다행히 공을 옹호하는 대신의 진언으로 죽음을 면했으나, 관직이 삭탈되고 이어서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이 때 원균이 공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되었다가 적에게 크게 패하여 자신도 전사하였으며, 한산도는 왜적에게 점령되었고 적은 이곳을 거점으로 서해에서 상륙하여 남원을 함락하기에 이르렀다. 정부에서는 다시 공을 기용하여 통제사에 임명하였다. 공은 곧 순천에 달려가서 흩어진 병졸을 모아서 마침내 어란도와 벽파정에서 적을 크게 파하였다. 적은 병력으로 몇배에 달하는 강한 적군을 무찌른 위대한 공의 전과는 명나라의 장군에 의하여 황제에게까지 보고되어 공의 명성은 비로소 천하에 알려졌다. 명나라의 장군 진린이 이곳에 와서 공과 함께 하고 고금도로 진영을 옮겼다. 이 때 적장 소서행장은 갑자기 적들을 철수하기 위하여 물러갈길을 틔워줄 것을 요청해왔다. 명나라 장군들은 적의 뇌물을 받고 허락해주기를 권하였으나, 공은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다. 소서행장은 하는 수없이 사천에 주둔한 적군의 지원을 받아 이곳을 빠져나가려 하는 것을 공은 진린과 합세하여 노량에서 요격하여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공은 불행히 유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때는 선조 31년(1598) 11월 19일이다. 이곳 노량에는 과거부터 공의 사당이 있었는데, 통제사 정익이 새로 개축하고 현종 4년(1663)에 나라에서 충렬사의 현판을 내렸다. 1661년 의정부 우찬성 송시열 짓고 의정부 좌참판 송준길 쓰다. 서기 1980년 11월 임창순 역술’ 이 우암 송시열이 지은 비문의 내용이다.
남해 충렬사에는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 가묘’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이 전한다.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진왜란 중 노량해전에 참전 1598년 11월 19일 관음포 앞바다에서 순국하였으며, 공의 유구는 최초로 관음포에 올려졌고, 이 곳 남해 충렬사에 안치되었다가 고금도를 거쳐 충청남도 아산 현충사로 운구되기 전의 가묘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한국사에서 유일하게 ‘성웅’으로 불리는 영웅 이순신 장군
왜군 함대 73척 중 70척을 궤멸시키고 1만명의 왜군 중 생존자는 고작 400명에 불과했던 한산대첩은 왜군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놓은 것은 물론 식량 보급로까지 차단해 왜군의 전투능력을 상실시켰다.
한산대첩 이후에도 장림포,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초량목 해전에서도 조선군의 피해는 전혀 없이 왜선 34척을 침몰시키고 2천여명의 전사자를 내는 승전보를 울린다.
또 이 충무공 함대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본거지였던 부산을 타격하기로 결정하고 8월 24일 부산포를 공격한다. 부산포 앞바다에서 와키자카, 가토 등과 정면으로 충돌한 충무공의 함대는 왜선 128척을 격침시키고 3800명의 왜군을 무찌르는 전과를 올린다.
이 때 왜적의 수장인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왜군이 대파당하자 격분한 나머지 이 충무공과의해전을 금지하는 금지령을 내린다.
때를 같이해 일본에 심어놓은 조선군 첩자인 요시라는 조선 군에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는 정보를 흘린다. 이에 선조는 이 충무공에게 가토가 바다를 건널 때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이 시점에서 충무공이 선조의 명령에 항명해 투옥되었다는 설이 전해져 내려 왔었으나, 사실은 조선해군 경상우병사 김응서가 함대를 이끌고 부산으로 향했는데, 요시라는 ‘가토가 부산으로 온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게 된다. 충무공은 가토를 잡기위해 망망대해에서 가토를 기다리는 건 자살행위라고 판단해 부산에서 절영도로 후퇴하게 된다. 이 때 가덕왜성에서 농성하던 왜군에게 5명의 조선군이 포로로 잡히게 된다. 이에 격분한 이 충무공은 직접 함대를 이끌고 가덕왜성으로 가 왜군을 항복시키고 포로를 구출해 돌아오던 중 가토를 잡으라는 출전을 지연했다는 모함을 당해 1597년 2월 파직되고 옥에 갇혀 압슬형의 모진 고문을 받게 된다. 충무공의 수군통제사 직을 인계받은 원균은 12척의 배만 남기고 대패하고 만다. 이 때 한양에서 판중추부사 정탁의 청원으로 4월 1일 간신히 출옥하게 된 이 충무공은 권율 도원수 밑에서 백의종군하게 된다.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이 보유한 169척 중 12척만을 남긴채 모두 침몰하는 참패를 당하고 만다. 당시 충무공을 도왔던 용맹한 장수들이 이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하고 만다. 충무공이 양성해놓은 조선의 수군들이 단 한 번의 전투로 전멸해버린 상황에서 왜선 330척의 대군이 명량 앞바다로 몰려왔다. 이 때 충무공은 ‘12척의 전선으로 죽을 힘을 다해 막아 싸우면 능히 대적할 수 있다’는 장계를 임금에게 올리고 전설의 전투가 된 명량대첩을 시작한다. 이 싸움에서 조선수군은 왜선 90척을 격파하고 왜장을 비롯한 8천명을 수장시킨다. 조선수군의 피해는 2명의 전사자를 내는데 불과했다.
명량대첩에서 대승을 거둔 충무공은 다시 조선 수군들을 수습한 뒤 명나라의 수군과 함께 도요토미히데요시 사망으로 철수하는 왜군을 전멸시키기 위해 노량 앞바다 관음포에 매복했다가 여수해협으로 도망치는 왜군을 향해 기습하던 중 적의 탄환에 스러지니 1598년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이었다.
이 충무공의 충정어린 마지막 유언은 후세에 길이 남아 심금을 울리고 있다. “지금은 전쟁이 급하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은 7년간의 전쟁을 조선의 승리로 이끈 마지막 승전보였다.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조명연합군의 피해는 이 충무공을 비롯한 10명의 전사자와 300명의 부상자를 냈다. 왜군은 이 전투에서 4만명이 전사하고 1만 3천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400척이 넘는 왜선이 격침되거나 파손됐다. 기록에서는 50척의 왜선만이 도주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성웅 이순신 장군의 죽음은 전투가 끝난뒤에 알려졌으며, 백성들의 통곡은 바다를 덮었다. 한국사에서 유일하게 ‘성웅’으로 불리는 영웅 이순신 장군.


성웅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모함으로 삭탈관직돼 백의종군하던 백의종군로를 전라남도가 ‘난중일기’를 근거로 재현해 눈길을 끌고 있다.
전라남도는 ‘인간 이순신이 걸었던 비움으로 승리하는 정신을 담은 길’이란 백의종군로를 만들어 ‘남도 이순신 길’을 조성했다.
전라남도는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당해 절망으로 가장 힘든 시기에도 가장 뛰어난 행보와 구국의 희망을 보였던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길은 난중일기를 토대로 재조명하고 절망에서 희망에 이르는 119.1km의 횡단코스로, 성웅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삶과 절망의 아픈 역사를 비움과 심신수련의 생명의 길이 되어 후세를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성웅 이 충무공의 생애와 역사를 기억하기를 바라고 있다.
백의종군로는 총 7개 코스로 나뉘어져 있다. 제1코스는 구례 시발점인 산수유시목지에서 시작되는 백의종군로이며, 제2코스는 서시천 꽃길따라 뚝방 마실길이, 제3코스는 섬진강 벚꽃길이, 제4코스는 섬진강 황전늘폼길, 제5코스는 송치재의 눈물길로 송치협곡을 넘는 충무공은 참담한 심정으로 눈물을 흘렸을 눈물의 송치계곡이다. 제6코스는 순천부 구국다짐길로 충무공은 순천 학구 삼거리 신촌마을 송원의 객관에서 여정을 풀었다. 지금은 교통의 요지로 변화된 학구 삼거리는 옛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이 충무공이 구국의 전술을 구상해 냈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제7코스는 구례공설 운동장에서 정유재란을 맞아 숯한 의병들이 순국했던 석주관으로 가는 길이다.
제3코스인 백의종군로 ‘섬진강 벚꽃길’은 세상이 바뀌고 이념이 바뀌고 사람이 모두 바뀌었어도 후손된 자들로 충무공의 마음을 헤아려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아무 생각 없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몰라도 한 번 쯤은 되짚어 볼 것들이 분명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충무공의 유해를 안치했던 남해의 충렬사 담 벼락에서 버젓이 피어있던 벚꽃이나, 충무공을 기리는 백의종군로의 벚꽃길 등을 우리는 그냥 ‘꽃’이라고만 바라봐야 맞는지, 지자체 위정자들이 세상을 보는 눈이 범인들은 궁금할 따름이다.

↑↑ 관음포를 바라볼 수 있는 첨망대에 설치된 이 충무공 순국 설명판

ⓒ 순창신문

↑↑ 관음포가 보이는 노량앞바다.

ⓒ 순창신문

↑↑ 남해 충렬사 입구. 충렬사 담에도 벚꽃이 피어있다.

ⓒ 순창신문

↑↑ 노량앞바다를 볼수있는 첨망대에서는 광양제철소가 한눈에 보인다.

ⓒ 순창신문

이정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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